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쯧.”
리브의 한쪽 다리가 엉망으로 더럽혀진 것을 확인한 디무스가 작게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그는 단지 진흙에 발이 빠진 것일 뿐, 다친 게 아니니 홀로 걸을 수 있다는 리브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기어이 리브를 안아 든 채로 마차에 돌아가자, 동행한 하인이 짐 속에서 수건을 찾아냈다.
“더러우니까 그냥 밖에서 털어 낼게요.”
“굳이?”
리브는 좋은 마차의 내부를 진흙으로 더럽히는 게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 말 역시 가볍게 무시한 디무스가 마차 의자에 리브를 앉혔다. 지척에 두고 보니 다리뿐 아니라, 풀물이 든 치마 밑단에도 진흙이 묻어 있었다.
흙을 털고 닦아 내기 위해 대기하는 하인을 힐끗 확인한 디무스가 정색하며 손을 내밀었다. 눈치 빠른 하인이 냉큼 수건을 건넨 뒤 뒤로 물러났다.
직접 흙을 털어 주겠다는 듯 허리를 굽히는 그의 모습에 리브가 아연실색했다.
“그걸 왜 후작님이….”
리브의 중얼거림을 들은 디무스가 눈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저놈에게 다리를 내보이겠다고?”
“아니요! 시중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예요.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요!”
당연히 이번에도 디무스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진흙이 묻은 자리를 스스럼없이 움켜쥔 디무스가 이리저리 발목을 매만졌다. 그러느라 그의 장갑이 온통 더러워졌다.
“아픈 곳은?”
“없어요. 그보다 후작님, 제가….”
“내가 틈만 나면 그대를 움켜쥐려 안달 난 상태라는 건 알지 않나?”
발목을 놓지 않은 상태에서, 디무스가 힐끗 시선을 들어 리브를 올려다보았다.
“내내 충분히 겪고 있었을 텐데.”
말문이 막힌 듯 디무스를 내려다보던 리브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저와 뒹구는 걸 좋아하신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게 이런 상황에서 나설 까닭이 되시진 않아요. 더러운 걸 싫어하시잖아요.”
“물론 싫어하지.”
무심하게 대꾸한 디무스가 다시 발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그대는 가벼운 염좌 정도는 내게 말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테니까.”
“윽.”
발목의 어느 한 지점을 꾹 누르자, 리브가 작게 신음성을 흘렸다. 그녀 자신도 예상치 못한 통증이었는지, 리브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
“아니, 말하지 않으려던 게 아니라 정말 몰랐어요. 그만큼 별거 아니에요.”
“뭐지?”
리브의 말을 흘려들은 디무스가 기척이 느껴지는 옆을 보았다. 하인이 눈치껏 물을 가득 떠 온 모양이었다. 물그릇을 마차 바닥에 내려놓은 디무스가 수건으로 진흙 뭉텅이를 털어 내며 말했다.
“이 스타킹은 벗는 게 낫겠군.”
“제가 할게요.”
이젠 숫제 애원에 가까웠다. 디무스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리브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리브가 냉큼 마차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디무스와의 거리를 벌렸다.
아마도 홀로 수습하는 동안 디무스가 바깥에서 기다려 줄 것이라고 여긴 듯했다. 디무스는 흔쾌히 마차 문을 닫았다. 다만 바깥에서 기다리는 대신 동석하는 쪽을 선택했을 뿐.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브는 결국 체념한 얼굴로 시선을 거두었다. 커다란 진흙 덩어리를 털고 난 뒤라, 젖은 물수건으로 뒤처리를 하는 게 한결 수월해 보였다.
사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치마가 들썩였다. 리브는 어떻게든 치마를 걷지 않고 스타킹을 벗어 보려 애쓰는 눈치였다. 그러나 곧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는, 한숨을 삼키며 옷자락을 위로 올렸다.
진흙에 더러워진 부분 위로 모습을 드러낸 매끈하게 뻗은 다리는 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위쪽으로 고정된 가터벨트의 클립을 풀고 나니 벗는 건 금방이었다. 더러워진 스타킹을 구석에 던져둔 리브가 잠시 고민하다가, 반대쪽 다리의 스타킹을 더듬었다. 한쪽 스타킹만 착용하고 있느니 둘 다 벗는 게 낫다고 여긴 듯했다.
구석에 바짝 몸을 붙이고 꾸물꾸물 움직이는 게 영 불편해 보였다.
리브가 하는 행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고 있던 디무스가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자신의 더러운 장갑을 인지하고는 멈칫했다.
갑작스러운 디무스의 움직임에 놀란 리브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행동을 멈추었다. 리브의 눈길을 받으며, 디무스는 천천히 자신의 장갑을 벗어 의자의 빈자리 위에 올려 두었다. 리브가 묘한 눈으로 장갑을 보았다.
