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저 신문의 1면에는 디트리언 후작과 말테 공작 영애의 염문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말테 공작 영애의 신분이 워낙 드높으니 파혼 후 새롭게 찾은 사랑 이야기 역시 모두를 흥분시키겠지.
후작은 괘씸한 정부 따위 진즉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 본인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말테 공작 영애의 손을 잡았을 수도 있다.
그러지 않을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리브는 이곳까지 오는 내내 신문 한 장 사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후작이 저에게 관심을 끊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걸 확인하는 순간, 자신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 또한 확인받게 될 테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 온 주제에, 별 우습지도 않은 미련을 버리질 못해서.
“아가씨, 신문 사세요!”
우두커니 서서 신문 더미를 바라보는 리브의 모습에, 신문팔이 소년이 반색하며 들고 있는 종이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퍼뜩 정신을 차린 리브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행여 실수로라도 신문을 보게 될까 싶어, 리브가 얼른 몸을 돌렸다.
애들린데에 도착해서 한결 가벼워졌던 걸음이 도로 무거워졌다.
습관처럼 염색약을 산 리브는 차라리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기로 했다. 그리하여 선택한 것은, 애들린데 내의 주택가를 돌아보며 자매가 살 만한 집을 알아보는 일이었다.
척 보아도 좋아 보이는 동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직장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집세를 과중하게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걸음은 좀 더 허름하고, 좀 더 낙후된 동네로 향하게 되었다.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한때 질리도록 맡아 본 적이 있는 오물과 쓰레기 냄새가 슬슬 풍겨 왔다. 리브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아무리 돈이 아쉬워도 이런 더럽고 열악한 동네에서 사는 건….
거기까지 생각하던 리브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이 풍경이 딱히 낯설지도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집세를 더 내라며 닦달하던 포멜, 코리다를 살펴 주던 옆집의 리타, 이따금 찾아가던 집 근처 예배당의 예비 성직자 베트릴….
시일을 헤아려 보면 그리 멀지도 않은데, 꼭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생활.
‘세상에….’
좋은 집에서 좋은 걸 먹고, 좋은 옷을 입은 나날이 얼마나 된다고. 당연하게 여기던 그 과거를 까맣게 잊고 불평이나 해 대다니.
리브의 얼굴에 허탈한 감정이 떠올랐다. 옛날엔 그저 돈이 얼마나 적게 드는지만 따지느라 다른 조건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 또한 그렇게 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좀.’
리브의 눈동자가 다시금 동네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단순히 더럽고 냄새나고 좁아 보인다는 점을 제외하고서라도, 앞으로 학교에 다닐 코리다의 생활을 생각하면 좀 안전한 동네를 찾아야 하지 않나.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리브가 결국 등을 돌렸다. 집을 구하는 건 좀 더 심사숙고하는 게 좋겠다. 그보다는 먼저, 직장을 알아보자.
고정적인 수입액이 정해지면, 다른 것들을 결정하기도 수월하겠지.
***
코리다는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제 언니가 저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았다. 리브가 언제까지고 제가 천진난만하고 명랑한 여동생으로 남기를 바란다는 것도 알았다. 비록 집 안에만 있어서 세상 물정은 몰라도, 리브의 변화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알아챈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코리다는 그들이 애들린데에 정착하는 데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도 금방 눈치챘다.
사실 깊이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자매는 아직도 여관에 머무르고 있었고, 리브는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인력 소개소만 드나드는 중이었다. 어깨너머로 짐작해 보건대, 가짜 신분증을 만들지 못해서 여러 방면으로 난항을 겪는 듯했다.
평생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해 왔던 리브다. 가짜 신분증이니 뭐니, 그런 뒷골목에서나 할 법한 거래에 관해 얼마나 알겠는가. 연고 없는 지역에서, 은밀하게 가짜 신분을 만드는 게 수월할 리 없었다.
아침 일찍 나가기 위해 채비하는 리브를 조용히 응시하던 코리다가 슬그머니 리브에게 다가갔다.
“언니, 내가 도울 건 없을까?”
“없어. 그보다 약은 얼마나 남았어?”
“약은….”
기껏해야 서너 일 먹으면 사라질 약의 수량을 확인한 리브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리브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눈동자에 깃드는 수심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오늘은 약방부터 가야겠네.”
리브가 애써 입매를 끌어 올려 웃었다.
“예약하면 늦어도 사흘 내에 수령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요 며칠 리브는 입버릇처럼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렇게 말하는 리브야말로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본인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늘 든든하던 언니였는데, 요즘의 리브는 매일 위태로워 보였다. 몇 번 이 문제에 관해서 말해 보았지만, 리브가 정색하며 부정하는 바람에 대화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코리다가 생각하기에 이 모든 건 부에르노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히는 후작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리브는 후작과 그녀의 관계에 어떠한 사적인 감정 같은 건 없었다며 부정했으나 그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현실 도피였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관계였으면 이렇게 도망치듯 부에르노를 떠날 까닭이 무엇이겠나.
