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102)화 (102/138)

표에 적힌 목적지로 가던 도중 기차에서 내렸다.

카밀을 못 믿어서라기보다는 어쩐지 기차표대로 정직하게 움직이는 건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게다가 기차를 길게 탑승하기에는 코리다의 상태가 썩 좋지도 않았다.

기차에서 내린 뒤, 근방에 몇 없는 숙박업소 중 하나를 골라 가명으로 방을 빌렸다. 방에 들어서서 문을 잠그고 짐을 내려놓고서야 어깨의 뻐근함이 느껴졌다. 리브는 그제야 자신이 시종일관 긴장으로 굳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언니.”

“아, 코리다. 많이 피곤하지? 좀 쉬어.”

“나보다 언니가 더 먼저 쓰러질 것 같은데….”

코리다의 지적대로였다. 리브의 얼굴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창백하고 버석버석했다. 온종일 불안감을 안고 주변을 살피느라 눈 밑이 거뭇했고, 물 한 모금 편히 마시지 못한 까닭에 입술도 메말라 있었다.

“언니는 괜찮으니까 일단 쉬고….”

“후작님과의 관계가 안 좋아진 거야? 그래서 이렇게 도망쳐야 하는 거야?”

가방을 열고 짐을 확인하려던 리브가 멈칫했다. 그러지 않아도 코리다에게는 이 상황을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스러운 참이었다.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는 코리다에게 이렇게 죄인처럼 도망가야 하는 처지를 이해시키기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저하던 리브가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처음부터 그분과는 별다른 관계가 아니었어.”

마침 열린 가방 안에 단단히 묶어 둔 돈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후작의 앞에서 옷을 벗은 대가로 받은 돈이었다.

그래, 그와의 시작은 이 돈이었다. 그는 리브의 몸을, 리브는 그의 돈을 바란 철저한 계약 관계. 리브는 그러한 사실을 처음부터 단단히 인지해 왔었다.

어쩌면 이 모든 걸 망친 건 바로 그녀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리브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제 욕심이, 주제도 모르고 키운 마음이 적정 거리를 망각하게 만들었다고. 모든 걸 망쳐 버렸다고.

“하지만 언니는 그분을 좋아했잖아.”

“아니야.”

“그분과 만나는 날이면 언니가 얼마나 설레했는지 기억해.”

“그러지 않았어.”

코리다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한 리브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리한 일정으로 인해 코리다는 제법 지쳐 보였다. 그러나 꾹 다문 입술이나 명료한 눈빛은 적어도 리브보다 훨씬 생기 있었다.

“언니, 내가 언니를 보아 온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확신 가득한 코리다의 모습에 리브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헌팅캡에 후드까지 눌러 쓰느라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강 쓸어 올린 리브가 빠른 어조로 말했다.

“그분은 네 치료 문제로 뵙던 분이야. 치료를 마무리하지 못하게 된 건 아쉽지만… 이제는 병명이 뭔지 알게 되었으니까 대처할 수 있겠지.”

“내 치료의 문제가 아니야, 언니. 언니가 이상하다고!”

코리다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분도 언니에게 마음이 있으신 거 아니었어?”

“코리다.”

“분명 언니를 좋아하시는 거라고 생각했어.”

후원 관계라고 둘러대긴 했으나 집에 쌓여 가던 선물 더미, 리브의 잦은 외출과 외박을 떠올려 보자면 코리다가 저렇게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리브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분은, 나와 그런 관계가 될 이유가 전혀 없으신 분이야.”

“설마 또 나 때문에….”

“아니라고!”

기어이 언성이 높아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코리다를 본 리브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치민 감정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잿더미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가슴속에 희미한 불씨가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리브 자신도 알아채지 못했던, 어떠한 울분이었다.

바깥으로 터뜨리지 못해서 꼭꼭 쌓아 두고만 있었던 감정.

“네 말대로 내가 그분을….”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달싹이던 리브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리브 로이데스.

“그래, 그랬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애초에… 처음부터 가당찮았지.”

한평생 처음 가져본 욕심의 대상이 하필이면 넘보아선 안 될 사람이라니. 주제도 모르고.

“너도 그의 곁을 평생 지킬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거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지 않나. 진심으로 후작과 어떤 먼 미래를 기대했다는 걸 루지아에게, 혹은 누구에게라도 들켰다면 제 마음은 더욱 진흙탕을 구르며 조롱받았을 텐데.

“언니는 쉴게. 조금 피곤하네.”

기대를 배반당하고 초라하게 시든 속내를 아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 참 다행이다.

***

“오, 저런. 불쌍한 일이네요.”

나른한 음성으로 대꾸한 루지아가 부채를 팔랑거렸다. 둘러앉은 이들 중 한 사람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쩌다 그런 여자와 얽히게 되어서….”

“어디로 도망갔는지는 모른대요?”

