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툭하면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그때는 궁금했으니까요.”
“이제는 궁금하지 않다고?”
“네.”
“내가 욕심난다며.”
의도한 건 아니지만, 마치 따지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 갔다. 리브는 디무스의 추궁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면서도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는 듯 디무스의 눈을 피했다. 그에게 겁을 먹어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 대화를 귀찮아하는 기색이 더 강했다.
리브는 이제 더는 디무스를 욕심내지 않고 있었다. 탐스러운 장미를 보며 애타게 발을 구르지도, 상처를 감수하며 손을 뻗지도 않는다.
그것을 깨닫게 되자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너는 어떻게 너의 신을 버릴 수 있지?”
리브가 손으로 눈가를 꾹 문질렀다. 그 행동은 마치, 성가신 대화로 피곤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어느 날, 교류에 관해 이야기하던 그녀에게 애석함으로 답하던 디무스 본인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저에게 필요한 건 신이 아니었나 보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꾸한 리브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후작님께서는 제 신이 되실 필요가 없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너는 나를 쏘지 못하지 않았느냐고. 너에게 내가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 아니냐고.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도망친 거 아니냐고. 그런데 어떻게 한순간에 돌변해서 무관심해질 수 있느냐고.
그냥 충동적인 말인 게 틀림없다고, 그렇지 않냐고.
입술을 조금만 떼어도 두서없는 채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그래서 디무스는 한마디도 뱉을 수 없었다.
디무스가 입을 다물자 리브는 그를 어르듯 다시금 확언했다.
“말씀하신 내용도 궁금하지 않아요. 주제넘게 굴지 않을 테니까 괜히 떠보지 않으셔도 돼요.”
디무스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도저히 더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했다.
리브가 카밀을 동정할까 봐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디무스는 깨달았다.
자신이야말로, 그녀의 동정이라도 끌어내야 할 처지였다.
***
궁금한 게 없다고 호기롭게 말하기야 했으나, 그게 사실은 아니었다.
리브는 이미 카밀을 통해서 디무스가 칼리오페 추기경과 어떠한 연관이 있음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미 들은 이름을 기억 속에서 지울 수도 없으니, 자연스레 머릿속으로는 그럴듯한 소설을 한 권 써 내려갔다.
말테나 엘레오노르를 대놓고 적대하는 디무스의 상황 또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대귀족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상대하는데 그 사건의 발단이 바로 리브 본인이었다.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분쟁에 완전히 무관한 처지도 아니니만큼, 돌아가는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아는 게 맞을 거라는 의무감도 들었다.
디무스가 저로 인해 무리한 싸움을 벌인 건 아닌지 아주 조금은… 걱정스러웠고.
‘감당하지 못할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리브는 디무스를 향한 자신의 걱정이 미련하고 멍청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재회 후 디무스가 그녀에게 보인 모습들이 워낙 의외의 것들이어서 그런지, 마냥 마음이 놓이지도 않았다.
당장 저 남자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질 않나.
디무스는 늘 평소와 같은 태도를 유지하려 하지만 핏기없이 창백하고 거칠어진 안색을 전부 숨기진 못했다. 저런 꼴의 남자가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긴 어려웠다.
리브가 도망치는 바람에, 홧김에 대책 없이 말테와 엘레오노르를 건드린 거라면 어쩐단 말인가. 딱히 디무스를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이 사건의 발단이자 시작점이니까….
불쑥불쑥 드는 걱정을 애써 합리화하던 리브는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헛똑똑이 같으니.’
사람이 조금 수척해 보인다고, 금세 마음이 약해져선. 자신이 어디 디무스를 걱정해 줄 처지인가. 얼마 전까진 그에게서 도망가기만도 바빴던 몸인데.
‘…하지만 저 남자가 지금 정상은 아니잖아?’
디무스와 달리 리브는 인간적인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병약한 여동생을 오랫동안 돌봐 온 까닭에, 아픈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저렇게 누가 봐도 쇠약해진 얼굴로 시야를 맴도는 남자에게 아주 조금은 관심이 가는 게 당연하지 않나.
제 감정을 떠나서,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말이다.
이성적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거기까지 생각하던 리브는 이를 악물며 마른세수를 했다. 눈앞에 두었다고 또 금세 물러진다. 조금만 방심하면 마음의 추가 순식간에 기울었다.
이래서 도망친 건데.
‘이러다가 또 똑같은 꼴이 될 게 뻔한데.’
리브의 마음은 이토록 하루에도 수십 번 오락가락했다.
그런 와중, 디무스는 리브의 물음에 무엇이든 대답해 줄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더 묻지 않는다며 따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리브는 관심이 없는 척, 대화를 중단해 버렸다. 괜히 물었다가 주제넘은 질문이라며 또 타박을 들을까 봐 지레 두려운 마음이 반, 굳이 캐물을 정도로 아쉬운 태도를 보이진 않겠다는 심술 반이었다.
