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10)화 (110/138)

검은색 마차는 흔한 편이었다.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놀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애들린데에 도착한 이후, 저렇게 새까만 마차를 본 기억이 있던가?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혀왔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리로는 천천히 뒷걸음질하고 있었다.

망토 앞섶을 움켜쥔 리브가 휙, 몸을 돌렸다. 급여가 어쩌고 직장이 어쩌고 하던 생각들이 순식간에 천하 태평한 고민으로 전락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후작이 여전히 제 뒤를 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현실감 없는 가능성이었다.

“신문이요, 신문!”

거의 뛰다시피 약방에서 멀어지던 리브가 퍼뜩 시선을 들었다. 제 뒤를 쫓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가 얼른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한 부 줘.”

두툼한 신문을 움켜쥔 채, 이번에야말로 여관까지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왔다. 숨을 헐떡이며 방으로 들어선 리브가 문을 잠근 뒤 책상 위에 신문을 펼쳤다. 놀란 코리다가 곁에서 무어라고 말을 걸어왔지만, 리브의 귓가에는 들리지 않았다.

큼지막한 제목을 눈으로 빠르게 훑어보던 리브가 어느 한 지점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말테의 긍지는 어쩌다 수치스러운 오물통에 빠졌는가’라고 적힌 제목이었다.

길게 이어진 세부 기사 속에는 온갖 거창한 내용이 다 들어가 있었다.

지그힐트와의 파혼 전말, 문란한 과거, 엘레오노르와의 밀회, 신성한 평화 순례의 변질, 칼리오페 추기경의 분노….

어찌나 자극적인지 거듭 읽어도 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부에르노에 후작과 말테 공작 영애와의 염문설이 돌고 있으리라고 여겼던 제 생각은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다는 걸. 오히려….

“공개적으로 짓밟아야 다른 인간들이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을 테니까.”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언제나 그래 왔던 것 같다.

후작은 제 입으로 뱉은 말을 지키는 남자였다. 그럴 능력이 있었고.

그러니까 아마도.

“잡은 걸 놓아주는 일은 없어.”

불현듯 식당에서 그에게 안기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놓아주는 일은 없다고 했었다. 그가 질리지 않는 한.

“언니, 언니?”

“짐 싸, 코리다.”

“응?”

마른침을 삼킨 리브가 조용히 신문을 덮었다.

“새벽에 첫 기차를 타고 떠날 거야.”

후작은 리브가 코리다의 건강에 얼마나 강박적으로 반응하는지 아는 남자였다.

그러니 예약까지 해 둔 신약을 포기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리라.

리브는 후작이 정말 자신을 잡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면, 추격자들이 약방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약을 포기하고 첫 기차를 선택했다.

마차를 탈까 싶기도 했지만, 정말 사람이 와 있는 거라면 마차가 아니라 당장 멀리 떠날 수 있는 기차가 나았다. 일단 기차를 타기만 하면 거리를 벌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검은 마차를 보고, 신문에서 말테 공작 영애의 떠들썩한 추문을 읽은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건 어쩌면 과한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좀 먼 도시로 갔다가, 과민 반응이었다고 판단되면 다시 돌아오면 될 일이었다.

“잠깐 여기 있어. 표 끊어 올게.”

이른 새벽의 기차역은 비교적 한적했다. 코리다의 후드를 다시 한번 매만져 준 리브가 주변을 살폈다. 사방은 고요했고 매표소의 대기줄도 길지 않았다.

가장 빠른 첫차의 표를 끊는 것도 수월했다. 두 장의 표를 받아든 리브는 크게 심호흡하며 몸을 돌렸다.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냥 잠깐 근교에 놀러 갔다 온다고 생각하자.

“이제…!”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연 리브가 곧장 입술을 다물었다.

코리다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리다?”

리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대합실 구석에 서 있던 코리다가 어디에도 없었다.

당황한 얼굴로 코리다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리브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표를 끊는 건 기껏해야 10여 분 남짓밖에 안 걸렸다. 코리다가 그 짧은 기다림을 버티지 못하고 이동할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매표소와 거리가 먼 것도 아니다. 누군가 코리다를 억압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소란이 일어났을 테고, 리브에게 그 소리가 안 들렸을 리 없었다.

