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07)화 (107/138)

리브를 쫓는 것과 별개로 디무스가 가장 먼저 진행한 건 루지아에 관한 처리였다.

그녀는 지금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남자에게 눈이 멀어서 집안의 혼사를 뒤엎은 것도 모자라, 신성한 평화 순례단에 불순한 의도로 끼어들어 순례의 의미를 더럽혔다는 것이다. 말테 공작 영애가 매달리는 대상은 디무스 디트리언 후작으로 밝혀졌는데, 몇 년 전 그녀가 디무스에게 보냈던 서신 일부가 공개된 게 그 증거였다.

드러난 내용은 지그힐트와의 파혼을 운운하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파혼을 한 건 최근이지만, 서신에 따르면 이미 몇 년 전부터 그녀는 디무스 때문에 가문의 혼사를 깨뜨릴 작정을 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당연히 말테 가문에서는 공개적으로 이 사실을 부정했고, 루지아 역시 펄쩍 뛰며 화를 냈다.

그러자 곧장 퍼진 다음 소문은, 루지아가 제 외사랑을 이루기 위해 몸을 던져 누군가를 회유했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대상은 엘레오노르의 넷째 공자였다.

엘레오노르의 직계 공자가 부에르노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가 한낱 미술 교사를 하고 있던 카밀 마르셀이라는 게 밝혀졌다. 심지어 말테 공작 영애와 친하다고 알려진 귀족 영애 중 한 사람은 엘레오노르 공자와도 친분이 있었다.

대귀족들끼리의 교류야 무어 이상하겠는가.

다만 최근 후작이 아끼는 정부가 누드화로 인해 곤욕을 치렀던 걸 모두가 안다는 게 문제였다. 대로변에 전시될 그림을 선별한 사람 중에는 카밀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카밀이 후작의 정부를 꾀어내려다 퇴짜를 맞고 앙심을 품은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리브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던 카밀의 모습을 증언해 줄 사람은 많았다.

디무스를 사모하는 말테 공작 영애와 후작의 정부를 노리던 카밀이 손을 잡는 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한낱 정부의 이름 따위는 관심도 얻지 못할 정도로, 높으신 귀족들의 이름이 뒤섞여 진흙탕을 만들었다.

물론 소문만 들끓게 하다가 끝낼 작정이었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디무스는 미완성 누드화를 빼돌려서 완성시킨 사람이 루지아라는 걸 알아냈고, 그 작업을 실행한 화가도 잡아 두었다.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재판은 수도에서 떠들썩하게 진행할 작정이었다. 수치를 모르는 말테 공작 영애를 재판장에 세우기 위한 준비도 진행 중이었다.

심지어 디무스에게는 과거 스테판의 보좌관으로 일하며 모아 두었던 은밀한 자료들이 있었다. 루지아가 얼마나 다양한 사내와 놀아났는지를 증명할 자료들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반목할 준비를 해 왔던 것처럼 일사천리로 이어지는 이 상황에, 디무스의 수하들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디무스가 그동안 부에르노에서 어떤 생활을 해 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주인님께서는 지금 평소와 행동이 다르십니다.”

“나를 우습게 본 작자들을 상대하는 일인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지?”

물론, 디무스 디트리언 후작은 싸움을 회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독선적이고 오만한 그는 세상의 모든 전투에서 늘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여기는 남자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바라는 결과를 만들어 냈고.

이번 일 역시 그의 심기를 크게 거스른 귀족들을 일거에 처리하려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디무스의 사적인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아 온 필립은 단지 그게 전부라고 여기지 않았다. 우선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서 소문을 생성하고, 요란한 가문들을 끌어들여서 이목을 분산시키는 이 모든 노고가.

차라리 그들 면전에서 총을 쏘고 불구로 만들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행동들은….

“그 어떤 귀족도 정부의 명예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지 않습니다.”

디무스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헛소리.”

“로이데스 양의 이름은 이제 부에르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주인님께서 던져 주신 덕분이지요. 평소라면 그러지 않으셨을 겁니다. 쉽게 소모하기에 말테도 엘레오노르도 가벼운 이름이 아니니까요.”

“그들이 내 것을 건드렸으니, 대가를 치르고 있을 뿐이지.”

“평소의 주인님이셨다면 그녀를 먼저 버리셨을 겁니다.”

디무스의 턱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필립은 그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인님께서는 충분히 그녀에게 과한 수고를 들이고 계십니다.”

필립이 말을 끝낸 직후, 술을 가지러 갔던 고용인들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야외 테이블 위로 술과 간단한 안줏거리가 준비되었다.

