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외출하겠다는 의사를 전하자, 별채에서 고용인들이 달려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뜻밖의 얼굴도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이데스 양.”
“필몬드 씨.”
“집사 된 도리로 저택을 지키는 게 마땅하나, 주인님께서 통 소식이 없으시니 거주지를 옮기려는 작정이신가 싶어 확인차 왔습니다.”
필립은 여전히 인자한 얼굴이었다. 마치 리브가 도망갔다는 건 전혀 몰랐다는 듯 일상적이고 태연한 태도였다.
“그나저나 외출하신다고요? 그렇다면 당연히 간식을 준비해야지요!”
“아니요, 그렇게까지는….”
“주인님, 뭘 준비할까요?”
다급히 손사래 치는 리브를 못 본 것인지, 필립이 디무스에게 대뜸 질문했다. 다소 요란스러운 필립의 행동을 떨떠름하게 보고 있던 디무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적당히 알아서 해.”
그러나 안타깝게도, 디무스의 대답은 필립의 성에 차지 않은 듯했다.
“주인님.”
심각한 표정으로 돌변한 필립이 무척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로이데스 양이 좋아하는 간식은 ‘적당히 알아서 준비한 간식’입니까?”
“뭐?”
“제가 주인님의 취향은 알고 있는데 로이데스 양의 취향은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해서 주인님께 여쭤본 것입니다.”
곁에서 필립의 말을 듣고 있던 리브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런 거라면 제게….”
당사자에게 묻는 게 더 빠르지 않겠는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로지 필립만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는 빙그레 웃는 낯 그대로 리브를 돌아보며 설명했다.
“아돌프에게 들었습니다. 주인님께서 통 바깥 걸음도 안 하고 로이데스 양의 곁을 지키셨다면서요. 그렇다면 응당 로이데스 양의 취향도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로이데스 양은 걱정하지 마시고 외출 준비를 하시죠. 하녀들이 도울 겁니다.”
필립의 눈짓에 그가 데려온 고용인들이 재빨리 리브에게 다가왔다. 도대체 언제 다 준비한 건지, 그들의 손에는 외출복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품들이 한 아름 들려 있었다.
얼떨결에 고용인들에게 휩쓸린 리브가 안쪽으로 떠밀려 사라졌다. 리브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미소를 유지하고 있던 필립은,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디무스를 돌아보았다. 디무스를 마주한 필립의 얼굴에 미소는 사라진 뒤였다.
주인을 앞에 두고도 월권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필립의 모습에 디무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도대체 뭘 하자는….”
“주인님….”
필립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말을 고르느라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진심으로, 주인님께서 본래의 강건한 모습을 되찾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로이데스 양에게는 미안하지만 제게는 주인님이 더 중요한 분이시니까요.”
많은 설명이 생략된 말이었다. 당장이라도 신경질을 낼 것 같은 얼굴로 선 디무스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필립은 디무스의 충복이었다. 디무스를 잘 파악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고.
구구절절 길게 잔소리하는 것보다는 넌지시 핵심을 짚어 주는 게 훨씬 상황을 빠르게 호전시킬 방법이라는 걸 필립은 진즉 알고 있었다.
“간식은 제가 알아서 준비하겠습니다.”
침묵하던 디무스가 불쑥 말문을 열었다.
“필립.”
“네.”
“…상황이 녹록지 않아.”
뜸을 들이다가 나온 말은 그답지 않게 기력이 없었다.
그 목소리만 들어서는 대패 후 병사를 모두 잃은 채 후방 기지까지 간신히 도망쳐 온 지휘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 사면초가 속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해 그저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 말이다.
어딘가 막막하게 보이는 디무스를 보며 곰곰이 생각하던 필립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입을 뗐다.
“주인님께서는 이제껏 누군가를 섬기시거나, 혹은 섬김을 받아 오셨습니다.”
필립은 알았다. 디무스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도식을 가졌는지.
그는 디무스의 사관 학교 재학 시절 고용된 사람이었다. 디무스가 사관 학교 재학생으로서 최소한의 체면을 갖추기 위해 들였던 첫 번째 고용인.
사정이 그러하니 인연의 햇수를 따지자면 까마득히 긴 게 당연했다. 디무스의 오랜 수하 중에서도 단연 손가락에 꼽힐 정도라, 그가 무언가 말을 하면 디무스도 아예 흘려듣진 않았다.
심지어 필립이 이따금 건네오는 조언은 지나고 보면 제법 합당하기까지 했다.
“로이데스 양을 어느 위치에 세울 것인지는 주인님의 선택이십니다. 다만… 이 늙은이의 인생 경험으로 비추어 보자면, 드물게도 이미 결론이 정해진 경우가 있더군요.”
