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05)화 (105/138)

조금 서늘한 기온과 공기 중을 은은하게 떠도는 특유의 냄새가 익숙하게 그의 감각을 사로잡았다.

지하실은 언제나처럼 완벽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모은 고가의 작품들이 저마다 최상의 상태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응시하는 디무스의 푸른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무감했다.

가까이에 놓인 백색 대리석 조각상의 매끄러운 살결과 생동감 넘치는 근육이 눈에 들어왔다. 디무스가 손을 뻗어 그 표면을 쓸어내렸다. 차갑고 딱딱했다.

이게 아니다.

그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조각상을 틀어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와장창!

거친 손길에 떠밀린 조각상이 넘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발치로 흩뿌려지는 날카로운 파편이 전시실을 어지럽혔다. 난장판이 된 바닥을 확인한 디무스가 눈을 들어 전시실 가장 안쪽 정면을 응시했다.

반쯤 고개를 돌린 여성의 누드화가 그를 비웃듯 고고하게 걸려 있었다.

***

유의미한 단서를 찾아냈다.

소식을 듣자마자 디무스는 직접 말에 올랐다. 랑제스 저택에 앉아 그의 수하들이 올리는 보고서를 기다리는 건 이제 한계였다. 온몸을 난자하는 감각에 시달리느라 어차피 느긋하게 앉아 있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가 전달받은 그 ‘유의미한 단서’라는 게 가만히 앉아서 글자로만 확인하기에는 제법 심상찮았다.

“이쪽입니다.”

수하들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엘케의 한 숙박업소였다. 화려한 카지노 불빛과 여흥을 즐기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한적한 방.

“흐으….”

문을 열자 고통스러운 신음성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방안의 그 누구도 신음을 흘리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안에는 디무스보다 먼저 와있던 티에리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장갑에 피를 묻힌 채로 의료 도구를 정리하던 티에리가 디무스를 발견하고는 철제 쟁반을 내밀었다.

“발견된 총알입니다.”

도르르. 점점이 핏자국을 남기며 쟁반 위를 구르는 총알이 디무스의 눈에 들어왔다. 로만이 낮은 목소리로 첨언했다.

“찾던 물건이 확실합니다.”

리브에게 쥐여 준 총은 디무스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가 제 무기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피 묻은 총알을 거리낌 없이 집어 든 그가 손안에 그것을 굴렸다.

기특하게도.

불시에 떠오른 생각과 함께 입가에 미소가 어른거렸다. 미친놈처럼 보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기이한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 총을 맞고 누운 저 남자가 과거 리브에게 추근거렸던 카린 자작가의 첫째라는 점이 그를 흡족하게 했다. 디무스는 당연히 루지아가 퍼뜨리려던 헛소문을 믿지 않았으나, 그와 별개로 한구석에 얼룩 같은 찜찜함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총알은 리브가 저놈에게 조금의 미련도 없음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물이었다.

다만 기쁨은 어디까지나 리브를 향한 것으로, 눈앞의 이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감정이었다.

“이자는 치료할까요?”

총알을 확인한 디무스가 침대로 시선을 옮겼다. 거칠게 헐떡이는 숨소리만 들어서는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중상자라고 착각할 법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남자는 꽤 멀끔한 몰골이었다. 허벅지가 피에 젖긴 했으나 그것이 남자의 목숨을 앗아 갈 정도로 심각한 부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물론 저대로 그냥 방치하면 다리 한쪽 정도는 잘라 내야 할 수도 있겠지만.

“깨워.”

“…솔직히 너무 시끄러운 놈이라 깨우고 싶진 않은데.”

못마땅한 어투로 중얼거리면서도 티에리는 착실하게 손을 움직였다. 라벨이 붙어 있지 않은 작은 약병을 꺼내 주사기를 채우는 손길이 아주 능숙했다.

그도 그럴 것이, 티에리는 디무스와 함께 전장을 굴렀던 군의관 출신이었다. 다른 군의관들과 다르게 조금 다양한 종류의 일을 하면서 손발을 맞춰 왔던.

디무스는 사람을 죽일 줄은 알아도, 살릴 줄은 몰랐다. 당연히 필요에 의해 ‘적당히’ 살려 두는 건 티에리의 몫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흐아아악!”

가차 없이 주사기를 찔러 넣자 오래 지나지 않아 남자가 눈을 떴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그는 눈을 뜨고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허우적거렸다. 티에리가 혀를 차며 물러났다.

“다, 당신들은 뭐야? 누구야?”

아픈 다리를 끌어안고 비루먹은 개처럼 낑낑거리던 남자가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침대를 둘러싼 이들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지? 병원인가?”

의료 기구들을 챙기고 있는 티에리를 발견한 남자의 눈에 희망이 스쳤다.

“자크 카린.”

자크의 시선이 디무스에게로 향했다. 그는 디무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디무스의 정체를 알아봐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그의 외모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디무스는 쥐고 있던 총알을 쟁반 위에 던지듯 돌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리브 로이데스와 마주쳤지?”

