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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달리스크 (116)화 (116/138)

떨떠름한 목소리였지만 특별히 코리다를 향한 적개심이나 분노는 보이지 않았다. 리브의 가라앉은 얼굴을 힐끗 본 디무스가 뿌연 연기와 함께 설명을 덧붙였다.

“멍청하지 않다는 소리야.”

그 순간 리브는 코리다의 말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디무스가 리브의 눈치를 보느라 코리다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디무스가 타인의 눈치를 보는 남자가 아니라는 걸 리브는 알았다. 하물며 누군가의 미움을 받을까 봐 그 가족을 건드리지 않을 정도라니? 차라리 다른 목적이 있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코리다의 말 또한, 이제껏 그녀가 해 온 낭만적인 상상의 연장선에 불과할 텐데.

디무스의 저 마지못한 칭찬이 꼭 코리다의 말을 증명하는 증거처럼 들리니 우스운 일이었다.

“맞아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디무스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기뻐해야 할 일 아닌가?”

“기뻐요.”

사실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코리다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고 믿었던 자신의 행동이, 사실 코리다를 옭아매고 있었다는 게.

벌써 제 앞길을 고민하고 방향을 결정한 코리다와 달리, 코리다를 빼고선 미래를 도통 상상할 수 없는 제 막막함이 당혹스러웠다.

코리다는 리브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그건 너무도 갑작스럽게 주어진 열쇠였다. 코리다만큼이나 오랜 시간 스스로를 새장에 가두고 살아왔던 리브에게 주어진, 새장 열쇠.

코리다의 치료, 코리다의 앞날, 코리다를 부양하기 위한….

그 모든 게 사라진 삶이라니. 막연하게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닥치자 눈앞이 캄캄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입술만 달싹이던 리브가 아예 화제를 돌렸다.

“부에르노에는 언제 돌아가세요?”

딱히 부자연스러운 질문 같지는 않은데, 디무스는 리브의 물음을 듣자마자 정색했다.

“혼자는 안 가니 괜한 기대는 버려.”

그는 리브가 틈만 나면 도망갈 준비가 만만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도망가 봐야, 저택 밖을 열 걸음 정도만 나가도 사방에서 디무스의 수하들이 튀어나올 것 같은데 말이다.

상상하니 우스운 장면이었다. 리브가 김빠진 웃음을 흘렸다.

“제가 예전처럼 다시 순종적으로 변하면, 금방 질리실까요?”

“질려?”

되묻는 디무스의 얼굴은 마치 본인이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걸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생경한 표정이었다.

“질리면 놓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질릴 거였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그래서인지 대꾸하는 디무스의 목소리에 일말의 고민조차 묻어나지 않았다. 리브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앞으로도 질리는 일이 없도록, 다시 비위를 잘 맞추고 계속 노력하라는 말씀이세요?”

“그렇게 할 수 있겠나?”

반쯤 탄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놓은 디무스가 리브를 향해 조소했다.

“애초에 하지도 못할 거 괜히 떠보지 마.”

아무래도 그녀가 그를 파악해 온 만큼, 그도 그녀를 잘 파악한 모양이었다. 리브가 기운 없는 미소를 흘렸다.

그의 말대로 하지도 못할 테지만, 괜한 허세가 튀어나왔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세요. 저는 후작님을 감쪽같이 속이고 애들린데까지 도망쳐 왔는데요. 다시 전처럼 돌아가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도망치지도 않았겠지. 그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감당하지 못해서 도망쳤다고.”

리브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 리브를 빤히 응시하던 디무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자크 카린과 다르다고 했지.”

그것은 무척 갑작스러운 화제였다. 가지런하게 내려앉은 리브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뭐가 달라서 나에게는 총을 쏘지 못하는 거지?”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이다.

리브가 디무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집요하게 뜯어보는 시선은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가 알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설사 대답한다고 한들 디무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에게는 쓸데없는 감정 쪼가리일 텐데.

“어차피 도망갈 힘도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안 믿기시겠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래도 그에게는 그녀가 도망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필요한가 보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인 리브가 창 너머 별채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뒤로는 여전히 디무스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그는 그녀에게 더는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

재회하고 이제 열흘이 좀 넘었을까?

사실 디무스는 리브를 다시 찾으면 자신에게 발생한 대부분의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곤혹스러움은 리브가 그를 감쪽같이 속이고 도망간 뒤에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발생한 문제를 해결했으니 당연히 그로 인해 일어난 결과도 수습되어야 마땅하지 않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디무스는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나마 전에는 약이라도 먹으며 자려고 시도했다면, 이제는 약도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행여 자고 일어나면 리브가 사라졌을까 걱정된 탓이었다.