그러니 아마도 지금의 이 말 역시 그러하리라.
“인정하기 힘들어도 받아들여야만 수습되는 문제가 있다는 걸, 주인님께서는 이미 아십니다.”
디무스는 이제 마냥 표정을 구기지 않았다. 필립은 그런 디무스를 살피다가, 빙긋 웃으며 말을 맺었다.
“둘러보기 좋은 장소를 더 조사해 두라고 전하겠습니다. 새로운 장소란 생각의 전환에도 유용한 작용을 하는 법이지요.”
***
애들린데에서의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정확히는 필립이 나타나고 난 뒤인 것 같다. 디무스의 흉흉한 기세에 떠밀려 본채에는 들어오지도 못했던 고용인들이 이젠 필립을 앞세워 본채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몇몇은 필립의 명령에 따라 아예 상주하는 듯했다.
단 두 사람만 머무느라 한기가 풀풀 날리던 저택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디무스는 여전히 리브를 제 시야 안에 두려 했으나, 감금되어서 온종일 감시당한다는 느낌은 제법 완화되었다. 분위기를 유하게 바꾸는 데에는 필립의 넉살 좋은 웃음소리도 한몫했다.
필립이 무슨 말로 디무스를 설득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저택에는 코리다도 편히 드나들었다. 코리다는 요즘 애들린데 여학교의 입학시험을 준비한다며 분주했다. 1년에 두 번 열리는 시험 중 상반기 시험은 기한이 너무 촉박해 하반기를 준비하려는 눈치였다.
“…정말 언니가 안 봐줘도 돼?”
“어휴, 언니. 언니보다 아돌프 아저씨가 훨씬 더 잘 아시더라.”
코리다의 타박에 리브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한 아름의 책을 들고 들어오던 아돌프가 리브를 발견하고는 멋쩍게 멈춰 섰다.
그는 자신이 했던 거짓말을 들켰다는 걸 알게 된 뒤로, 리브를 편히 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코리다와는 여전히 화기애애한 게 신기했다.
아돌프가 코리다를 먼 마주르칸까지 보내 버리려 한 건 맞지만… 도움을 주려던 마음이 진심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리브는 최근 들어서 하게 되었다.
선뜻 책상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아돌프를 물끄러미 보던 리브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코리다의 공부를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아, 저도 괜히 쓸데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야 이렇게 보내는 게 낫습니다.”
아돌프는 부에르노로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이젠 버린 눈치였다. 어차피 뭣도 없이 애들린데까지 온 그가 이곳에서 본인의 업무를 수행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던 와중이었다.
오히려 코리다의 공부를 봐주며 지루하지 않은 일과를 보내게 되었노라 말하는 아돌프의 얼굴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로이데스 양이 후작님을 모시고 다녀 주시는 덕분에 그나마 숨통이 좀 트입니다.”
아돌프가 감사하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감사 인사를 들은 리브는 도리어 모호한 얼굴로 미소를 지웠다.
‘모시고 다닌다’라고 하기보다는, ‘매달고 다닌다’라고 하는 게 훨씬 정확할 텐데.
본채에는 사람이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정작 리브는 매일 외출을 시작했다. 필립이 애들린데의 관광지를 전부 정리해 아예 목록을 뽑아 왔기 때문이다. 단지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을 뿐인데, 정신 차리니 애들린데 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디무스는 당연하다는 듯 그 투어에 동행했다. 졸졸 쫓아다니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비아냥대는 건 아닐까 했는데, 그런 일도 없었다.
물론 이따금 예민한 얼굴로 한 번씩 성질을 못 참을 때는 있었다. 그러나 빈도를 따지자면 아주 현저히 줄어들었고, 대신 리브를 조용히 바라보는 시간이 늘었다.
얼핏 보아서는 나체로 그의 눈길을 받았던 추가 근무 시절과도 비슷했다. 하지만 리브는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 경우라는 걸 알았다.
“오늘은 어딜 가십니까?”
“요즘 강변에 꽃이 한창 필 시기래요.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꼭 가야 한다고, 필몬드 씨가 신신당부하시더라고요.”
대답하기 무섭게 바깥에서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무스는 문가에서 리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 선 불쌍한 하녀는 연신 디무스의 눈치를 보며 리브가 빨리 나와 주길 바라는 얼굴이었다.
리브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게 변한 것과 별개로, 그 외 모든 사람에게는 디무스가 변함없이 신경질적이고 냉소적인 까닭이었다. 오히려 고용인들의 반응을 보면 근래의 디무스를 더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은 표정으로 애처롭게 자신을 찾는 하녀의 목소리에, 리브가 한숨을 되삼키며 서재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