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재우고 뭘 하려고?”
이미 이와 비슷한 소리를 수백 번도 더 들었던 리브는 이제 코웃음을 치며 맞받아쳤다.
“절 묶어 놓지 않으신 게 신기할 지경이네요.”
“한 번 더 도망가면 체험할 수 있을 걸세.”
“그런 취향은 아니라서요.”
정말로 싫다는 듯 잔뜩 인상을 구긴 채 고개를 내젓던 리브가 문득 쓰게 웃었다.
“하기야, 어차피 저택 밖을 나가지도 못하고 있으니 묶어 놓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으시죠.”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디무스는 이제 리브가 그에게 등을 돌리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자신을 떠나려는 것으로 느껴지니까.
하물며 저택 바깥으로 그녀를 내보내는 상상은, 하는 것만으로도 신경질이 났다. 리브가 온갖 재주를 동원해서 도망가면 당연히 도로 잡아 오겠지만, 그녀를 다시 찾기까지의 과정을 견디기 싫었다.
이게 무슨 짓인지. 스스로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얼마나 미련하고 비효율적인 생활인지 머리로 알고 있음에도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았다.
“정 의심스러우시면 약을 먹기 전에 저를 묶어 두시든가요.”
“그런 취향은 아니라며.”
“이렇게 지내다 후작님이 쓰러지시면, 곁에 있던 제가 무슨 소리를 들을지 두려워서 그래요.”
“책임을 물을 놈은 없어.”
정말 디무스가 이 저택에서 쓰러진다고 해도 외부에 그 사실이 알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근처에 대기 중인 티에리가 늦지 않게 적절히 조치할 테니 큰 문제로 번질 일도 없었다.
설사 수하 중 누군가 리브에게 불만을 품는다 한들 실질적인 책임을 묻진 않으리라.
“그대를 건드린 것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았을 텐데, 누가 감히 또 그런 짓을 하겠나.”
디무스의 수하들은 그의 분노를 지척에서 본 자들이었다. 당연히 리브를 책망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도 진즉 인지했겠지.
디무스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약병을 들어, 주변에 아무 서랍이나 열어 대충 던져 넣었다.
“어떻게 되었나요?”
서랍을 닫던 디무스의 손길이 멈칫했다. 리브는 덤덤한 얼굴로 디무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는 도망치느라 부에르노의 사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전혀 몰라서요.”
잠시 주춤거렸던 손을 다시 움직여서 서랍을 완전히 닫았다. 그런 뒤, 고저 없는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미완성 누드화를 빼돌리라고 명령한 게 말테 공작 영애라는 걸 알아냈지. 그래서 그녀를 법정에 세웠고.”
타국인인 루지아를 베렌의 재판소에 끌고 간 것만으로도 말테에겐 굴욕이었다. 조용히 사태를 수습하려 했던 말테는 이제 어떻게든 재판장을 자국으로 옮기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재판장의 위치가 바뀌면 자기들이 더 유리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어리석은 그들의 발버둥을 떠올리며 비웃음을 흘리는 디무스의 귓가로 리브의 당혹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분이 왜….”
“내가 그 여자의 청혼을 걷어찼거든.”
리브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혹시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놀라움 속에 다른 감정이 있진 않을까 면밀하게 살폈으나, 딱히 그 외에 무언가 엿보이진 않았다.
딱히 특정한 반응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지만 괜스레 실망감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실망감을 뒤로한 채, 디무스가 설명을 이어 갔다.
“흉측한 그림을 그린 화가는 재판장에서 사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증언해야 하니까, 죽이지는 않고 손목을 잘랐고.”
화가의 손목을 잘랐으니, 사실상 간접적으로 인생을 끝장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뒤를 봐주기로 한 말테 공작 영애는 제 앞가림을 하기만도 바빠서 한낱 화가의 처지를 살펴 주지 않을 테고, 화가는 어쩌면 재판이 끝난 뒤 분풀이 대상으로 찍혀 살해당할지도 몰랐다.
“말테 공작 영애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던 수하들은 땅에 묻은 지 오래인데, 아마 추모를 하러 가는 사람은 평생 없을 것 같군.”
누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를 텐데 추모객 같은 게 있을 리가. 아마 영영 실종자로 남을 터였다.
“헛소문을 믿고 가볍게 입을 놀리던 피라미들에 관해서도 궁금한가?”
루지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소문을 양성하는 데에 일조한 자질구레한 피라미들까지 언급해 주어야 하나.
디무스가 보고서 내용을 떠올리며 고민하는데, 리브가 불쑥 질문했다.
“마르셀 선생님은요?”
의도적으로 카밀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던 디무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엘레오노르 본가로 끌려갔다는 내용이었지.”
굳이 카밀을 언급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언급해야 한다면, 리브에게 다시는 그와 만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전달하는 게 좋을 성싶었다.
