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08)화 (108/138)

찰스가 떠난 뒤로도 디무스는 한참이나 약통을 응시했다.

저것을 끊은 건, 그가 본격적으로 누드 작품을 수집하고 난 뒤였다. 약에 취해 자는 것보다 누드화를 보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훨씬 온건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이제 소용없었다. 지하실에 모아 둔 누드 작품들은 전부 쓸모없는 쓰레기로 전락해 버렸다.

“후작님, 말테 쪽에서 다시 협상안을 제시했습니다.”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디무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아돌프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언제 들어왔을까? 디무스의 명령도 없이 함부로 집무실에 들어올 사람은 아니니, 분명 그가 무의식중에 들어오라는 허락을 내렸으리라.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관자놀이를 꾹 누른 디무스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주요 골자는….”

“성급했어.”

“…네?”

“성급하게 죽였어.”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아돌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른세수한 디무스가 건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림을 태울 게 아니라, 완성하라고 해야 했는데.”

아돌프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디무스를 보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그가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브레드 말씀이십니까?”

“그놈 이름이 브레드였나?”

이름이야 알 게 뭔가. 중요한 건 그놈이 리브의 누드화를 그려 왔다는 사실이었다.

“겨우 세 점이라니, 너무 적어.”

그마저도 두 개는 뒷모습이고, 한 점은 얼굴을 반만 그려 두었다. 살아 있는 리브가 없는 지금, 그녀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이라도 있었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저따위 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효과가 좋았을 것이다.

브레드를 살려 두었으면, 기억에 의존해서라도 리브의 얼굴을 비슷하게 그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렇게 죽이지 말고 그냥 가둬 두기만 할 걸 그랬지. 지금 그에게는 예술적인 실력을 보유한 화가가 아니라 리브의 얼굴을 아는 화가가 필요했다.

그녀를 잡으면 초상화를 많이 그려 두어야겠다. 굳이 초상화가 아니어도, 그냥 뭐든 많이 그려 두라고. 눈길 닿는 곳에 걸어 둘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이.

그 흔한 로켓 하나 만들어 두지 않은 게 실책이었다. 지척에 있으니 그런 것의 필요성을 느꼈을 리가 있나. 하지만 이건 디무스의 잘못이 아니었다.

“모델은 그림 속이 아니라 후작님의 앞에 있잖아요.”

다름 아닌 리브가 직접 그리 말했다. 그림을 내려 달라고 부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림이 아니라 실제의 저를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림이 아니라 실제를 봐 주길 바랐으면 네가 이 앞에 있어야지.

눈길 닿는 곳, 손을 뻗으면 닿을 자리에 있어야지.

“저는 전리품이 아니에요. 비싼 조각상처럼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해 두는 그런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그때는 우는 모습을 보고 그리도 화가 났는데, 이제는 그 우는 모습이라도 눈앞에서 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치미는 화조차 기꺼울 것 같았다.

리브의 모습이 뇌리에만 있으니 무슨 감정이 치밀든 도통 해소할 방도를 모르겠다.

“최선을 다해 찾고 있습니다.”

나지막한 아돌프의 말에 디무스는 그저 냉소적으로 웃을 뿐이었다.

그날 밤, 오랜만에 먹은 약의 효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디무스는 모처럼 술을 마시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매끄럽고 새하얀 팔이 목을 휘감았다.

낭창낭창한 허리는 한쪽 팔 안에 들어올 정도로 가늘었는데, 아래로 이어지는 곡선이 꽤 풍만해서 마치 완벽한 비율로 빚어 놓은 도자기 같았다.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 있던 그녀가 머리를 어깨에 기대자, 풍성한 적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등허리까지 쏟아져 내리는 머리카락을 매만지자, 목덜미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목에 매달려 있던 손이 그의 탄탄한 가슴팍을 더듬어 내려갔다.

복부는 이미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그의 흉터와 복근이 만들어 낸 굴곡을 더듬어 갈수록, 허벅지에는 힘이 들어가고 숨이 가빠졌다.

당장 하체를 접붙이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으나, 이상하게도 사지가 무거워서 뜻대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기껏해야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헤집고 등줄기를 손끝으로 건드리는 게 그에게 허락된 행동 전부였다.

그러는 사이 그의 몸을 더듬던 손이 다리 사이에 닿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몸은 이미 쾌락에 익숙해져 있었다. 곧 머릿속을 눅진하게 절여 버릴 감각이 시작되리라. 기대감에 입 안에선 침이 고였다.

그러나 단단하게 곧추선 성기에는 기다리던 손길이 닿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자유롭지 않은 몸 때문에 애가 타는 와중, 덩그러니 방치된 듯한 느낌이 들자 더욱 조급함이 밀려왔다. 그는 고개를 내려 제 품에 안겨 있는 여자의 귓가를 입술로 더듬었다.