“오가는 사람도 많은 와중이니 찾기가 쉽겠나요?”

디트리언 후작의 정부가 도망을 쳤고, 분노한 후작이 경관들까지 동원해서 도시를 뒤지고 있다는 사실은 상류층 사람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은밀하게 퍼졌다.

물론 디무스가 대놓고 움직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누드화를 내건 뒤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루지아가 디무스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소문을 흘린 결과였다.

“과거가 꽤 문란했다면서요. 다른 사내와 배라도 맞아서 도망친 거 아닌가요?”

루지아가 새침한 어조로 말하자 또 다른 영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트리언 후작님을 두고 다른 사내요?”

“혹 모르죠. 옛정을 잊지 못했는지도. 본래 몸 정이 무섭다잖아요.”

“그 대단한 후작님도 별수 없으시네요.”

시큰둥함을 가장했으나, 말미에 묻어나는 옅은 조소를 숨기진 못했다. 루지아의 말에 영애와 부인들이 탄식했다. 루지아가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사실 리브가 그렇게 대번에 도망가 버릴 줄은 미처 몰랐는데, 그 덕분에 상황이 훨씬 재미있어졌다.

추문은 자극적일수록 빠르게 퍼지는 법이었다. 이제 디무스 디트리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오물을 뒤집어쓴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었다. 더는 전처럼 고고한 척 굴며 살진 못하겠지.

“하필 추기경께서 방문하신 신성한 기간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경건해야 할 기간에 소란을 일으켰으니 죄를 물어 마땅하지 않나 싶어요. 토르스텐이었으면 절대 좌시하지 않았을 텐데, 베렌은 아닌가요?”

루지아가 곁에 앉은 영애를 돌아보며 물었다. 루지아의 지목을 받은 영애가 난감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정부가 도망간 것만 두고 보면 그저 귀를 즐겁게 할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루지아가 지적하자, 몇몇 이들은 이걸 그냥 사적인 추문으로 치부하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귀족이 한낱 정부에게 놀아난 모습을 보이는 건 확실히 좋지 않죠. 하물며 후작님이 그리 아끼는 모습을 보이셨는데.”

“본인의 정부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건 후작님의 실수지만, 그분이라고 이런 결과를 바라셨겠어요? 그러니 감히 귀족을 능멸하고 기만한 그 문란한 여자를 그냥 두어선 안 될 일이죠. 좁은 도시라 다른 천한 자들이 금방 배울까 두렵네요.”

“지인들께 말이라도 해 두는 게 좋겠어요. 다른 곳에서 또 분란을 일으키지 않게 미리 단속해야죠.”

수군거리는 영애와 부인들을 느긋하게 보던 루지아가 태연하게 차를 마셨다. 그 정부가 디무스에게 잡히지 않아야 할 텐데. 하지만 그녀가 디무스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도망갈 능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 정부가 옛 남자와 함께 있는 꼴이 목격된다면, 디무스도 더욱 우스운 꼴로 추락할 텐데 말이다. 도망친 정부가 옛 남자에게 의탁하는 사연 한 줄 정도 추가해 봐야 딱히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그 정부가 옛날에 꾀어냈던 남자가 그러니까… 카린 자작가의 장남이라고 했던가?

마침 작위도 하찮은 게 디무스의 자존심을 뭉개 버리기에도 참으로 적합하질 않나.

루지아가 화사하게 웃었다.

***

리브가 머물던 여관을 나선 건 며칠이 지난 후였다.

코리다에게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며칠간 행여 누군가 그들을 잡으러 오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바깥을 살핀 리브는 생각보다 조용한 거리 풍경을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그러나 남장을 풀진 않았다. 부에르노에서 완전히 멀어졌다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과도한 경계심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후작의 분노가 하루 이틀 만에 잠들진 않을 터였다. 그는 오만한 남자이니까. 당분간은 조용히 몸을 사리는 편이 좋으리라.

“애들린데에 가면 어떨까 싶어.”

“애들린데?”

여관에 머무르는 동안 리브는 다시 정착해야 할 곳을 찾아 지도를 한참 뒤적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 도시를 골랐다.

“왜 애들린데야?”

“일단 도시 규모가 크니까 상권도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을 테고, 일자리도 많을 거야.”

코리다의 건강이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은 이상, 신약이 유통될 정도의 규모를 가진 도시를 찾는 건 필수였다. 거기에 리브도 새롭게 직장을 구해야 하는데, 좁은 지역보다는 적당히 큰 도시가 묻혀서 살기 좋을 테고.

무엇보다….

“그리고 여기엔 여학교가 있어.”

“학교?”

“그래. 유학을 결정하기 전에, 학교 먼저 다니면서 신중하게 생각해 보자. 어쩌면 다른 공부가 하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 이것저것 경험해 보고 난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아.”

“아….”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코리다가 복잡미묘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 코리다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리브가 조용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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