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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달리스크 (106)화 (106/138)

“어? 설마 했는데 진짜 맞네?”

건들거리는 태도며 질 낮은 웃음까지.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그러니까 이름이… 러브였나? 아니, 리브?”

카린 자작가에서 잠깐 일했던 시기에도 자크의 구제 불능인 성정을 엿보긴 했었는데, 몇 년 사이 그는 옛날보다 더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

자크가 카지노가 즐비한 엘케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것이야 이상해 보이지도 않았다. 도박에 인생을 낭비하는 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남자니까. 다만 그가 저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터라, 리브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마치 오랜 지인을 만난 사람처럼 반가워했다.

“이런 도시에서 만나다니, 의외인데?”

“저는 바빠서.”

친밀하게 인사를 나눌 사이가 아니었다. 리브는 자크를 둔 채 다급히 몸을 돌렸고, 그게 첫 번째 실수였다.

설마하니 그가 제 뒤를 그리도 끈덕지게 쫓아올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나.

코리다가 기다리고 있을 숙소로 곧장 가자니 자크가 쉽게 떨어져 나갈 기세가 아니라서, 리브는 괜히 복잡한 길목으로 돌아서 걸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두 번째 실수가 되어 버렸다. 낯선 도시에서 낯설 길을 헤매는 걸 자처했으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시간 좀 내 달라고.”

막다른 길목에 접어들자 자크가 느물거리며 접근했다.

옛날과 똑같았다. 카린 자작가에서 리브에게 추근거렸던 그때와.

그 당시의 자크는 어리고 성급한 데에 비해 생각이 짧았다. 그래서 한낮의 저택이라는 걸 의식하지 않고 섣부르게 손을 뻗었고, 마음만 앞서 리브를 짓누르던 자크의 행동은 쉽게 발각되었다.

당연히 리브를 어찌 해 보려던 그의 시도는 불발로 그쳤고, 그 사건을 알게 된 카린 자작 부인은 리브를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했다. 리브가 쫓겨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심지어 자작 부인은 제 아들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듯, 인접한 지역에 리브의 부정한 행실을 알렸다.

덕분에 리브는 새로운 일을 구하기는커녕 소문이 닿지 않은 지역을 찾아 멀리 이동해야 했다. 그때는 코리다의 건강이 지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나빴는데도.

“가까이 다가오면 후회할 겁니다.”

“하, 옛날보다 더 앙큼해졌네!”

리브의 딱딱한 태도에 자크는 도리어 좋아했다. 그러면서 카린 자작가에서의 일화를 추억이랍시고 떠들어 댔다. 그 일화마저 제대로 된 기억이 아니다 보니 나오는 대로 떠드는 것에 가까웠다.

한 마디로, 자 보려고 수작을 부렸다는 의미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 아쉬워. 뭐, 덕분에 이후부터는 실패하지 않도록 더 조심할 수 있었다지만 말이야.”

낄낄거리는 웃음이 징그럽고 소름 끼쳤다. 그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깨닫자마자 품에 숨겨 둔 총을 움켜쥔 건 거의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토끼는 못 잡아도 쥐새끼 정도는 내쫓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비록 이걸 쏜다고 해서 후작이 그녀를 구하러 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리브는 베리워스 저택의 사격장에서 배웠던 것들을 머릿속으로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자크는 리브의 가려진 손에 들려진 게 무엇인지 까맣게 모른 채 그녀를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는 범죄자로 신고당할 처지가 되었고.

그나마 총을 쏜 곳이 평소에도 치안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적이 드문 뒷골목이라서 도망칠 틈이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반쯤 혼이 나간 채로 숙소에 간신히 돌아온 리브는 곧장 코리다를 데리고 엘케를 떠났다. 다양한 사람이 오가는 엘케에는 다른 지역을 오가는 마차가 많아서 이동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가짜 신분증이라도 하나 만들어 두어야 하나….’

가짜 신분으로는 제 유일한 자랑거리인 학력을 내세울 수도 없을 테니, 훗날 직장을 구할 때 많은 난항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어깨를 늘어뜨린 리브가 털레털레 몸을 돌렸다. 일단 수배 전단이 붙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으니, 얼른 염색약과 몇 가지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돌아가야겠다.

***

엘레오노르에서 온 사람과 몇 번의 만남을 가지고, 말테에서 다급히 보내온 사람이 부에르노에 도착할 때까지도 리브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자크의 허벅지에 박아 넣은 피 묻은 총알을 끝으로 리브는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디무스는 그녀가 아마도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건대 리브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몸을 숨긴 상태였다. 그러지 않아도 작정하고 디무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는데 총으로 남을 해하기까지 했으니, 겁 많은 그녀가 오죽 더 몸을 사리겠는가.

