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23)화 (123/138)

반쯤 딴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이던 리브가 멈칫했다. 코리다는 그런 리브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 후작 아저씨, 불면증 엄청 심하다며? 증상이 낫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떠나려고 해서 티에리 선생님이 아주 골치가 아프신가 봐.”

입술을 삐죽거리며 조잘대던 코리다가 공부나 하러 가야겠다며 등을 돌렸다. 코리다가 떠나고도 리브는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하….”

리브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아무리 봐도 디무스의 행동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급했다. 그의 수하들마저 당혹스러워할 만큼.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저 변덕스러운 행동을 보며 혼자 끙끙거리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어금니를 꾹 깨문 리브가 성큼성큼 디무스에게 다가갔다.

“교통편은….”

“후작님.”

로비 중앙에 서서 필립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던 디무스가 리브의 부름에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그 즉각적인 반응은 리브가 저택에 있는 동안 익숙하게 보아 온 것이었다.

제 목소리에 이렇게나 곧장 반응하는데 관심이 떨어졌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가정이다. 저 눈빛 좀 보라지.

“바쁘신가요?”

“무슨 일이지?”

“바쁘지 않으면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는지 여쭙고 싶어서요.”

리브의 말에 디무스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미간을 찡그리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글쎄.”

“제게는 전혀 시간을 내줄 의향이 없으시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여쭐게요.”

리브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이제 저에게 질리셨나요?”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그녀의 물음에 디무스는 물론이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고용인들까지 일시에 굳어 버렸다.

놀란 표정으로 리브를 돌아본 고용인들은 필립의 매서운 눈초리에 얼른 자리를 비켰다. 필립이 눈치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디무스는 딱딱하게 굳어 리브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을 몇 번이나 곱씹고서야 뒤늦게 이해했다.

“하, 질려?”

“네.”

디무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일그러졌다.

“떠난다고 하니 기쁜가? 내가 그대에게 질린 것 같아서? 안타깝지만 그 기대에는 부응해 주지 못하겠군. 그러니까….”

“그럼 갑자기 왜 태도가 달라지셨죠?”

날카롭게 말을 쏟아 내던 디무스가 멈칫했다. 리브는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후작님을 종잡을 수 없어요.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젠….”

스스럼없이 나오던 말이 순간적으로 턱 막혔다. 울컥 치민 감정 때문이다.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감정을 억누른 리브가 조금 잦아든 음성을 차분하게 뱉었다.

“이제는 혼자 추측하고 상상하는 것도 지쳐요.”

그가 저를 한낱 정부로 생각했더라면 이럴 리가 없다.

그와 함께 저택에서 생활하면서 리브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자신은 그의 정부가 아니었다. 하다못해 창부는 더욱 아니었다. 창부의 발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는 귀족은 듣도 보도 못했다.

곁에 없으면 안달복달하며 어미 잃은 아이처럼 구는 것도, 무언가를 요구하면 되레 선물을 받은 양 기뻐하는 것도, 만사 제쳐 두고 수하들이 뭐라고 하든 그녀에게 들러붙어 있는 것도 전부.

전부, 전부 평범하다고 할 수 없었다.

“차라리 확실하게 말씀해 주세요.”

“무얼.”

“제게 왜 이러시는 건지.”

그들은 언젠가 이 로비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되풀이했다. 그때와 달리 리브의 손에 총 같은 건 없었지만.

리브의 말에도 디무스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덤덤했다.

“내가 답을 해 주면….”

디무스의 푸른 눈동자가 깊게 침잠했다. 한참 뜸을 들이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너는 시든 장미라도 화병에 꽂아 줄 텐가?”

그것은 늘 오만하고 고고하던 남자가 뱉기에는 너무도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그러나 신중하게 나온 질문 뒤로 이어진 눈빛은 자못 강렬하고 집요했다. 좀 전까지 그녀를 두고 가겠다며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진득한 집착이 묻어났다.

리브는 그가 여전히 자신을 원한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여전히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저 짐칸 사이에 리브의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어쩌면 속으로는 수십 번 그런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강제하면 리브가 거부할 재간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리브에게 아무것도 명령하지 않았다.

“후작님.”

꽉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부른 리브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차마 뱉지 못했던 그날의 물음이 이번에는 온전하게 혀끝을 타고 흘러나왔다.

“저를 사랑하세요?”

디무스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 얼굴에 감정은 좀처럼 엿보이지 않았다.

반쯤은 확신을 품고 물었던 리브는 다소 건조한 그의 반응에 덜컥 마음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또 착각하고 혼자 멋대로 기대감을 품은 걸까?

최근 눈에 띄게 달라진 디무스에게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리브는 과거에 저를 보며 탄식하고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차던 디무스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관대하게 뭐든 들어줄 것처럼 굴다가 다가서면 정색하며 주제를 알라고 선을 긋던 모습을.