“이따 다시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차분하게 말한 필립이 고용인들을 이끌고 유리 온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필립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디무스가 짜증스럽게 술병을 집어 들었다. 가득 채운 잔을 만지작거리던 디무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먼저 버렸을 것이라고?

애초에 그는 그녀를 제대로 가지지도 못했다. 이 꼴을 보라지. 결과적으로 헛물만 켠 꼴이지 않나. 그런데 무슨, 가지지도 못한 것을 어떻게 버린다고….

그렇다면 그녀는 제 것이 아니었나.

처음부터 제 것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것인가.

술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리잔 표면에 금이 가며 파사삭, 하는 파열음이 났다.

술에 젖어 유난히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이 디무스의 손을 흠뻑 적셨다.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유리 조각에 손이 엉망으로 긁혔을 것이다.

다만 장갑이 통째로 흠뻑 젖어 버렸다.

아주, 더럽고 불쾌한 기분이었다.

…이 기분이 질척하고 끈적거리는 장갑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차림을 바꾸었다.

자크를 만났을 당시 남장을 하고 있던 걸 들켰으니 소용없겠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리브는 염색하고, 평범한 여행객 차림을 꾸몄다. 물론 기존에 사용하던 후드와 망토를 버리고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이제 리브와 코리다는 얼핏 보아선 남매와 같은 행색이 되었다.

기차면 수월할 여정을 마차만으로 움직이려니 시간이 배로 걸렸다. 그러나 리브는 방심하는 대신, 조금 고생하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쪽을 택했다.

혼자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코리다와 함께하는 여정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코리다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몸은 어때, 코… 콜린.”

아직 가명이 익숙하지 않다는 게 안타까운 일이지만, 계속 부르다 보면 익숙해질 테지.

리브의 물음에 코리다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안타깝게도 코리다의 말은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안색은 처음 부에르노를 출발할 때보다 훨씬 수척해졌고, 활기도 잦아들었다. 리브는 힐끗, 가방 쪽을 보았다.

부에르노에서 신약을 전부 받아 왔다고는 하나, 생각보다 길어지는 여정을 고려하면 애들린데에 도착하기 전에 신약을 더 구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도시를 거쳐야 했다. 수배자가 되지 않았다는 걸 확신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리브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최대한 빨리, 그리고 멀리 떠나자.

부에르노든 엘케든, 그들의 소식이 닿지 않을 정도로 먼 지역으로.

***

술 냄새로 가득 찬 유리 온실의 문이 열렸다. 디무스가 찰스의 보고를 듣기 위해 온실을 나선 까닭이었다.

“도미니안 의학 연구소에서 보내온 자료입니다.”

신약 납품 계약을 맺은 상단의 정보, 그리고 그들을 통해 신약이 유통되고 있는 도시의 정보. 전부 예민한 내용이었다. 이를 알아내기 위해 디무스는 그동안 묻어 두었던 과거의 인연을 모처럼 끌어모았다.

아니, 리브를 잡기 위해서 그는 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중이었다. 이제 와서는 그녀를 잡지 않고서는 절대 물러서지 못할 정도로 일을 벌였다.

수하들도 더는 디무스의 명령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를 말리기에는 너무 많은 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하루빨리 리브를 잡는 게 상황을 호전시키리라는 걸 모두가 내심 깨닫고 있었다.

“다행히 신약의 유통량이 많지 않아서 구매자 명단 정리도 비교적 빠르게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학교 쪽은?”

“아직 신학기가 시작될 시기가 아니라서 별다른 정보는 없습니다.”

디무스가 학교 이름이 나열된 서류를 쭉 훑어보는 동안, 찰스가 다른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이건 신약이 유통되는 도시 중 평민이 입학 가능한 학교가 위치한 도시만 따로 선별한 내용입니다.”

도시 이름을 확인한 디무스가 책상 위에 펼쳐 둔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하루가 멀다고 독한 술에 찌들어 있던 남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눈동자는 형형한 빛을 내고 있었다.

“직접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그러지 않으면?”

“…불면증이 다시 시작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디무스가 힐끗, 눈만 들어 찰스를 보았다.

“거트루드 박사가 약을 준비했습니다. 군에서 사용하시던 약입니다.”

“두고 가.”

찰스가 약통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디무스에게는 익숙한 약통이었다. 약통을 앞에 두니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과거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전쟁터를 구를 때처럼 독한 술기운에 기대고, 밤잠을 들지 못하고, 결국 약에 의지하는.

더는 피투성이의 인간이 죽어 가는 모습을 매일 지켜보거나, 그들의 비명과 신음을 들으며 밤을 지새우고, 후각이 마비될 정도로 독한 피 냄새에 절여지지 않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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