리브가 도망가서 잠들지 못했는데, 리브를 잡아 놓고도 다시 도망갈까 봐 잠들지 못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이 불안한 망상이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일단 저택은 도심과 외떨어진 장소에 지어져 있기에, 빠져나가려면 필연적으로 마차나 말을 이용해야 했다. 마차와 말은 전부 별채에서 관리 중이고, 고용인들이나 수하들의 눈을 피해 거기까지 접근하기란 불가능했다.

만약 걸어서라도 도망가겠다면야 저택 입구 밖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겠으나, 그게 전부였다. 디무스는 이 저택을 급하게 매매한 뒤 가장 먼저 저택 주변으로 겹겹이 호위 겸 감시자들을 세워 두었다. 리브가 나가 봐야 저택에서 채 열 걸음도 멀어지지 못하리라.

무엇보다 아돌프와 티에리가 코리다와 온종일 함께 생활하는데, 두 사람의 눈을 피해 여동생을 빼돌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정말로 견디지 못하겠다며 혼자 도망치겠다고 결심하더라도… 리브의 쇠약해진 몸 상태 또한 그녀의 도망을 방해할 요인이었다.

무얼 따져 보나 결론은 같았다.

리브는 절대 도망가지 못한다.

수십 번이나 같은 결론을 내리고도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피로를 못 이겨 선잠이 들어도 옆에서 움직임이 느껴지면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이미 한번 리브가 잠든 그를 두고 로비까지 내려간 적이 있는 터라 예민함은 더해졌다. 그나마 리브를 시야에 두고 있으니 온몸을 간지럽히던 감각이 사라졌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나아진 점이었다.

“이만 부에르노로 돌아가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습관처럼 리브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디무스가 눈살을 찡그렸다. 재회한 리브는 종종 저렇게 디무스가 싫어할 법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그것에 관해서는 이미 말했던 것 같은데.”

“아돌프 씨가 많이 난처해 보이시던데요.”

기어이 아돌프에게 피임약을 받겠다며 버티는 리브의 요청을 더 무시할 수 없어서 만나게 했더니만, 쓸데없는 대화까지 나눈듯했다.

아돌프의 입장에서야 주인이 진행 중이던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온종일 저택에 들어앉아 있으니 이래저래 난처하겠으나, 디무스로서는 그저 성가시기나 했다.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정신 상태로는 리브를 감시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제 상태를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라 별도의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얼마간 알아서 하라고 당부해야 할까.

귀찮다고 생각하면서, 디무스가 무신경한 어투로 대꾸했다.

“그건 그의 사정이고.”

제 불안증이야 이대로 리브를 좀 더 곁에 두면 안정되겠지.

다소 막연한 생각이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정신머리의 상태만 나쁜 것도 아니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몸뚱이 역시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리브가 사라진 뒤 하루하루 나빠지던 몸을 이끌고 부에르노에서 애들린데까지, 먼 길을 한걸음에 오느라 무리한 게 사실이니까. 아돌프가 재촉한들 이런 몸으로 다시 그 먼 길을 당장 떠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리브를 끌고 돌아가자니, 괜히 기차역으로 데리고 나갔다가 놓치기라도 하면 또 그녀를 쫓는 끔찍한 과정을 밟아야 할 터였다.

“후작님도 이곳 생활이 별로 편해 보이진 않으세요.”

“그다지.”

“…잠을 못 자고 계시잖아요.”

탁.

리브가 탁자 위에 낯익은 약통을 올려 두었다. 그가 자주 먹었던 수면제였다.

“아돌프 씨가 약이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확인해 달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보기에는 전혀 안 줄어든 것 같던데.”

본채 내에 고용인을 두지 않아서, 리브에게 직접 확인을 부탁한 모양이었다. 디무스가 작게 혀를 찼다.

“본래 인간은 약을 먹지 않아도 잠을 자는 동물이야.”

제 몸 상태가 나쁘다는 걸 알면 리브가 도망갈 희망을 얻지 않을까. 그런 의심 때문에 그녀 앞에서는 별다른 티를 내지 않았던 참이다.

그러나 언제나 눈치가 빠른 리브는 이번에도 그랬다.

“한 침대를 사용하는데, 정말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하기야 디무스가 온종일 리브를 보고 있다는 건, 그녀 역시 종일 디무스를 보게 된다는 뜻이었다. 일주일 정도면 불면을 알아챌 수도 있겠지.

“약 없으면 잠을 못 자신다면서요.”

“어차피 별 효과도 없어.”

“더 독한 약으로 바꿔 달라고 전해 드릴까요?”

굳이 저렇게 자신을 재우려는 까닭이 무엇일까? 무엇을 추측하든 좋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디무스의 마음에 금세 불안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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