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지금 디무스의 얼굴을 보면, 하녀가 저렇게 무서워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여전히 밤잠을 제대로 자지 않는 통에, 디무스는 ‘예쁘장’하면서도 ‘창백’하고 ‘사나워’ 보인다는 수식어를 전부 매달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넋을 놓게 했다면, 지금은 예쁜데 좀… 유령처럼 섬뜩하달까.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아돌프의 인사말을 들으며 리브는 생각했다. 참 이상한 일상이라고.
이건 도대체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이도 저도 아니었다. 마무리되지 않은 문제를 눈에 안 보이도록 어영부영 덮어 두고 평화를 가장한 채 시간을 낭비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또, 굳이 문제점을 끄집어내어 이 기묘한 일상을 무너뜨리는 게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변으로 가는 내내 리브는 창밖을 응시하며 침묵했다. 디무스는 언제나처럼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한 리브가 창밖에 눈길을 둔 채 말문을 열었다.
“가는 길에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세요.”
“됐네.”
“괜찮다는 말을 하려거든, 괜찮은 얼굴로 해야 한다셨죠.”
리브의 지적에 디무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리브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의사가 역력하게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리브는 그런 디무스를 힐끗 보았다가 다시 창밖을 돌아보았다.
“누가 봐도 후작님의 건강은 아주 안 좋아 보이세요.”
“나를 떼어 놓고 다니고 싶어서 하는 말이라면.”
“그런 기대는 진즉 버렸어요.”
“그런 기대를 하긴 했다는 소리군.”
리브가 말문을 잃었다. 정곡을 찔린 듯 입을 다무는 그녀의 모습에 디무스가 조소를 흘렸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더 비아냥거리진 않았다. 다만 다시금 리브를 조용히 바라보기나 할 뿐.
잠시 뒤,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기 시작한 적막을 다시금 깨뜨린 건 이번에도 리브였다.
“지금 후작님이 얼마나 이상한지 아세요?”
그 물음에는 미미한 짜증이 묻어났다. 무엇으로 인한 짜증인지는 리브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확실한 건 언제까지고 이런 기이한 생활을 지속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리브야 솔직히 이런 생활이 길어져서 나쁠 게 무엇이 있겠느냐만, 저 남자는 아니었다.
곁에 있다 보니 수척한 얼굴의 디무스가 지금 얼마나 지독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돌프가 가끔 참다못해 하소연하는 말을 통해 추측하자면, 보좌관 찰스가 일을 대행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모양이었다.
만약 그가 이곳에 계속 남아 있는 게 정말 자신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그가 저를 부에르노로 끌고 가겠다고 선언하지 않는 게 이해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재회 직후야 눈이 돌아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치더라도, 이젠 시일이 충분히 지나서 이성을 되찾은 상태가 아닌가.
“언젠가 그대가 그랬지.”
복잡한 상념에 사로잡혀 바깥 풍경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던 리브가 반사적으로 디무스를 돌아보았다.
“부러진 장미 가지는 결국 시든다고.”
리브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당시의 대화를 떠올렸다는 걸 알아챈 디무스가 삐뚜름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 말이 맞아.”
“…무슨 의미세요?”
“그대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소리네.”
“제가 했던 말은….”
당시 리브가 했던 그 말은 ‘내가 당신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로운 선언이었다. 내가 상처 입을 것을 감수하고 손을 뻗으면 당신 역시 온전하지만은 않으리라는 그런 치기 어린 도전장.
그래서 리브는 그가 정말 제 말을 이해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병에 꽂아 두라는 당부라도 할 걸 그랬지.”
영문 모를 소리를 끝으로 디무스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번에는 그가 창밖을 바라보고, 리브가 그를 바라보는 상황이 되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던 리브가 억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용기를 남발하는 건 만용이라고 하셨어요.”
한때, 리브가 디무스를 궁금해하고, 그와 닿고 싶어 하고, 그에 대해 알고 싶어 할 때.
가당찮은 바람이라며 선을 그은 건 다름 아닌 저 남자였다.
“제가 장미를 욕심냈을 때,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저를 돌아보는 디무스의 새파란 눈을 마주하자, 감각은 순식간에 과거의 일화들을 되살려 냈다.
