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24)화 (124/138)

수도 페론의 공기는 맵고 탁했다.

다른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은 증기 자동차가 다니는 도시였고, 전역의 철로와 연결된 가장 큰 기차역이 있으며, 외곽 지역에서 규모를 키워나가는 공장 지대에서는 밤낮없이 기계가 돌아갔다.

그러나 동시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밤에도 화려한 파티가 연일 이어지는 활기찬 도시이기도 했다. 온갖 희귀한 것들이 몰려들고 1년 내내 축제와 행사가 끊이지 않는 곳.

도시의 분위기가 이러하다 보니, 자리 잡은 주요 건축물들의 위용도 만만치 않았다. 왕립 재판소 건물은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했다. 게다가 바로 옆에는 베렌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예배당이 있어서, 평소에는 순례객들만으로도 인근이 번잡스러웠다.

하물며 재판소에서 사람들의 흥미를 끌 법한 사건이라도 다뤄질 때면? 당연히 각종 신문사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사진기와 펜을 들고 몇 시간이고 진을 쳤다.

가령 오늘의 사건이 그랬다.

타국의 고고한 명문가 외동딸이 보여 준 이면, 그녀가 국경을 넘어서까지 쫓아다니는 미모의 남자!

내용을 뜯어보면 이렇게 떠들썩하게 공개 재판이 열릴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정보가 빠른 기자들은 이 일을 조용히 묻기 위해 몇몇 대귀족들 사이에서 은밀한 청탁이 오갔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기어이 일이 커진 건, 디트리언 후작이라는 정체불명의 사내 때문이다. 그가 공개적인 사과를 받아야겠다며 기어이 재판장의 문을 연 것이다. 그러니 신문사들 사이에서는 이 남자를 궁금해할 수밖에.

“그런데 연약한 여성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세우는 걸 보면, 그도 퍽 옹졸한 모양이야.”

재판소 앞에서 대기 중이던 기자가 제 옆에 앉은 조수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디트리언 후작에 관해 알려진 정보는 많지 않았다.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라면 디트리언 후작의 외모 정도일까?

지방 도시에서는 외모만으로 상당히 이름 높았다고 하니, 아마도 얼굴만 볼만한 어느 가문의 먼 방계가 아니겠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말테 공작가에 이런 식으로 공개적인 수치를 주는 걸 보면 천지 분간 못 하는 애송이일 게 분명해.”

“친척에게 거대한 재산을 갑자기 상속받은 졸부가 아닐까요?”

“졸부 따위가 말테 공작가를 건드려? 게다가 엘레오노르도 엮였다고. 그 두 가문과 연관된 다른 상류층 인사들까지 적으로 돌린 셈인데,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졌으면 이런 짓을 벌였겠어?”

기자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먼발치에서나마 직접 보았던 루지아를 내심 좋게 생각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루지아가 남자를 만나려는 불순한 의도로 평화 순례단에 합류했다는 말도 믿지 않았다. 지방 도시인들은 묘하게 시야가 좁고 편협한 구석이 있어서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는 법이었다.

하지만 수도인 페론은 달랐다. 폐쇄적인 지방 도시와 달리 개방적이고 객관적으로 사건을 평가해 줄 판사와 법조인들이 가득했다.

“하여간, 재판을 이렇게까지 크게 키운 능력 하나는 참 궁금… 어?”

“저 마차인 모양입니다!”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구시렁대던 기자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조수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화려한 금색 창살로 치장된 재판소 문 앞으로 새카만 사륜마차가 멈춰 섰다.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이 마차로 몰려들었으나, 건장한 경관들에게 가로막혔다. 기자와 조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처음부터 자리 선점을 탁월하게 해 둔 기자는 인파의 앞줄에 서 있었다. 덕분에 마차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내리는 사람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남자는 검은 톱 해트를 쓰고 있었고, 목을 전부 가릴 수 있도록 깃을 세워 크라바트로 감싼 상태였다. 겉에는 검은 프록코트를 걸치고 있었으며, 장갑을 낀 손에는 상아 소재의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를 쥔 채였다.

그는 전체적으로 검은색의 말끔한 차림새가 아주 잘 어울리는 큰 키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의 고급스러운 옷차림이나 반듯한 자세 같은 걸 눈에 담을 정신 같은 건 누구에게도 없었다. 왜냐하면, 모자 아래에 드러난 남자의 얼굴이 그 모든 걸 잊게 했기 때문이다.

모자챙이 만들어 낸 그늘 속, 새파란 눈동자가 무심하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몇몇 이들은 탄성을 억누르지 못했다.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그 소리를 무시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기자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남자의 얼굴을 홀린 듯 보았다.

