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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달리스크 (113)화 (113/138)

흉터 가득한 복부에 총구가 꾹 눌렸다. 창백한 표정으로 그것을 확인한 리브가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왜….”

그의 분노는 이상했다.

멋대로 도망친 정부를 잡기 위해 먼 애들린데까지 쫓아온 것만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며칠간 편히 잠도 못 자게 사람을 들볶은 것이야 그래, 본래 그가 그녀에게 바란 게 몸이었으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총구를 제 배에 대 주는, 이런 극단적인 행동은 정말….

“뭘 원하시는 거예요?”

“너.”

혼잣말 같은 물음에 곧장 답이 돌아왔다.

“살아 있는 너.”

총구를 멍하게 보던 리브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리브의 눈에 차갑게 굳은 디무스의 얼굴이 비쳤다.

리브의 얼굴을 확인한 디무스가 입술을 비틀었다.

“순해 빠져선. 이런 성격으로 용케 그 새끼의 다리에 총알을 박았군.”

“…누구요?”

“네 옛 치정 상대.”

딱히 어려운 말도 아닌데 이해되지 않았다.

치정 상대?

리브는 한참 생각하고서야 자신이 최근 총을 쏘았던 상대를 떠올렸다. 사람에게 총을 쏜 경험이라고는 오직 한 번이었으니, 당연히 지금 디무스가 말하는 상대는 자크 카린이리라.

다만 의아한 것은, 그가 왜 자신의 치정 상대냐는 것이었다.

“디트리언 후작의 정부가 옛 연인을 그리워하다가 도망갔다는 소리를 누군가 하던데.”

“옛 연인이라니, 그런 건 없어요.”

“그래, 그대는 내가 감히 값을 치르지 못할 정도로 비싸니까. 누구인들 눈높이를 맞춰 줄 수 있었겠나.”

신랄한 비아냥에 리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혀로 입술을 축인 그녀가 지친 음성으로 물었다.

“화가 풀리면, 저를 놓아주실 건가요?”

“벗어날 방법은 이미 알려 줬는데.”

여전히 리브의 손은 그에게 꽉 잡혀 있었다.

“쏘게.”

리브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해할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제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닌가?”

디무스는 정말로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자크 카린에게 그랬듯, 그렇게 하면 될 일인걸.”

“그와 후작님이 같나요?”

“다를 건 뭐지? 너는 나에게서 아주 쉽게 도망갔는데.”

리브는 그 말 속에 담긴 원망과 비난을 알아챘다. 그것은 소유물을 잃어버린 주인의 분노라고 하기에는 좀 더 무른 감정이었다. 우습게도 그건 꼭, 버림받은 이가 내비칠 법한 그런 분노였다.

버림받은 이라니. 리브는 도망치는 내내 단 한 번도 그를 ‘버린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버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가 저를 버린다면 모를까.

그녀는 화가 났다. 두 사람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휘두른 건 디무스인데, 도리어 그는 리브에게 휘둘린 사람처럼 원망을 내비치고 있질 않나.

“당신이 그놈이랑 같았으면, 도망치지 않았겠죠.”

리브의 목소리에도 원망이 묻어났다.

“그놈에게 그랬듯 총이라도 쏠 수 있을 정도로 아무 감정이 없었으면 오히려 쉬웠겠죠.”

탁!

잡혀 있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쥐고 있던 권총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리브가 이를 악물고 디무스를 올려다보았다.

“감당할 수 없으니까 도망간 거예요.”

상처를 준 건 당신이면서, 어떻게 당신이 상처를 받은 양 나를 원망할 수 있나.

그런 마음에 저절로 분이 치밀었다.

“제 주제를 알라고 한 건 후작님이시잖아요.”

그래서 주제를 알고 욕심을 버리려 한 것인데. 곁에선 그럴 수 없으니 도망을 쳐서라도 버리려 한 것인데.

울컥 치민 감정을 내비친 리브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나 억누르고만 살아온 까닭에 이 티끌만 한 감정 표출이 어렵고 버거웠다.

뒤늦게 이 감정을 다스리고자 심호흡하는데, 디무스가 리브의 턱 아래를 잡아 눈을 맞추었다.

“화를 내라고 말했잖아.”

“제가 어떻게….”

“받아 준다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콱 깨물었지만, 통증은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다가, 뺨으로 눈물이 넘쳐흘렀다.

“저를….”

저를 좋아하세요? 아니면, 사랑하세요?

한때 그리 쉽게 나오던 물음은 이제 차마 뱉을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변했다. 아무런 기대도 없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바라는 답이 정해진 물음이므로.

디무스는 이번에도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곁에 있어 주었다.

그를 원망하고 싶은 이 순간에.