과거를 떠올린 리브의 눈동자에 옅은 두려움이 깃들었다.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아 눈빛을 숨겼지만, 애초부터 디무스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던 터라 별 소용없는 행동이었다.아마도 그는 그녀가 조금 전 내비친 마음을 알아챘을 터였다.

“나는 수도로 가서 말테 공작 영애를 재판장에 세울 예정이네.”

무덤덤한 목소리로, 디무스가 말문을 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지.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대귀족의 품위를 잃고 함부로 행동했으니까.”

그건 리브의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리브는 조금 전처럼 호기롭게 대답을 요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하지 않는 게 간접적인 대답일 수도 있질 않나. 리브의 물음에 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함을 저런 고상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건지도 몰랐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리브가 체념 어린 숨을 뱉으려는 찰나였다.

“내가 진지하게 만나고자 하는 상대를 두고 정부라는 헛소문을 퍼뜨린 데다, 공공연하게 모욕하고 명예를 깎아내리는 옹졸한 짓거리를 했다고 질타할 작정이야.”

고저 없는 음성이 리브의 귓가에 닿았다.

“너는 이게 무슨 감정인 것 같은데?”

내내 시선을 내리고 있던 리브가 고개를 들었다. 크게 흔들리는 리브의 눈동자를 디무스는 똑바로 직시했다.

“나는 이 감정에 붙일 만한 이름이라곤 하나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리브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한데 그대가 동의할지는 모르겠군.”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끝으로 디무스가 입을 다물었다. 리브는 마지막의 누그러진 어투를 듣고서야 아교로 단단히 붙여 둔 것처럼 다물고 있던 입술을 달싹일 수 있었다.

“…제가 후작님께 그만한 의미를 가진다고요?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오기로 그러시는 게 아니라?”

질문에 묻어나는 희미한 불신을 느꼈는지, 디무스가 신경질적인 미소를 흘렸다.

“오기라니, 그런 불필요한 감정에 휘둘리느니 버리는 게 나로서는 깔끔하고 쉬운 것을.”

딱 잘라 부정한 그가 냉랭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그대를 뺀 모든 것에 있어서 나는 단 한 번도 아쉬운 적이 없었어.”

리브가 디무스를 멍하게 응시했다. 수려하게 넘긴 백금발도, 서늘함이 감도는 푸른색 눈동자도, 오만하게 치켜든 턱 끝도 전부 그녀가 아는 사내의 모습이었다. 저런 얼굴로 뱉는 것이라고는 늘 험한 조롱과 경시뿐이었는데.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은 건 리브였지만, 막상 돌아오는 대답을 들으니 현실감이 도통 느껴지지 않았다. 디무스가 평소와 같은 냉담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도 비현실적인 감각에 한 몫 더하고 있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침묵하고 있는 리브를 물끄러미 보던 디무스가 눈살을 찡그렸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표정이 썩 개운하지는 않았다.

혀로 아랫입술을 축인 그가 느리게 입술을 뗐다.

“칼리오페 추기경이 곧 그라티아가 될 텐데.”

칼리오페 추기경의 이름을 뱉는 그의 표정은 심히 떨떠름했다. 운을 띄우고선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마침내 결정한 듯, 매끄럽고 선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덕분에 내가 그라티아의 비공식적인 사생아가 될 예정이거든.”

뜻밖에 알게 된 그의 비밀에 리브가 눈을 크게 떴다. 디무스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릴 의향이 없는지,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공식적으로는 그라티아를 후견인이자 대부로 삼은 귀족으로 알려지겠지. 간사한 자들이 누구의 눈치를 볼지 너무도 뻔하지 않나?”

디무스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내게 무언가 더 아쉬울 게 생기진 않을 것 같군. 재판에서 질 일은 없을 걸세. 그로 인해 그대의 생활에 문제가 생길 일도 없을 거고.”

그는 리브가 말테와의 재판에서 어떠한 불이익을 받을까 봐 걱정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미 부에르노에서 루지아로 인해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도 비슷한 곤경에 처하진 않을까 겁먹은 것처럼 비친 모양이었다.

리브가 여전히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자, 뭔가 더 이야기하려던 디무스가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아예 몸을 돌렸다. 멀어지려는 그의 등을 응시하던 리브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재판에서 이긴다고 해도, 후작님은 한낱 여자에게 눈이 멀어 불필요한 적을 만드는 어리석은 남자라며 비웃음당하실 거예요.”

자리에서 멈춰 선 디무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된다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와 더럽게 엮이는 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감히 그대에게 눈독 들이지 않으려 하겠군.”

오히려 한결 환해진 표정의 디무스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리브는 흡족해하던 디무스가 자신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하고 로비를 떠날 때까지 얼빠진 얼굴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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