물론 디무스는 리브가 카밀에게 어떠한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단 리브가 카밀의 사심을 눈치채고 이용했다고 보는 게 더 옳을 것이다.
문제는 그 지점이었다. ‘리브가 카밀의 사심을 알고, 그걸 이용했다’는 지점.
리브의 성격이라면 그 사실만으로도 카밀에게 미안함을 느낄 테니까.
“그놈이 걱정돼?”
“그분은 제 부탁을 들어주신 것뿐이니까요. 저 때문에 휘말리신 꼴이니 걱정될 수밖에요.”
아니나 다를까. 리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꼴을 보니 저절로 배알이 뒤틀렸다. 당연히 디무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곱지 않았다.
“부탁을 들어주긴. 상황이 잠잠해진 뒤 큰 대가를 요구하려 들었을 게 뻔한 것을.”
카밀은 리브가 부에르노를 떠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했다. 또한 모든 소란이 잦아든 뒤, 떠난 리브의 행적을 추적해 쫓아갈 능력도 있는 놈이다.
그러니 디무스는 마음 같아선 그놈의 피를 보고 싶었다. 하다못해 루지아처럼 재판장에 세우려 마음먹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소거리는 넘쳐났다. 그가 디무스의 사람이라고 알려진 리브에게 접근하기 위해 노력한 정황도 명확했고, 디무스의 뒤를 몰래 조사하고 다닌 것 또한 사실이니까. 엘레오노르가 별말 없이 곧장 카밀을 데리고 가 버린 것 역시 그 때문이리라.
“제가 아니었으면 이 일에 휘말릴 일이 없으셨을 거예요. 제 도망을 돕지 않으셨으면 추문에 엮이지도 않으셨을 거고.”
디무스가 카밀에 대한 억하심정이 넘쳐나는 와중에도 그를 곱게 본가로 돌려보낸 건,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카밀이 눈에 띄게 가혹한 보복을 당하면 리브는 그게 제 탓이라고 자책할 게 뻔해서.
디무스는 카밀이 리브의 동정을 사는 것조차 마뜩잖았다. 그냥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나 이름조차 잊어버리길 바랐다.
“그놈 추문은 걱정스러우면서….”
네가 도망간 뒤에 내가 들었을 추문은 걱정되지도 않아? 그래서 묻지도 않는 건가?
꼴사나운 물음이라는 걸 자각한 디무스가 가까스로 말을 멈추었다. 그보다 문득, 무심코 넘어갈 뻔한 의문 하나가 불쑥 들었다.
부에르노의 소식을 전혀 모른다더니, 카밀의 추문은 어떻게 아는데?
당연히 카밀에게 어떠한 감정도 없을 거라고 단정했던 게 순식간에 무색해졌다. 설마 그 사소한 도움을 받고 무슨 감정이라도 생긴 건가?
한 톨의 의혹이 슬금슬금 뿌리를 내렸다. 그러고 보니 재회한 리브가 특정인의 근황을 물은 건 카밀이 처음이었다.
설마 제 추격을 따돌린 뒤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든가….
카밀과 리브가 따로 사적인 연락을 주고받은 정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디무스의 억측은 한계를 모르고 뻗어 나갔다. 자연히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디무스의 모습에도 리브는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재회 후 함께 지내며 디무스의 기분이 하루에 수십 번씩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봐 왔던 터라, 갑작스러운 변화에 슬슬 적응한 듯했다.
더 질문할 게 없다는 듯 관심을 돌리려는 그녀의 모습에 디무스가 빠르게 질문했다.
“궁금한 건 그게 전부인가?”
“제가 뭘 더 여쭤보아야 하나요?”
리브가 의아한 눈으로 디무스를 보았다. 잠시 말문이 막혀 침묵하던 디무스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떻게 대단하신 말테나 엘레오노르와 적대했는지, 내 뒷배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날뛸 수 있는지, 왜 이런 지경이 되고서도 그들이 나를 대놓고 적대하지 못하는지, 앞으로 뒤탈은 없을지…. 물어볼 건 많지 않나.”
상황을 지켜본 다른 이들 모두가 궁금해하던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말테나 엘레오노르는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 본 귀족 가문이고, 디무스는 그들과 대놓고 분쟁을 일으켰다. 부에르노에서나 알려져 있던 디트리언 후작의 이름이 두 가문과 엮이는 바람에 양국 전역에서 연일 화제가 되었다.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듯한 디무스의 존재는 모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고, 디트리언 후작가의 역사와 배경에 다들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리브는 모두가 가지는 의문점에 관해서는 하나도 묻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디무스가 먼저 언급하기 전까지는 아예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눈치였다.
“제가 그런 걸 왜 여쭤보겠어요.”
태연한 대꾸에는 조금의 미련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호기심은커녕, 디무스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조차 못 하겠다는 듯 무신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