디무스는 리브가 정착할 만한 도시를 선별하는 쪽으로 추적의 방향을 바꾸었다. 리브의 발목에 묶인 족쇄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가능한 선택이었다.

신약이 유통되면서 동시에 평민이 입학할 학교가 위치한 도시는 생각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무작정 해변에 모래알을 찾듯 나라 전역을 들쑤시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것이 디무스의 날카로워진 신경줄을 느슨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쨍그랑!

오늘도 무언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아침부터 울려 퍼졌다.

“생각 없으니까 치우라고 했잖아.”

나뒹구는 음식과 깨진 그릇들을, 고용인들이 황급히 치웠다. 한 발 떨어진 곳에 서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집사 필립이 침음을 삼켰다.

“간밤에 공기가 무척 차가웠습니다. 숙면하실 의향이 없으시다면, 식사라도 챙기시는 게….”

“쓸데없는 참견 집어치워, 필립.”

건조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필립의 말을 자른 디무스가 꼴 보기 싫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필립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디무스를 살폈다.

아무리 유리 온실이라고 해도 밤을 지새우기에는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디무스가 갑자기 이곳에 눌러앉았을 때, 필립은 기껏해야 몇 시간 정도가 될 거라고 생각했으나 정신 차리니 어느덧 이틀째였다.

온실에 오기 전 디무스가 빈번하게 머물렀던 장소는 저택의 지하실이었다. 리브가 사라진 뒤 디무스는 곧잘 저택의 지하실을 찾았다. 그리고 그가 지하실을 내려갈 때면 늘 무언가 부서지거나 깨지는 소음이 났다.

누구도 지하실을 멋대로 내려갈 수 없었으므로, 아래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동안 그렇게 뭘 하는지 모를 짓을 하던 디무스는 이틀 전 돌연 이 유리 온실을 찾았다.

식물을 보며 심신을 안정하려는 모양이라고, 다들 그렇게 이해했었다.

처음에는 말이다.

“차라도 내오겠습니다.”

“술을 가져와.”

“후작님….”

“네 주인이 누구지?”

수심 어린 표정으로 침묵하던 필립이 고용인들에게 눈짓했다. 몇몇 하인들이 후다닥 유리 온실을 빠져나갔다. 서늘한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디무스가 의자에 늘어지듯 몸을 기댔다. 밤새 잠을 자지 못했음을 증명하듯, 꺼칠한 안색이었다.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필립의 말에 디무스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당연한 소릴.”

평소라면 디무스의 중얼거림은 티끌의 의심도 못 할 만큼 명료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냉소적인 음성의 저변에 희미하게 깔린 초조함이 필립에게까지 전해졌다.

그것은 마치, 중독성 강한 연초나 술을 끊은 직후 나타나는 금단 증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몸을 돌보십시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잘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잘?”

필립의 말에 디무스가 곧장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보기 좋게 꾸미고 웃으며 맞이해 주라는 소린가? 감히 내게서 도망친 여자를?”

“물론 그녀는….”

“필립, 주인이 당한 모욕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닌가 싶군.”

“그렇다면 주인님께서는 모욕을 갚기 위해 그녀를 찾고 계신 겁니까?”

신랄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가려던 디무스가 멈칫했다. 잠을 못 자서 핏줄이 두드러지게 올라온 디무스의 사나운 눈을 덤덤하게 마주한 필립이 차분하게 말했다.

“심문실을 정리해 둘까요?”

디무스의 개인 전시실 말고도 저택 지하에는 다른 여러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딱히 사용해온 건 아니지만,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익숙한 몇 가지 방을 마련해둔 것이다. 심문실 역시 그런 용도였다.

그곳에 리브를 잡아넣는다면?

장담컨대 그 앙상하고 연약한 몸뚱이는 채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았던 날, 두드러지게 느껴지던 뼈의 윤곽이 떠오르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 몸으로 도망을 택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인가. 그나마 권총을 챙겨 갈 정신머리가 있었으니 다행이지.

“됐어.”

“아니면 현상금을 걸고 전역에 수배 전단을 뿌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디무스는 대답하지 않고 필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건만, 필립은 퍽 뻔뻔한 낯으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갔다.

“지금처럼 구구절절하고 은밀하게 협조를 요청하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고 손쉬울 겁니다. 물론 행적을 쫓기도 편할 테고요.”

“그걸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는데 어째서 행하지 않으십니까?”

다시금 디무스가 입을 다물었다. 필립은 그런 디무스를 가만히 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저택을 돌보는 집사입니다. 주인님께서 바깥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든 내부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요. 그러나 모든 상황을 맹목적인 믿음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필립은 근래 보여 준 디무스의 태도를 지적하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답지 않은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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