“그, 그년이 아직 체포 안 된 건가? 그거 잡아들여야 해! 완전 미친년이야!”

디무스의 얼굴을 보고 넋을 놓았던 자크가 흥분한 얼굴로 목청을 높였다.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흉악한 여자라고 소리를 높이는 게 어찌나 시끄러운지,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표정을 굳힐 정도였다.

땍땍거리는 소음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은 이는 디무스뿐이었다. 디무스는 자크의 말을 무시하며 붕대 감은 다리로 시선을 옮겼다.

총을 쏜 건 기특하지만, 죽이기 위해 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보다는 순간의 상황을 모면하려는 시도였으리라. 심지어 어지간한 상황도 아니었겠지.

“대뜸 총부터 쏠 성정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건 아마도, 자크가 리브의 총에 맞을 만한 짓을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디무스는 자크의 행적을 주기적으로 확인하라고 했을 뿐, 그를 감시하라고 명하지 않았다. 덕분에 디무스의 수하들은 자크가 총에 맞아 쓰러진 뒤에야 현장을 덮쳤다. 총을 쏜 당사자는 진즉 도망간 뒤였기에 일단 자크만 이렇게 빼돌렸고 말이다.

카지노가 넘쳐나는 도시라 뒷골목에서는 흉악 범죄가 빈번한 도시였다. 처음에 수하들은 자크가 흔한 강도질에 당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의식을 되찾은 자크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리브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 위험한 범죄자가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니,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지!”

따져 보면 자크의 상황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이곳까지 와서 도박과 유흥을 즐기는 놈이 도시의 치안 상태를 모를 리가 없는데, 호위도 없이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미친 짓을 자처하다니.

오히려 누군가를 끌고 한적한 뒷골목에라도 가서 어찌 해 보려 한 거라면 모를까.

“묻는 것에만 대답해.”

“당장 감옥에 처넣고… 크악!”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흥분해서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던 자크가 비명을 질렀다. 디무스의 손이 붕대에 감긴 허벅지를 가차 없이 짓누른 탓이었다.

붕대 위로 새빨간 핏물이 번져 갔다. 자크가 발버둥 치며 디무스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오히려 붕대는 핏물로 더 축축하게 젖어갔다.

“나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기회를 줄 때 조금이라도 쓸모를 증명해.”

“시끄러운 놈이라니까요.”

“커윽, 마, 말하겠습니다! 뭐든 말하겠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사지를 떨던 자크가 울면서 몸을 웅크렸다. 무심하던 디무스의 눈동자에 옅은 경멸이 스쳤다.

겨우 이 정도 아픔도 참지 못하는 놈이.

마음 같아선 시끄러운 혀를 뽑아 버리고 싶었지만, 충동적으로 굴 수는 없었다. 이놈은 리브와 마주쳤으니까. 눈알을 파내도 그가 본 것을 공유하는 일은 불가능하니, 직접 듣는 수밖에 없었다.

“리브 로이데스와 만난 순간부터 네놈이 총에 맞을 때까지, 전부.”

처리는 필요한 내용을 다 듣고 난 뒤에 하면 될 테니.

***

다행히도 수배 전단 같은 건 아직 돌지 않은 모양이다.

마을의 공용 알림판을 확인한 리브가 무심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급하게 마차를 빌려 엘케를 떠날 때만 해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이제야 조금 이성이 돌아왔다.

‘총을 쏘다니….’

리브는 제 품에 넣고 다니는, 총알이 하나 비어 있는 소형 권총을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기긴 했지만 정말로 이걸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았으면 자신이 화를 입었을 터였다. 리브가 무거운 걸음을 돌렸다.

‘앞으로 기차를 이용할 수 있을까.’

대체로 큰 기차역에는 상주하는 경관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총에 맞은 자크가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 분명 언제고 경찰청을 찾아가 리브를 신고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엘케 근방 도시들에는 리브의 수배지가 뿌려지겠지. 정말로 범죄자가 되어 도망가는 처지가 된 것이다.

“당분간은 마차를 이용해야겠어.”

기차보다 탑승감이 나쁘고 이동 거리가 짧다는 단점이 있긴 했다. 그러나 단속을 피해 경로를 유동적으로 바꿀 수 있으니 여차하면 한산한 마을을 경유하는 쪽으로 동선을 변경할 작정이었다. 코리다가 버텨 줄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한번 내어주는 게 나았을까.’

그랬으면 범죄자가 되는 꼴은 면할 수 있었을까.

잠깐이나마 생각이 들었으나, 곧 고개를 내저어 머릿속을 비웠다. 비록 자신이 후작과 수십 번을 뒹군 몸이라고 해도, 그런 망나니 같은 자식에게 아무렇지 않게 몸을 내어주고 싶진 않았다. 후작에게 한 짓이 창부와 같은 짓이었다고 한들,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런 짓을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빌어먹을 자크 카린. 이런 걸 두고 악연이라고 하는 걸까?

엘케에서 자크 카린을 만난 건, 리브에게 정말이지 불행한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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