***

도대체 사람 몸에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물이 나오나.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울던 리브는 결국 혼절했다. 저택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티에리가 진찰한 결과, 도주하는 기간 쌓인 피로와 며칠간 식사를 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시달린 나날 등이 겹쳐져 건강을 쇠약하게 만들었다는 듯했다.

“심각한 건 아니에요?”

“충분히 쉬고, 잘 먹으면 돼요. 보아하니 여행하는 동안 별로 좋은 생활을 하진 않은 것 같으니까.”

“…잠도 잘 못 자고, 식사도 거의 안 했어요.”

코리다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리브를 힐끔 보았다. 파리한 안색으로 누운 리브를 가만히 바라보던 코리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디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디무스가 코리다와 마주한 건 사실상 처음이었다. 멀리서 보거나, 보고서로 읽은 적은 숱하게 많지만.

차가운 디무스의 눈동자와 마주친 코리다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우물거렸다. 한참이나 고민하는 듯하던 코리다가 이내 결심했는지, 결연한 표정으로 디무스를 노려보았다.

“우리 언니가 훨씬 아까워요.”

제 딴에는 위협적으로 으름장을 놓으려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디무스의 눈에는 그저 가소로웠다.

디무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자, 코리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무조건 언니 편이에요.”

“당연한 거 아닌가?”

눈살을 찌푸린 디무스가 냉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제 인생이고 뭐고 다 바쳐서 키웠는데, 그 은혜도 모르면 곤란하지.”

“제가 은혜를 모를 일도 없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후작님이 무슨 상관이셔서 곤란하세요? 이건 저랑 언니 사이의 문제거든요?”

누가 리브 로이데스의 여동생 아니랄까 봐.

되바라진 반박에 디무스의 눈에 짜증이 스쳤다. 그것을 알아챈 티에리가 슬그머니 코리다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환자가 쉬어야 하니 이만 나가죠.”

그나마 티에리가 눈치가 있으니 망정이지.

디무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코리다가 불퉁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저만요? 저분은요?”

“후작님은 알아서 나가실 거고.”

“뭘 믿고 저만 나가요?”

코리다가 눈을 홉떴다. 아돌프와 만났을 때 순순히 잡힌 건 코리다의 의지였다지만, 디무스에 대한 신뢰는 별개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코리다는 디무스와 리브가 몇 날 며칠 저택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동안 바깥에서 꽤 전전긍긍한 듯했다. 그러다가 겨우 저택 문이 열렸는데 리브는 혼절했고, 저택은 성한 곳 없이 죄다 난장판이니 오죽 놀랐을까.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곱게 봐줄 의향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 목숨줄을 누가 붙여 줬는지 언니에게 듣지 못한 모양이지?”

디무스가 냉담한 목소리로 묻자, 코리다가 눈에 띄게 몸을 경직시켰다. 본인의 치료와 약에 관해서 만큼은 마땅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질근질근 물던 코리다가 울컥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갚을 거예요!”

불신과 경계심으로 가득하던 눈빛은 조금 누그러들었지만, 여전히 결연했다.

“꼭 성공해서 다 갚을 테니까, 우리 언니한테 저 가지고 협박하지 마세요!”

“데리고 나가.”

“언니 힘들게 하면 가만 안 있을 거예요!”

티에리가 앓는 소리를 내며 코리다를 잡아끌었다. 시끄러운 그 목소리에 저절로 두통이 치밀어서, 디무스가 낮게 혀를 찼다. 코리다와 티에리가 나가고 방문을 닫자 그나마 좀 조용해졌다.

습관적으로 시가를 꺼내 물려던 디무스가 문득 행동을 멈추었다.

침대 위의 리브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평소 행동거지가 고요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숨소리조차 아주 작아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았다.

전에는 그렇게 존재감 없이 움직이는 그녀가 참 좋았는데, 이젠 도리어 이 고요함이 거슬렸다. 얼른 깨어나서 화를 내든 울든, 시끄럽게 굴었으면 좋겠다.

“뭘 원하시는 거예요?”

너를 원한다고 대답했지만, 그 대답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했다. 이 소유욕은 그동안 그가 지하실에 긁어모으던 여느 수집품들과는 결이 달랐으므로.

“제 주제를 알라고 한 건 후작님이시잖아요.”

필립의 말대로였다. 정부에게 보이기에는 이미 너무 과한 처사다. 하물며 창부에게 보일 만한 태도는 더욱 아니었다.

수척한 리브의 뺨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던 디무스가 혀끝을 짓씹었다. 그는 궁금했다.

“당신이 그놈이랑 같았으면, 도망치지 않았겠죠.”

자크 카린과 무엇이 다른지.

“그놈에게 그랬듯 총이라도 쏠 수 있을 정도로 아무 감정이 없었으면 오히려 쉬웠겠죠.”

네가 가진 그 감정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걸 듣고 나면, 제 감정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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