대신 그녀는 서재를 찾았다. 서재는 디무스의 수하들이 매일 새롭게 발행된 신문들을 모아 가져다 두는 장소였으므로.
신문의 1면만 대충 훑어보아도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말테와 엘레오노르라면 당연히 신문 1면을 차지하는 이름들이니까 말이다.
“엘레오노르의 애송이 새끼가 그렇게 걱정되나?”
리브가 신문을 살핀다는 걸 알아챈 디무스는 그녀의 의도를 이상한 쪽으로 해석했다. 딱히 고쳐 줄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 오해였다.
대수롭지 않게 디무스의 시비를 무시한 리브가 오늘 날짜가 찍힌 따끈따끈한 신문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말테와 엘레오노르에 관한 새로운 내용이 없었다. 대신 보이는 건 칼리오페 추기경의 이름이었다.
중간에 약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마지막 순례 일정까지 무사히 마치고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로 길게 이어진 건, 곧 있을 그라티아 선출에 관한 설명이었다. 굳이 칼리오페 추기경의 순례와 그라티아 선출 소식을 연달아 적은 의도야 명백할 것이다.
뒤로 무엇이 얽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라티아 후보인 칼리오페 추기경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확실하게 읽혔다. 칼리오페 추기경의 위세가 대단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디무스와는 무슨 관계인 걸까?
“그 애송이는 그대가 동정해 줘야 할 정도로 불쌍한 놈이 아니야.”
리브가 무시하든 말든 디무스의 심술궂은 말이 이어졌다.
“가문의 돈을 써 대며 유유자적하게 떠도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여긴 서재예요. 독서라도 하시는 게 어떠세요?”
리브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차라리 책이나 읽으라는 말을 사근사근 포장해서 하자 디무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보고 싶은 게 있으면 알아서 보겠네.”
“그러세요, 그럼.”
신문을 덮어 내려놓은 리브가 몸을 돌렸다. 서재를 나가려는 그녀의 기색에 디무스가 당장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가는데?”
“독서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저는 비켜 드리려고요. 당연히 저택 밖으로 안 나갈 생각이고요.”
서재 밖으로 한 걸음 내디딘 리브가 뒤를 돌아보았다. 디무스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뒤를 따라 나오고 있었다.
리브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디무스가 떨떠름하게 침묵했다. 그러다가 냉담한 어조로 툭 뱉었다.
“지금은 독서를 할 생각 없어.”
언제나처럼 오만하고 차가운 얼굴이라지만 변명이 궁색해서 별로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뒤늦게 어미를 각인한 새끼 오리도 이렇게 집요하진 않을 것이다.
이게 전부 그녀를 감시하려는 의도인지, 슬슬 헷갈릴 지경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언제는 그러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군.”
얼핏 듣기에는 건방지다며 나무라는 듯했으나, 실은 그저 투덜거림에 가까운 대꾸였다. 아마 옛날이라면 그가 저를 타박한다고 받아들였으리라. 그에게 더는 잘 보이려 노력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자 그의 감정을 더 잘 알아채게 된 게 좀 신기하긴 했다.
“전 이제 슬슬 답답해요.”
제 감흥을 뒤로 미룬 리브가 무신경한 음성으로 말했다.
“후작님도 그러지 않으신가요? 이 저택 내에서 하는 거라곤, 온종일 저를 감시하는 일뿐이시잖아요.”
“그대가 도망갈 마음을 버리면 돼.”
“제가 도망가지 않는다고 하면, 믿으실 건가요?”
디무스는 빈말이라도 믿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디무스의 얼굴을 확인한 리브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다못해 정원이라도 걷고 싶어요.”
“정원은….”
“그것도 안 되나요?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디무스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리브는 그 속에 미세하게 떠오른 곤혹스러움을 알아챘다. 리브를 응시하던 그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게 마치 허를 찔려 당황한 사람의 표정 관리처럼 느껴졌다.
“정원은 따로 관리하지 않아서 어차피 볼 게 없을 텐데.”
리브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가늘게 뜬 눈으로 디무스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잠깐 사이에 그녀가 발견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금세 냉담한 디트리언 후작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위압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평소와 같은 견고함이라 위화감이 들었다.
설마하니 저 대단하신 디트리언 후작님께서 정돈되지 않은 정원을 보여 주는 걸 부끄럽게 여길 리는 없는데.
“그럼 볼 게 있는 곳에 데려가 주세요.”
리브가 충동적으로 말을 뱉자 디무스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
“데려가 달라고?”
“저 혼자서는 못 가게 하실 거잖아요.”
단순히 나가고 싶다고 말할 때와 반응이 조금 달랐다. 은연중에 몇 번이나 그의 반응을 면밀하게 관찰해 온 리브는 딱딱한 디무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스친 변화를 쉽게 알아챘다.
너무 쉬워서 자신이 무언가 착각을 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는….
“…준비해 두라고 하지.”
그는 조금, 기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