“코리다!”

그녀는 코리다의 행방을 찾기 위해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몇 걸음 떼기도 전, 팔을 잡아채는 강한 힘에 의해 몸이 강제적으로 돌려졌다. 그 반동에 쓰고 있던 후드가 반강제적으로 벗겨졌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차갑게 얼어붙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리브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꿈에서도 일상에서도 좀처럼 잊히지 않던, 서늘하고 아름다운 얼굴의 남자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비틀린 입술 사이로 냉소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리브는 말문이 막혀 그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녀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저를 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급히 도망가려던 건 맞지만….

그렇다 해도 직접 움직이고 있는 건 부하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남자는 명령만으로도 손쉽게 사람을 부릴 수 있는데.

틀림없이 그럴 텐데, 왜….

디무스 디트리언, 어째서 이 남자가 여기에 있는 거지?

“아무리 급해도 약은 찾아가야지. 귀한 여동생의 건강을 책임져 줄 물건인데.”

남자가 코리다를 언급하는 순간, 얼음처럼 굳어 있던 리브도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설마 당신이 코리다를…?”

“내가 바보도 아니고, 같은 실수를 두 번 할 리가 없잖나.”

빈정거림이 섞인 목소리로 대꾸한 디무스가 조소했다.

“네게 족쇄를 채우기 위해서 누구의 신변부터 확보해야 할지는 뻔하지.”

그건 사라진 코리다가 제 손아귀에 있음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리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애는!”

“언성을 높일 처지가 아닐 텐데.”

리브의 팔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를 바짝 잡아당긴 디무스가 한층 낮고 딱딱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주 멀리까지 오셨어. 이런 재주가 있는 줄 모르고 내가 참 태평하게 그대를 풀어놨지.”

“코리다는 어디….”

“입.”

강한 어조로 리브의 말을 끊은 디무스가 짧게 숨을 뱉었다. 그런 뒤 글자 하나하나를 꾹꾹 억눌러 말을 이었다.

“다물게. 이 자리에서 그 예쁜 몸 자랑하기 싫으면.”

리브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디무스를 바라보았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에 선 덕분인지, 날것의 감정이 전부 리브에게 전달되었다.

새파란 눈동자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악다문 입술과 힘이 잔뜩 들어간 턱.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냉혹해 보였으나 그것은 단지 분노로 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초조함, 혹은 다급함.

그의 핏발 선 눈은 꼭 며칠 밤을 새운 사람처럼 피로해 보였다. 자세히 보면 마냥 매끄럽고 곱던 피부도 거칠어졌고, 입술도 메말라 있는 게 혈색이라고는 찾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상한 건 본인의 감정을 전혀 감추지 않는,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저 시선이었다. 냉담하거나 무료하거나, 그도 아니면 기껏해야 비웃는 시선이나 겨우 보여주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뜻밖의 모습에 놀란 리브가 멈칫한 사이, 디무스가 걸음을 옮겼다. 리브는 강하게 당기는 힘에 저항할 사이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마차가 있었다. 새까만 마차였다.

리브는 뒤늦게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 보려 했으나, 디무스는 너무도 손쉽게 그녀를 들어 마차 안으로 넣었다. 나뒹굴다시피 마차에 오르게 된 리브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오른 디무스가 주먹으로 마부석 쪽 창문을 세게 내리치자, 마차는 지체 없이 출발했다.

이미 달리기 시작한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건 위험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선은 자연스럽게 마차 문으로 향했다. 리브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디무스가 리브의 팔을 잡아 제 옆에 강제로 앉혔다.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꽉 잡는 손길에, 리브가 힐끗 옆을 보았다.

싸늘한 표정을 한 사내는 마차에 오른 뒤 시종일관 창밖을 응시하며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리브가 조금만 딴생각을 하면 당장 반응해 올 것처럼 예민해 보이기도 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리브가 결국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차가 빠르게 달렸다.

그러나 목적지는 알 수 없었다.

***

마차는 오래 달리지 않아 멈추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차를 타고 부에르노까지 돌아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애들린데 시내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듯한 저택이었다. 마차가 도착하자, 디무스가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 물론 여전히 리브의 팔을 잡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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