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03)화 (103/138)

“애들린데 여학교는 언니가 옛날에 학교를 찾아볼 때 고민하던 후보 중 한 곳인데, 평판이 좋아. 과목도 다양하니까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약값도 모자라 학비까지 더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코리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리브는 그 걱정을 안다는 듯 먼저 말을 끊었다.

“부에르노에서 그간 큰돈을 벌었으니까 학비 걱정은 마.”

흥청망청 쓸 정도는 아니지만 씀씀이를 잘 조절하면 버틸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애들린데에 도착해서 적당한 직장을 구하면 될 것이다.

리브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아무리 후작이라고 해도, 베렌의 모든 도시를 전부 쥐잡듯 뒤지고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부에르노와 그 인근을 수색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겠는가. 애들린데는 부에르노와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였다.

후작은 곧 질릴 터다. 아무리 그가 리브의 몸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들, 도망친 여자 하나를 잡겠다고 수고롭게 나라 전역을 찾아 헤맬 까닭이 없었다. 그의 지하실에는 리브의 몸보다 훨씬 가치 있는 작품이 가득했다.

그러니 일단 애들린데까지만 무사히 가면 될 일인데….

“아… 경로가 이것뿐입니까?”

“네.”

난처한 눈으로 몇 개 되지 않는 경로를 보던 리브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섣부르게 기차에서 내린 걸까.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큰 도시에서 하차했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를 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리브는 제게 주어진 선택지를 신중하게 확인했다. 그나마도 출발 시간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고를 만한 경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던 리브가 마침내 표를 구매했다. 플랫폼에 들어서는 동안 자매를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인적이 드물고 적막한 기차역, 길게 뻗은 철로 위로 유독 황량한 바람이 스쳤다. 그리고 잠시 후, 철로 끄트머리에서 새까만 기차 머리가 어른어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상함을 느낀 건, 기차가 네 번째 역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간단한 요기라도 할 겸 식당칸에 앉아 있는 자매의 곁으로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도 시키지 않고 시끄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 하는 인간들이야?”

“탈옥수라도 탄 모양이지.”

“에이, 그게 말이 되나?”

성난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대화 내용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렇지, 사람을 다짜고짜 몰아세우면서 수색한단 말인가?”

“허, 참! 차림새를 보아하니 경관도 아닌 것 같았는데.”

빵을 뜯던 리브의 손길이 느려지다가, 경관이라는 단어가 나온 시점에서는 완전히 멈춰 버렸다. 코리다도 묘한 분위기를 느끼고서는 슬그머니 식기를 내려놓았다.

“언니.”

리브는 긴장한 얼굴을 한 코리다의 모자를 꾹 내리눌러 주었다. 다시 한번 후드를 다듬어 준 그녀가 제 모자를 눌러 쓴 뒤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들의 좌석은 옆 테이블 사람들이 지나온 방향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좌석으로 돌아가면 저들이 말하는 ‘경관이 아닌 것 같지만 탑승객들을 수색하고 다니는’ 이들과 마주칠 것이다.

그들이 후작과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반도 먹지 못한 음식을 그대로 둔 채, 리브는 코리다를 챙겨 기차의 선두로 향했다.

도망친 당일도 아니고, 며칠이 지났는데 후작이 기차를 수색하고 다닐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걸음은 금방 멈추었다. 기관실 바로 앞까지 도달한 까닭이었다. 더는 나아갈 곳이 없어서, 리브는 아쉬운 대로 내리는 문 앞 계단으로 코리다를 이끌었다.

“여기에 조금만 있자.”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언니. 차라리 솔직히 대화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지나온 복도를 초조하게 살피던 리브가 코리다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냉정하다는 분이 언니에게는 달랐잖아. 그러니까 만약 오해가 있다면….”

코리다는 아직도 낭만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듯했다. 그 허황한 상상에 굳이 면박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오해 같은 건 없어, 코리다.”

쓰게 웃은 리브가 창밖을 확인했다. 기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곧 역에 도착할 듯했다.

“그냥 이렇게 될 일이었어.”

리브가 서 있는 곳 맞은편 끝, 복도 너머가 시끄러웠다. 단순히 역에서 내릴 사람들로 분주해졌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고민하던 리브가 열차 문 앞에 바짝 섰다. 목적지에 한참 못 미친 상태였지만 별수 없었다.

이렇게 기차표를 또 낭비하게 되다니.

덜컹!

마침내 열차가 멈춰 섰다. 복도 끝의 문이 열린 것과 열차의 문이 열린 건 거의 동시였다. 리브는 복도 끝에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빠르게 하차했다.

다행스럽게도 저번과 달리 오늘 내린 역은 비교적 번잡하고 이용객이 많은 곳이었다. ‘엘케’라고 적힌 역 이름을 확인한 리브가 성큼성큼 개찰구로 향했다.