“애들린데에 도착한 날부터 계속 바쁘게 돌아다녔잖아. 언니도 좀 쉬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언니.”
“그래. 그렇게 할게. 약만 예약해 두고.”
코리다는 이제 약을 먹지 않는다고 당장 쓰러질 것처럼 어지럽고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완치했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약을 끊는 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어서 마음대로 복용을 중단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그녀는 오늘도 문 앞에서 언니를 배웅했다. 칙칙한 갈색으로 얼룩덜룩 머리카락을 염색한 리브의 뒷모습이 유독 왜소하고 작아 보였다. 코리다는 그런 리브의 등을 보며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그날 리브는 약만 주문하고 돌아왔다. 수령할 날짜는 사흘 뒤였다.
***
인력 소개소에서 드디어 연락이 왔다. 간단한 매장 업무를 하는 자리라고 했다. 하루하루 막막하기만 하던 와중 듣게 된 이 기쁜 소식에, 리브는 모처럼 생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작은 책방입니다. 중고 서적을 주로 다루는 가게인데 급하게 사람을 구하고 있어요. 간단한 사무를 겸할 수 있는 직원을 찾는다는데 마침 조건에 맞으시는 것 같아서 제안하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주소를 드릴 테니 이쪽으로 가서 면접을 보시면 됩니다.”
리브는 들뜬 얼굴로 인력 소개소를 나섰다. 책방은 여학교 근처에 자리 잡은 작은 가게였다. 이미 학교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몇 번 근방 거리를 오갔던 덕분에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았다.
학교와 가까운 직장이라니, 위치도 아주 적합하지 않은가.
엉망진창으로 얽혀 있던 실타래가 이제야 제대로 풀리는 것 같았다. 아주 멀리까지 이탈해 있던 궤도에서 돌아와 비로소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기분이다.
물론 막상 찾아간 책방에서 제시한 급여는 가정 교사 일을 할 때에 비하면 턱없이 적었다. 그 돈으로는 학비와 약값을 둘 다 부담하기에는 영 부족할 터였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지만 생각보다 더 형편없는 급여 액수를 보고선 저도 모르게 한숨이 치밀 정도였다.
그러나 리브는 자신의 실망감을 애써 외면했다.
‘당장은 급하니까 어쩔 수 없지.’
의외로 업무가 적성에 잘 맞을 수도 있고, 여차하면 일을 더 구하면 된다.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몰랐다. 정신없이 일만 하면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들 시간 같은 건 없을 테니까.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새 몸에 물들었던 사치스러운 여유 따위는 전부 잊힐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러면 나중에는 평온한 마음으로 후작을 떠올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마냥 희망찼던 마음은 면접을 마치고 나올 즈음에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다시금 닥친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기도 하고, 불시에 떠오른 후작 때문이기도 했다.
후작과의 모든 기억은 이토록 시시때때로, 아무 전조도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코리다와 대화를 하다가, 상점에서 물건을 고르다가, 그냥 길을 걷다가.
그를 떠났음에도 오히려 그의 존재감은 더 강해져 가고 있는 듯했다.
…솔직히 지금의 심정으로서는 그를 잊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런 사람과 잠깐이나마 얽힌 건 앞으로도 제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으로 남을 테니까. 한평생 그보다 더 대단한 남자를 만나 볼 일이나 있겠는가.
그저 그를 떠올릴 때 조금이나마 제 마음이 평화롭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할 것 같다.
리브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코리다에게 곧장 돌아가려 했는데, 이런 마음으로 갔다가는 또다시 걱정을 사게 될 터였다. 거리를 걸으며 잠시 감정을 정돈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발길은 애들린데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안내판이 서 있는 걸 발견하면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여전히 그녀의 수배지 같은 건 없었다.
결국 가짜 신분증을 구하지 못해서 본명으로 신약을 예약했는데도 말이다.
‘이쯤 되면 정말 괜찮다고 봐야 할까.’
예약자 명단에 ‘리브 로이데스’라는 이름을 적고 신분증을 내밀던 그 순간까지도 그녀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예약을 하고도 이틀이나 지난 지금, 리브를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이젠 정말 괜찮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력 소개소에서 직업을 알선받기도 한결 수월하리라. 제 신분증의 가장 큰 강점은 뭐니 뭐니 해도 학력을 인증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정말로 모든 게 제자리를 되찾았다. 리브는 내일 신약을 받고 난 뒤 인력 소개소에 들러 미리 부업을 더 구할 수 있도록 말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클레망스 출신이라고 하면 아마….
무심코 익숙한 길을 찾아 걷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맞은편 멀리 약방이 보였다.
그리고 약방 앞에 서 있는 검은색 마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