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04)화 (104/138)

로이데스 자매가 도망칠 때 남장했다는 걸 알아낸 건, 카밀의 다섯 번째 가명을 알아내고 난 뒤였다. 카밀은 다섯 번째 가명을 사용해 자매의 치수에 맞는 남성복을 구매했던 것이다.

단지 옷만 갈아입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본격적인 도주였다. 그게 디무스의 화를 더 북돋웠다. 그녀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려 한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 것만 같아서.

“아르번 쪽에는 아직 별다른 연락이 없습니다.”

아르번은 카밀이 자매에게 끊어 준 기차표의 목적지였다. 표를 확인한 즉시 아르번으로 연락해 리브의 인상착의를 전달했으나 아직 이렇다 할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다.

디무스는 검지와 중지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침묵했다.

“아르번까지 가는 노선에 있는 역들은 어디까지 확인됐지?”

“방금 엘케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워낙 뜨내기들이 많이 거치는 도시라 시일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게다가 카지노를 찾는 손님들의 신분도 만만치 않아서, 경관들이 제대로 활동하지도 못합니다.”

빠르게 보고를 이어 가던 찰스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예민하게 곤두선 디무스의 얼굴을 확인한 찰스가 마른침을 삼킨 뒤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지금 엘케에 카린 자작가의 첫째 영식이 머무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어둡던 디무스의 눈빛이 이제는 숫제 얼음장처럼 돌변했다. 여전히 입술은 꾹 다물고 있었으나, 불거진 턱의 형태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사납게 이를 악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그자에게 사람을 붙이는 건….”

“‘몇 년 전 붙어먹었던 남자를 그리워하던 정부가 후작을 버리고 떠났다’고 말하는, 미친년의 헛소리를 내 수하가 믿을 줄은 몰랐는데.”

찰스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년’이라고 칭해진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자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헛소문을 퍼뜨리려다 덜미를 잡히고 디무스에게 ‘미친년’이라고 불리게 된 루지아는 지금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짓궂은 장난’이라고 표현했으나, 그 장난이 무엇인지 알게 된 디무스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떠올려 보자면 지금은 최대한 눈치껏 대답해야 했다.

“물론 믿지 않습니다.”

“그래, 그러니 그쪽으로 인력을 낭비할 필요도 없겠지.”

싸늘하게 대꾸한 디무스가 시가를 물었다. 그러나 이내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책상에 짓이겼다.

리브가 카린 자작가의 입주 가정 교사로 취직했던 건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그때 첫째를 유혹하려다 쫓겨났다는 게 대외적인 해고 사유였다. 그러나 대외적인 사유는 어디까지나 자작가의 입장이었고, 디무스가 보기에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적어도 그의 판단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가?

앙큼한 연기를 한 뒤 냉큼 도망가 버린 리브 로이데스다. 그녀가 정말 남몰래 자작가의 그 이름도 모르는 새끼를 마음에 품지 않았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자신을 그리 감쪽같이 속였는데.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상상을 하자 속이 뒤틀렸다. 카린 자작가의 첫째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 저 시가처럼 짓이겨 버리고 싶을 정도로.

“…사람을 붙이진 말고, 놈의 행적만 주기적으로 확인해 두라고 해.”

“네.”

리브가 사라진 지 채 일주일이 넘지 않았다. 그러나 디무스에게는 하루하루가 마치 1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까마득했다.

내일 당장 잡아들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기차를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 중 ‘자매’는 너무도 많았다. 그마저도 실은 자매가 아니라 형제를 찾았어야 했다는 걸 조금 뒤에 알아냈다.

이런 와중에 리브가 아르번으로 갔다는 것조차 확실치 않았다. 아르번으로 가지 않았다면 아르번행 기차가 정차하는 역 어딘가에서 하차했다는 의미일 텐데, 역을 특정하지 못하는 이상 무식하게 하나하나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너무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제대로 된 실마리 없이 무작정 뒤를 쫓기만 해서는 허탕만 치게 되리라.

관자놀이를 꾹 누르던 디무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돈, 약, 총.”

리브의 집을 전부 뒤엎은 결과, 디무스는 그녀가 그 세 가지를 챙겨서 도망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겨우 그걸 들고 얼마나 먼 곳을 가겠느냐고, 디무스는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돈, 약, 총….”

몇 번이나 세 개의 단어를 곱씹던 디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니까, 분명 부에르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한적한 시골로 숨어들지는 못하리라.

