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22)화 (122/138)

겨우 정부 하나 때문에 온 나라를 소란하게 만들어서야 되겠느냐. 네 분노는 모두에게 충분히 전해졌으니 이만하자. 이런 사소한 문제로 대귀족들과 척을 지는 것도 낯부끄러운 일이다.

대강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사생결단을 각오하고 몰아세웠다가 다 같이 망하자고 달려들면 곤란하니, 이만 잘 합의하라는.

“억울할 노릇 아닌가. 내가 한 거라고는 신문에 말테와 엘레오노르 이름을 몇 번 띄운 게 전부인데.”

냉소적인 디무스의 중얼거림에 아돌프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신문에 몇 번 띄운 일로 두 가문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조롱을 들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아돌프였다.

이번 일로 디무스는 단지 두 가문과 척을 졌을 뿐 아니라, 해당 가문과 친한 다른 가문들과도 껄끄러운 관계가 되었다. 사교 활동을 하지 않을 작정이라고 해도 굳이 적을 늘려서 좋을 일은 없었다.

따라서 추기경의 만류 또한 시기적절했다.

“더 밀어붙이면 과하다는 말이 나올 겁니다.”

“내가 뭘 했다고?”

“…정부가 당한 모욕을 재판장까지 끌고 간 선례가 없습니다.”

신경질적으로 편지를 접으려던 디무스의 손길이 멈칫했다.

“아돌프.”

“네.”

“그 빌어먹을 정부 타령, 다시는 내 귀에 안 들리게 해.”

“…주의하겠습니다.”

아돌프의 대답에도 디무스의 구겨진 얼굴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정부라니, 세상천지에 이런 정부가 어디 있나. 리브는 정부라기보다는.

정부라기보다는….

완성되지 못한 문장을 곱씹으며, 디무스가 몸을 일으켰다. 재판과 관련된 내용을 리브의 앞에서 보고받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옆방으로 들어온 지도 10여 분가량 지난 듯했다. 그가 자리를 뜨기 직전 리브는 책을 읽고 있었다.

10분 만에 다 읽을 수 있는 두께가 아니었으니 아마 나올 때의 모습 그대로겠지. 그럼에도 너무 오랫동안 리브를 시야 밖에 두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벌컥.

급하게 문을 열자, 커다란 창틀에 걸터앉은 리브의 모습이 보였다. 예상대로 그가 자리를 뜨기 직전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달라진 부분을 찾자면, 눈을 감고 있다는 점이었다. 펼쳐진 책은 무릎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고, 고개는 창문에 비스듬히 기댄 리브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볕이 리브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그 따뜻한 온기가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 준 듯했다. 빛을 받아 유난히 적색 윤기가 도는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덮으며 흐트러져 있는 게 보였다.

리브 로이데스는 정부가 아니라….

미완성의 문장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문가에 서서 잠든 리브를 응시하던 디무스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는 지팡이를 짚는 손길마저 조심스럽게, 행여 잠든 이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해서 조용히 움직였다.

그 노력 덕분인지, 디무스가 지척에 다다르도록 리브는 깨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본 리브의 뺨은 분홍빛이었다. 햇빛 때문에 살짝 열이 오른 듯했다. 그 위로 흘러내린 옆머리가 퍽 귀여웠다. 조금 전까지 아돌프에게 전달받은 성가신 보고들이 전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숨소리는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디무스가 홀린 듯 그 입술에 손끝을 댔다.

리브 로이데스는….

순간 리브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졸음이 가득한 녹색 눈동자가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이다가 차츰 초점을 되찾아 갔다. 본인이 잠깐 졸았음을 깨달은 리브가 낮게 탄성을 뱉었다.

그리고 그녀가 느리게 깨어나는 모습을 낱낱이 지켜본 디무스의 머릿속에 돌연 벼락같은 명제가 완성되었다.

‘리브 로이데스는 유일하다.’

“후작님?”

얼어붙은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디무스를 발견한 리브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창백한 얼굴로 리브를 마주 보던 디무스가 지팡이를 꽉 쥐었다.

“…후작님?”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리브가 재차 디무스를 불렀다.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리브의 얼굴이 짐짓 심각하게 변했으나, 디무스는 그녀에게 무어라 응답하는 대신 아예 몸을 돌렸다.

때때로 리브를 볼 때면 치밀던 원인 모를 화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이제는 알겠다.