그가 그녀에게 건넸던 무신경한 말들, 허락되지 않았던 간격, 홀로 전전긍긍해야 했던 모든 순간.
“그런데 이제 와서 왜 그런 소리를 하세요?”
어쩔 수 없이 억울한 마음이 일었다. 덕분에 리브의 목소리는 무척 뾰족했다. 그러나 도리어 디무스의 눈매는 조금 느슨하게 풀렸다.
“차라리 낫군.”
“뭐가요?”
“무시보다는 원망이 나아.”
리브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입을 벌렸다. 디무스는 그런 그녀를 향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지적하지 않아도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네. 누구보다 확실하게….”
말끝을 늘어뜨리던 디무스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푸른 눈동자가 리브를 비스듬히 외면했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중이야.”
그 말을 끝으로, 디무스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리브 또한 마찬가지였다.
***
필립의 추천대로 강변은 무척 아름다웠다.
주변이 이름 모를 노란색 꽃으로 가득 뒤덮인 것만으로도 예뻤는데, 수면 위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 덕분에 잔물결이 환상적으로 반짝이기까지 해 아주 장관이었다.
마차에서 나눈 대화로 인해 잔뜩 가라앉아 있던 리브도 자연의 찬란함 앞에서는 눈길을 빼앗겼다.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던 리브가 홀린 듯 꽃밭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디무스는 그 모든 풍경 속에 선 리브를 바라보았다.
요즘의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저택 곳곳에서 일상을 지내는, 그리고 온갖 아름다운 장소를 거니는 리브를 지켜보며 조용히 자신의 패배를 곱씹었다.
“인정하기 힘들어도 받아들여야만 수습되는 문제가 있다는 걸, 주인님께서는 이미 아십니다.”
살면서 디무스가 가장 크게 느꼈던 패배감은, 머저리 취급하던 스테판에게 뒤통수를 맞았을 때였다. 그때의 패배는 치욕스러운 굴욕감과 분노를 일으켰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해서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패배는 어떠한가. 얼마든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여자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휘둘리게 되어 버린 지금.
자신이 이긴 줄도 모르는 게 분명한 저 여자를 보며, 디무스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패배였다.
애초에 대등하게 겨룬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오히려 일방적인 관계라고 여겼으니까. 그래서 방심했고, 전혀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들린데의 저택에 머무르며, 디무스는 리브를 처음 알게 되었던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하나 되짚어 나갔다. 형편없는 누드화에 눈길을 사로잡힌 순간부터, 기어이 그 속의 모델을 제 앞에 앉혀 두기까지.
당시 그는 일련의 과정이 자신의 손안에 있다고 믿었다. 리브는 그가 예상한 대로 움직였고, 짐작했던 것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게 아닐까?
그건 생각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하는 가정이었다. 그럼에도 이 순간, 디무스가 느끼는 패배감은 자신만만했던 과거를 거듭 의심하게 했다. 아니면 최소한 어느 지점에서라도, 무언가 잘못된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맞이한 게 아니겠는가.
“로이데스 양을 어느 위치에 세울 것인지는 주인님의 선택이십니다. 다만… 이 늙은이의 인생 경험으로 비추어 보자면, 드물게도 이미 결론이 정해진 경우가 있더군요.”
결론이 정해진 경우.
어쩌면 이 관계에서 그의 패배는 정해진 결론이 아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는 찰나, 꽃에 둘러싸여 있던 리브의 몸이 휘청거리는 게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녀를 보고 있던 디무스가 당장 달려갔다.
“앗!”
중심을 잃고 기우는 팔을 단숨에 잡아챈 디무스가 리브의 발치를 확인했다.
강가와 가깝다 싶더니만, 바닥이 질척거렸다. 아무래도 물렁물렁한 진흙에 다리가 빠진 모양이었다. 얼핏 보아도 리브의 한쪽 정강이가 꽤 깊이 박혀 있었다.
디무스 덕분에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겨우 모면한 리브가 난처한 얼굴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애초에 서 있는 땅이 단단하지 않아서 스스로 다리를 빼내기 쉽지 않아 보였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디무스가 허리를 굽혀 리브의 등과 오금을 지지해서 그녀를 훌쩍 안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