왜냐하면, 그녀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코리다 로이데스.”

완치되지 못한 여동생을 데리고 정착할 수 있는 도시. 심지어 그 여동생에게 필요한 약은 최근 유통되고 있는 신약이다.

그렇다면 새롭게 정착하려는 곳의 첫 번째 조건은 신약이 유통될 정도로 규모가 큰 도시겠지.

조건은 단지 그것뿐일까?

디무스는 리브가 태도를 돌변했던 시점을 떠올렸다. 창백한 얼굴로 서럽게 울었던 날.

“코리다의 미래를 결정하는 문제에서는 저를 배제하지 않으셨어야 해요.”

애지중지 아끼는 여동생이니 당연히 앞날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고민과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옛날에야 당장 목숨을 붙여 놓는 데에만 집중하느라 다른 걸 염두에 두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여동생의 병세가 나아졌고, 약만 잘 챙겨 먹으면 일반인처럼 생활할 수도 있었다.

“베렌에 평민이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몇 개지?”

“네?”

“알아 와.”

뜬금없는 디무스의 명령에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우물거리던 찰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그런 찰스의 뒷모습을 힐끔 본 아돌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디무스를 불렀다.

“후작님….”

“엘레오노르는?”

“…아직 신중합니다. 그쪽에서도 상황을 전부 파악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멍청한 것들. 말테를 믿으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보여 줘야 정신을 차리지.”

애초에 그들이 누구와 손을 잡고 있든 디무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 왔다. 이 모든 소동은 엘레오노르가 말테와 연을 맺고 좀 더 국제적인 정세에 발맞춰 움직이려다가 난 사달이 아니라, 카밀 엘레오노르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판단에 의한 후폭풍이었다. 그러나 디무스는 모든 게 그들의 정치적 판단 착오인 양 말하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디무스를 응시하던 아돌프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본격적으로 나설 생각이십니까?”

“본격적?”

“후작님께서 쥐고 계신 게 무엇인지 저들이 알게 되면, 이제까지의 생활이 전부 무의미해질 겁니다.”

“이 시골에 처박혀서 뭐 얼마나 대단한 생활을 했다고?”

잔뜩 비틀린 대꾸에 아돌프는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디무스는 그런 아돌프를 향해 짜증스럽게 손짓했다.

두 명의 보좌관을 내쫓은 디무스는 홀로 집무실에 남아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으로 리브를 본 게 바로 이곳이었다. 자연스레 그날의 리브가 떠올랐다.

웬일로 스스럼없이 안겨 든다 했지. 태연자약한 얼굴로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는 게 신기하다 싶었다.

만약 그녀가 적의 간자였고,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면 속절없이 제 목을 내어주게 되었으리라. 적진에서 그리 굴러온 디무스가 저지르기에는 정말이지 멍청한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처음부터 기어오르는 걸 그대로 놔두는 게 아니었는데. 주제 파악 같은 건 알아서 잘하는 여자라며 두고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 관계를 맺고 끊는 건 오직 디무스의 손에 달려 있다는 걸 알려 주었어야….

설마 카밀에게도 그런 식으로 몸을 밀어붙여 도움을 얻어 낸 건 아니겠지?

카밀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었던 시간이 뒹굴기에는 형편없이 짧다지만, 조루 새끼에게는 과분한 시간일 텐데?

게다가 꼭 끝까지 가지 않았더라도 방법은 많다. 그녀에게 굳이 옷을 벗지 않고도 성욕을 해결할 쉽고 빠른 방법이 있다는 걸 알려 준 게 바로 디무스였다.

생각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튀었다.

“씨발.”

기어이 참지 못한 욕설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카밀의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목을 끌어안거나, 앙상한 몸을 맞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살거리는 리브를 상상하자 겨우 되찾은 이성이 도로 휘발되었다.

굳이 깊은 관계까지 갈 필요도 없이, 그저 누군가의 앞에서 뺨을 붉히고 선 모습만 상상해도.

제 앞에서 보였던 그 모습 그대로 다른 사내의 앞에 섰으면, 혹은 앞으로 그럴 예정이라면.

책상 앞을 노려보던 디무스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곧 잡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되뇌어도 도통 이 울화가 잠재워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흉포하게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집무실을 나선 그가 향한 곳은, 마음을 안정시킬 때 늘 찾던 지하의 전시실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