그러든가 말든가, 이번에야말로 디무스가 젖은 수건을 손에 들었다. 그러곤 다른 손으로 드러난 맨발을 잡더니, 리브가 미처 다 확인하지 못한 복숭아뼈와 뒤꿈치 쪽의 얼룩을 느릿하게 닦아 냈다.
차가운 물기가 맨살에 직접 닿는 순간, 리브가 작게 몸을 떨었다. 다만 아까처럼 그의 행동을 만류하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말려 봐야 소용없다는 걸 뒤늦게나마 알았는지도 몰랐다.
“구두 굽이 뒤틀렸군. 더 신고 다니면 완전히 부러질 거야. 오늘 산책은 포기하게.”
티끌만 한 흙 알갱이까지 꼼꼼하게 닦아 낸 디무스가 더러워진 수건과 물그릇을 문가 쪽으로 밀어냈다.
리브는 그때까지도 맨다리를 맡긴 채 디무스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젠 깨끗해진 리브의 발목과 정강이 부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듯 문지르던 디무스가 이내 손을 놓았다. 그는 위로 들쳐져 있던 리브의 치마를 직접 내려서 맨다리를 가린 뒤에야 마차 문을 반쯤 열고 물그릇과 수건을 하인에게 넘겼다.
“다시 오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데려와 줄 테니까.”
혹시 실망했나 싶어서, 디무스가 넌지시 말을 덧붙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뭐가 웃기지?”
리브의 얼굴을 본 디무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희미하긴 해도, 리브의 입가에는 틀림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단순히 기뻐서 짓는 미소 같진 않았지만, 아무튼 미소는 미소였다.
디무스의 물음에 리브가 손끝으로 제 입가를 매만졌다. 자신도 웃고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내 행동이 우스웠나?”
“아니요, 후작님을 비웃은 건 아니에요. 그보다는….”
빠르게 디무스의 말을 부정한 리브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생각에 잠긴 녹색 눈동자가 허공을 부유했다.
“제 자신이 우습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것 같아요.”
그 음성은 씁쓸하고 자조적이었다. 자책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진흙에 발이 빠진 게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네.”
“처음은 실수죠.”
“음?”
“하지만 두 번이나 똑같은 진창을 밟으면, 그건 실수가 아니잖아요.”
그녀답지 않게 비틀린 조소가 뒤섞였다.
“멍청한 거지.”
리브는 명백하게 스스로를 비웃고 있었다. 단순히 진흙을 밟은 일로 저렇게 울적해진 게 아니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디무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조금 전의 상황이 싫었던 걸까?
가능성 있는 추측이 떠오르자 디무스의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호시탐탐 틈을 엿보며 디무스에게 부에르노로 떠나라는 소리나 해 대는 여자였다. 그녀의 태도가 돌변했음을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고 있는 디무스로서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싫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디무스는 조금 전과 같은 선택을 할 터였다.
“그럼 그냥 멍청하게 진창이나 밟으며 다니면 되겠군.”
무뚝뚝한 디무스의 말에 리브의 초점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앞으로도 진흙은 내가 털어 줄 테니.”
리브가 눈을 크게 떴다. 일자로 다문 입술은 무엇을 억누르고 있는지 핏기가 사라질 정도로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디무스를 보던 리브가 발치로 시선을 옮겼다.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요.”
결국 그들은 간식 바구니를 열어 보지도 못하고 짧은 외출을 마쳤다.
***
“직접 증언하라….”
말테 공작 영애를 재판장에 세워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고 싶거든, 직접 와서 모욕받았음을 증언하라는 소환장이 도착했다.
디무스의 손끝이 책장 위를 툭툭 내리쳤다. 자존심 강한 루지아가 아무래도 혼자 모욕을 뒤집어쓰지는 않겠다고 이를 갈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판장에 얼굴 한번 내비치는 것이야, 번거롭기는 해도 어려울 건 없는 일이었다. 루지아와 달리, 디무스는 체면을 따지며 사는 우아한 인사를 못 되니까.
다만 지금은 상황이 좀 특수했다. 그는 여전히 리브를 두고 애들린데를 떠날 생각이 없으니까.
“참석하지 않으면?”
“찰스만으로는 말테 공작 영애를 끌어내지 못할 겁니다.”
“말테에 압력을 넣어도?”
아돌프는 대답 대신 편지 한 통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칼리오페 추기경께서 보내셨습니다.”
굳이 내용을 확인하지 않아도, 디무스는 추기경이 어떤 목적으로 편지를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라티아 선발을 코앞에 둔 칼리오페 추기경으로서는 할 말이 딱 하나일 테니.
“할 만큼 했으니 적당히 물러나라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