착각일까? 등 뒤가 조금 시끄러운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뒤를 돌아보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개찰구를 지나 바깥으로 나오자 여러 대의 마차가 선 게 보였다. 그 앞에서는 마부들이 경쟁하듯 호객을 하고 있었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요!”

“가장 큰 숙박업소로 가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숨을 고르던 리브가 창문을 통해 기차역의 입구 쪽을 힐끗 확인했다. 보이는 건 오가는 탑승객들뿐이었다. 리브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냥 과민 반응이었을까?

***

엘케는 생각보다 큰 도시였다. 그건 이 도시에 유명한 카지노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부는 ‘가장 큰 숙박업소’로 가 달라는 리브의 요청을 ‘가장 큰 카지노’로 가 달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사실 완전히 틀린 해석은 아니었다. 가장 큰 카지노에서 숙박을 겸하고 있었으니까.

뒤늦게 평범한 숙박업소로 가 달라고 다시 요청했으나, 마부는 리브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엘케의 모든 숙박업소는 크고 작은 카지노를 끼고 있노라고 알려 주었다.

자매가 생전 와볼 일이 없었던 카지노 거리에 발을 들이게 된 연유였다. 마음 같아서는 숙박이고 뭐고 그냥 도시를 떠나고 싶었지만, 조금 전 기차역에서 느낀 찜찜함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리브는 가장 관리가 잘되고 깨끗해 보이는 곳에서 하룻밤을 머무르기로 했다. 싸구려 도박장을 운영하는 곳보다는 규모가 큰 곳이 치안도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먹을 걸 사 올게. 기다리고 있어, 코리다.”

유흥 시설이 즐비한 거리에 코리다를 데리고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 리브는 홀로 방을 나섰다.

로비에는 간단하게 참여할 수 있는 룰렛이 놓여 있었다. 아마 게임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다양한 게임판들이 마련되어 있고, 로비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여흥 거리 정도로 꾸며진 듯했다.

북적이는 룰렛 앞을 슬쩍 본 리브가 걸음을 재촉해 그 옆을 지나치려 했다.

“부에르노 소식 들으셨어요?”

아마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랬으리라.

“아, 들었죠.”

“추기경님이 방문하신 기간에 그게 무슨 소란인지.”

“그래도 꽤 재미있잖아요. 그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가서 구경하는 건데.”

꺄르르 웃음을 터뜨린 부인들이 베팅 판에 돈을 걸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게요. 말테 공작 영애가 어쩐 일로 평화 순례단에 합류했나 싶었는데, 그런 사정이 있을 줄은 몰랐지 뭐예요.”

“그런데 도대체 그 후작이 얼마나 잘생겼기에 그러는 거래요?”

“모르죠. 하지만 궁금하긴 해요.”

빙글빙글 돌아가는 룰렛 위로 주사위가 도르르, 굴렀다.

“그럼 다음 여행은 부에르노로 가 볼까요?”

“오! 거긴 카지노는커녕, 그럴듯한 파티장 하나 없는 지루한 시골이라고요!”

“그건 너무 싫은데요?”

깔깔 웃으며 말하던 부인 중 한 사람이 낮게 탄성을 뱉었다.

“세상에, 맞췄어요!”

“오늘 운이 좋네요, 부인!”

화제가 금세 바뀌었다. 리브도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눌러쓴 후드 아래로 보이는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가 떠난 사이 이번에는 후작과 말테 공작 영애를 엮는 새로운 소문이 부에르노를 휩쓴 모양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었으나, 동시에 그런 걸 알아 무엇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두 사람이 엮인 소문이라면, 뭐. 뻔하지 않겠는가. 염문설이겠지. 둘은 본래 약혼 이야기가 오갔던 사이라고 했으니.

어쩌면 그 염문설은 도망친 정부에게 후작이 얼마나 금방 흥미를 잃었는지를 대변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리브가 부에르노를 떠난 지 겨우 며칠인데, 이렇게 금방 새로운 소문이 도시 밖까지 번질 정도라면 말이다.

커다란 입구를 지나치는 순간, 리브는 유리문에 비친 제 얼굴을 스치듯 보았다. 불투명한 유리 위에 비친 그녀는 어떻게든 남자 행세를 하기 위해 온몸을 몇 겹의 옷으로 둘둘 싸매고, 얼굴을 가리기 위해 모자며 후드며 푹 눌러쓰고 있었다.

당연히 그가 저를 쫓을 거라고 생각해서 더 필사적으로 변장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턱 아래로 바짝 끌어 올리고 있던 갑갑한 옷자락을 살짝 내려 느슨하게 만든 리브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후작에게 제 도망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유난스럽게 도망치는 게 저의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고.

그러니까 사실은 쫓기지도 않는데 홀로 쫓기는 우스운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거기까지 생각하던 리브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계속 생각을 이어 가다가는 정말 끝도 없는 우울감에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쫓기든, 쫓기지 않든 그녀는 코리다를 데리고 애들린데로 향할 것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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