그것은 리브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음에도 전혀 알지 못하고 헛다리나 짚어 대는 자신을 향한 화.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제 모든 것을 뒤흔들 능력을 가진 유일한 존재라는 걸.

그녀를 소유하고 싶고, 가둬 두고 싶고, 도통 놓지 못하겠다고 여기는 이 욕망의 이름을.

세간에서는 이것을 아마도 연정이라고 부를 것이다. 평생토록 입에 올려 본 적 없는 이름이지만, 아마 그것이 맞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불안과 집착, 비이성적인 상태가 연정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디무스는 완전한 패배를 시인했다.

자신은 그녀에게 패배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디무스는 리브가 두려워졌다.

***

돌연 애들린데를 떠나겠다는 디무스의 선언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리브는 디무스의 선언을 듣고서야 자신이 그에게 언제 떠날 거냐고 물으면서도, 정말 떠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와 부대끼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무의식적으로 그의 존재에 익숙해진 듯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놀란 건 리브뿐만이 아니었다. 아돌프도 필립도, 저택 호위를 담당하고 있던 로만까지 아무 조짐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다. 특히 로만은 디무스가 애들린데에 남아서 리브의 호위를 하라고 따로 명령하는 바람에 더 바빴다.

“제가 어떻게 후작님의 곁을 비운단 말입니까?”

“경의 호위가 없어도 위험할 일은 없어.”

“말테 공작 영애가 얼마나 과감하게 사고를 치는지 이미 보셨잖습니까.”

“그러니까 경을 이곳에 남겨 두는 거지.”

로만의 항의를 무시하며 떠날 채비를 하던 디무스가 문득 이쪽을 돌아보았다. 리브가 그런 그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지금이라도 어서 짐을 챙기라고 재촉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디무스가 덤덤한 얼굴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에게 딱히 내릴 명령 같은 건 없다는 듯.

로만을 두고 간다는 걸 보면 리브를 완전히 자유롭게 해 주겠다고 결심한 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가 눈앞에 없으면 세상이 뒤집힐 것처럼 굴던 남자가 갑자기 저택을 떠나겠다고 부산 떠는 것은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상한 건 전혀 기쁘지 않은 리브의 마음이었다.

분명 한때는 디무스를 좀 떼어 놓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막상 이런 식으로 그가 가 버린다고 하니 영 찜찜하고 떨떠름하기만 했다.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던 리브가 아돌프에게 슬쩍 다가가 질문했다.

“부에르노로 가시나요?”

“아니요, 수도로 갑니다.”

“그렇군요.”

수도로 가야 할 일이라면, 혹시 말테와의 분쟁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신문 읽기를 소홀히 했었다. 신문에 새로운 내용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강변에 다녀온 뒤로 리브는 한동안 소설만 주야장천 읽으며 시간을 보낸 참이었다. 발목을 핑계 삼기는 했지만, 실상은 그저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앞으로도 진흙은 내가 털어 줄 테니.”

스스럼없이 제 발을 닦아 주던 디무스를 뇌리에서 지우기란 쉽지 않았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작정 활자를 읽어도 떠오르는 건 제 앞에서 몸을 낮추던 남자의 찬란한 백금발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진흙이 묻은 장갑을 버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이 들고 와서 깨끗하게 세탁하라고 신신당부하기까지 했다. 그가 자신이 선물한 장갑을 버리지 않고 사용 중이라는 건 계속 보아서 알고 있었지만, 진흙이 묻었는데도 버리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이런 상황이니 다잡으려던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디무스가 갑자기 돌변한 것이다.

채 30분을 떼어 놓지 못해서 늘 수하들의 보고도 최대한 간결하게 듣던 남자인데. 갑자기 저를 두고 간다고. 심지어 그 말을 한 직후, 그는 리브를 곁에 끼고 다녔던 게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덩그러니 방치했다.

수도의 일이 그만큼 급하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드디어 그의 관심이 그녀에게서 떠난 걸까?

“언니, 들었어?”

분주하게 움직이는 고용인들을 멍하게 보고 있는데, 코리다가 슬쩍 리브의 곁으로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돌프 아저씨가 그러는데, 우리는 계속 이 저택에서 살아도 된대. 호위와 고용인들도 충분히 두고 갈 거래. 그리고 티에리 선생님도 여기 남을 거라고 하셨어.”

“그렇구나.”

“급한 일 끝나면 다시 와서 공부를 봐줄 테니까, 그때까지 열심히 하고 있으래.”

“그래.”

“근데 저 후작 아저씨는 올지 안 올지 모르겠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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