어서 더 어루만져 달라고, 몸을 맞대고 네 따뜻한 구멍으로 파고들게 해 달라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붉게 부풀어 오른 귀두를 좁고 습한 내벽에 짓누르게 해 달라고.

귓바퀴를 따라 혀를 움직이다가, 이를 세워 도톰한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는 목을 움츠리며 새된 신음성을 흘렸다.

동그랗게 폭신폭신한 유방이 그의 흉곽 위로 짓눌렸다. 가슴살이 뭉그러지는 와중 꼿꼿하게 힘이 들어간 유두가 피부 위로 문질러지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명백히 흥분하고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불긋한 목덜미를 보나, 치미는 쾌감을 참지 못해 뒤틀리는 나신을 보나 그랬다.

허벅지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는 건 그녀의 애액이었고, 색색거리는 소리는 흥분을 참지 못해 터져 나온 뜨거운 숨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뿐이었다. 도통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

갑갑함에 화가 치밀었다. 입술로 지분거리던 그는 결국 짜증을 참지 못하고 이를 세워 그녀의 목덜미를 세게 물었다가 빨아들였다. 새빨간 울혈이 금세 자리를 잡았다.

그 순간, 무겁게 구속되어 있던 사지가 가벼워졌다. 그가 당장 몸을 일으켰다.

가늘고 앙상한 몸을 잡아채 단숨에 짓눌렀다. 그녀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의 거대한 몸 아래에 깔렸다.

흐트러진 나신을 힘주어 벌리는 찰나였다.

움켜쥔 살결 위로 희미한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균열은 메마르고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처럼 그녀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새하얀 대리석 조각상 같던 나신이 조각나 부서지기 시작했다.

충격으로 인해 굳은 벽안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당연히 쾌감에 젖어 있으리라 생각했던 여자의 얼굴은 창백했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울음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를 제 인생의 구원자처럼 보던 여자의 녹색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고, 살짝 벌어진 입술은 갈라지고 찢어져 병자와 다름없었다.

균열이 그녀의 목덜미를 지나 뺨과 이마까지 이어졌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보는 순간, 여자는 그의 품 안에서 희고 날카로운 조각으로 부서져 형체를 잃었다.

동시에 그도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으며 번쩍, 눈을 떴다.

“헉…!”

짧은 헛숨을 되삼키며 눈을 뜬 디무스는 캄캄하고 냉랭한 침실의 풍경을 확인하고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심코 앞머리를 쓸어 올리자 손바닥에 식은땀이 묻어났다. 하반신에서는 습하고 뻐근한 감각이 느껴졌다. 굳이 확인해도 상태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적나라한 발정이었다.

디무스가 서늘한 헛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게 황당하고 어처구니없었다.

그러나 가장 어이없는 건.

꿈에서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는 리브 로이데스를 향한 이 서운한 감정이었다.

우습게도.

***

애들린데에 처음 발을 내디디는 순간, 리브는 자신이 이곳을 제법 마음에 들어 할 것이라는 걸 예감했다.

도시는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웠다. 붉은 지붕들이 나란히 마주한 거리는 깔끔하면서도 정갈했는데, 창문마다 꾸며진 화단이 도시의 따뜻하고 싱그러운 분위기를 잘 살려 주었다.

고단한 여정을 무릅쓰고 이곳에 도착한 보람이 있었다. 코리다 역시 새로운 도시의 풍경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급한 대로 여관에 방을 잡은 뒤, 리브는 본격적으로 도시를 탐방하고 다녔다.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약방의 위치와 신약의 유통 여부였다.

“신약은 납품량이 정해져 있어서, 예약을 해 주셔야 구매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애들린데의 약방에서는 예약자의 신분을 따지지 않는 듯했다. 그들이 친절해서라기보다는, 근방 지역에 유력한 상류층 가문들이 없어서 그런 듯했다.

리브에게는 도리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예약을 위해서는 신분 증명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녀는 일단 알겠다며 물러서는 쪽을 택했다.

아직 가짜 신분증을 구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수배되지 않았다는 건 확인했다. 어느 곳에서도 리브의 수배 전단지를 찾아볼 수 없었던 덕분에, 나중에는 과감하게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덕분에 우려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애들린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자크는 리브를 고발하지 않은 듯했고, 설사 고발했다 한들 대단히 떠들썩하게 수색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애들린데에서는 굳이 신분을 속일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뭔지 모를 불안감이 내내 마음 한쪽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뭔지 모를….

아니, 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불안감의 정체를.

약방을 나와 거리를 걷던 리브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용 화단 앞에서 신문팔이 소년이 목청 높여 호객하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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