그는 흰 피부에 날카로운 얼굴선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어떤 조각가도 이처럼 완벽한 얼굴을 깎아 내진 못할 것 같았다. 일자로 다문 붉은 입술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였으나 그것은 도리어 그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했다.

모여든 사람들은 죄다 목청 높여 말이라도 걸어 볼 작정이었을 텐데,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구 하나 말문을 열지 못했다.

남자와 그의 수행원들로 추정되는 자들은 경관들이 미리 확보해 둔 길을 통해 유유히 재판소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철컹!

남자를 위해 열렸던 재판소 정문이 닫혔다. 그 소리가 신호가 된 듯,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허….”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뱉은 기자가 뒤늦게 재판소 안쪽을 들여다보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이미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몇 시간이나 죽치고 앉아 고생했음에도 목적은 전혀 이루지 못했다. 여전히 디트리언 후작은 정체불명에 제대로 된 정보 하나 확인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나는 확실하군.”

“…예?”

“대단한 말테 공작 영애조차 쫓아다닐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엄청난 미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 말이야.”

기자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건진 게 없으니 편집장에게 된통 깨질 테고, 마땅히 건진 정보가 없어 기사를 쓰기도 고역스러울 텐데 당장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심결에 기사의 제목은, ‘신의 은총을 독차지한 디트리언 후작의 등장’ 정도로 확정해 버렸을 뿐.

***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당사자는 정작, 매사에 무관심한 얼굴이었다.

재판 내용은 아돌프와 다른 법률 조언가들이 예상한 대로 진행되었고, 말테의 반응 또한 마찬가지였다. 너무 뻔한 나머지 지루함에 하품이 날 정도로 말이다.

말 한마디라도 걸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저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어렵지 않게 무시하며, 디무스는 흐린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재판장에 들어설 때부터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지금은 잿빛 구름이 온 하늘을 꽉 채우고 있었다. 아직 날이 저물지도 않았는데 해는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내일부터는 연일 비가 내릴 성싶었다.

재판은 며칠 간격으로 이어질 예정이었고, 이제 겨우 첫날에 불과했다. 기어코 재판장에 출석한 디무스의 행태에 격분한 루지아가 아마 다음 재판 때 군 복무 시절 뒤집어쓴 누명을 걸고넘어질 테니, 그것에 관한 준비를 하기 위해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숙소는 수도에서 손꼽히는 최고급 호텔이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라, 저녁에는 바깥 풍경을 감상하며 편히 쉴 수 있을 거라고 찰스가 넌지시 말을 전해 왔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디무스의 신경은 온통 애들린데에 가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리브는 디무스가 떠나던 날, 마중조차 나오지 않았다.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던 게 디무스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유난히 반짝거리며 햇살을 반사하는 유리창 때문에 리브의 표정은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로만과 티에리, 필립까지 애들린데에 두고 왔으나 저택을 나온 그 순간부터 디무스는 초조했다. 마음 같아서야 그녀를 제 곁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리브를 볼 때마다 두려웠고,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눈앞에 두었다는 사실에 자꾸 자신감을 상실했다.

“그대를 뺀 모든 것에 있어서 나는 단 한 번도 아쉬운 적이 없었어.”

그는 리브가 아쉬웠다. 아쉬운데 무얼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일단 루지아부터 치워 버리기 위해 반쯤 도피하듯 수도행을 결정했다. 마치 리브가 그러했듯.

“감당할 수 없으니까 도망간 거예요.”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정작 상황이 이렇게 되니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녀도 아마 제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으리라. 도통 답을 내릴 수 없는 감정이라 무작정 시야 밖으로라도 치우려 한 것이다. 다만 디무스를 치울 수 없으니 본인 스스로 떠난 것일 뿐.

그렇다면 그녀 역시 저와 같은 마음으로 도망갔던 건가.

리브의 도망을 이해했으나, 안타깝게도 디무스는 낙관적인 상상으로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는 애들린데 저택 로비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본인을 사랑하느냐고 묻던 리브.

디무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두려움을 내비친 리브.

그녀에게서 엿본 그 두려움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튀어나오면 그녀는 공포에 질려 다시 도망칠 것 같았다. 재회한 리브는 디무스에게 무엇 하나 기대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애들린데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녀가 디무스에게 내비쳤던 무관심과 거리감을 떠올려 보자면, 오히려 디무스의 마음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게 자연스러웠다.

“제 주제를 알라고 한 건 후작님이시잖아요.”

그 말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디무스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본인의 주제를 철저하게 지키려 했고, 그로 인해 디무스의 사랑은 그녀에게 되레 두려움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그리하여 디무스는 차마 그녀에게 제 감정을 명료하게 정의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두려웠으나, 그녀 또한 저처럼 만들고 싶진 않았다. 두려움에 질린 리브가 행여 다시 그의 곁을 떠나려 든다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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