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98)화 (98/138)

“내가 협조할 생각이 없는데.”

“…설사 그렇다 해도 이렇게 지내는 건 보기 좋지 않구나.”

칼리오페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 역시 부에르노 곳곳을 돌아다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도시에 떠도는 디무스의 소문을 들은 듯했다.

“다른 방탕한 귀족들처럼 정부를 끼고 사치를 일삼는 생활은….”

불쾌하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칼리오페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건 마치 아까 넓은 예배당에서 엄숙한 목소리로 축복의 기도를 읊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디무스가 무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이제 고해성사를 할 시간인가.”

“이렇게 지내라고 쥐여 준 것들이 아니다.”

쥐여 주었다고? 지금 디무스가 쥐고 있는 것, 그게 돈이든 허울뿐인 작위든 누군가 ‘쥐여 준’ 게 아니었다. 단지 손해를 배상받은 것에 불과하지. 그러므로 디무스는 칼리오페 추기경에게 조금의 부채감도 느끼지 않았다. 미성년자 시절의 후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 아랫도리를 함부로 놀린 대가로 뒷수습한 것뿐인데, 디무스가 감사하게 여길 연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추기경은 단지 누군가 알아채기 전에 먼저 나서서 자신의 약점을 본인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을 뿐이다.

그런 주제에 깊은 뜻이라도 있었던 양 거드름을 피우고 있으니 기가 찰 수밖에.

“시기를 기다리고, 인내하라는 의미에서 준 것들이지.”

“무슨 ‘시기’ 말입니까.”

디무스의 눈에 비웃음이 서렸다.

“당신이 그라티아가 된다고 한들, 당신의 아들이 당당해지는 일은 영원히 없을 텐데.”

성직자의 순결 서약은 신성하고도 고결하다. 전 세계 신도들에게 사랑받는 칼리오페 추기경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치부를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디무스의 혈관에 흐르는 피는 평생에 걸쳐 부정당하리라.

“신의 앞에서 한낱 핏줄은 무의미한 법. 그런 게 아니어도 충분히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손가락 사이로 시가를 굴리던 디무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어쩔 수 없는 지루함과 짜증이 피어올랐다.

실은, 아침부터 그랬다. 어쩐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아마도 리브를 며칠 보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았다. 부르지 말라기에 그러마 하긴 했는데, 이렇게 급격하게 신경이 곤두서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왜 지금은 내 삶이 영광스럽지 않으냐고 묻는 것인데….”

빈정거리던 것조차 귀찮아진 디무스가 냉담한 얼굴로 혀를 찼다.

“추기경께서는 귀가 아주 어두우시군요. 아니면 노화로 인해 이해력이 저하되셨나.”

“야망이 큰 아이라고 여겼거늘.”

“큽니다.”

무신경한 어투로 짤막하게 대꾸한 디무스가 시가를 다시 한번 빨아들였다.

“실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기보다 더 당신을 닮았으니.”

안타깝게도 재떨이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미적지근하게 식은 차가 담겨 있는 찻잔뿐이었다.

“말테라면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을 테니, 찢어 버린 청혼서 조각을 이어 붙여 보겠다고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테판 지그힐트는 겁쟁이라, 자기 약혼녀를 상대할 때에도 흠이 잡힐까 봐 벌벌 떨었다. 그는 정말이지 형편없는 놈이었다. 패기만 놓고 따지자면 차라리 루지아가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저 가진 것이라고는 열패감과 열등감 같은 한심한 감정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많은 뒷조사를 통해 위안을 얻으려 했다. 말테도 당연히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일은 전부 디무스의 몫이었다.

이는 스테판의 이름을 앞세워 실행한 각종 뒷거래가 전부 디무스의 차지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빈손으로 제대하지 않았습니다.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많았던 터라.”

“…얼마나 말이냐?”

“궁금하십니까?”

디무스가 삐뚜름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칼리오페 추기경은 점잖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한순간 그의 눈빛이 빛나는 걸 디무스는 똑똑히 보았다.

제대할 때의 몰골이 패배한 개새끼였으니, 정말로 무력하게 숨어 살았다고 믿었던 모양이었다. 디무스의 피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절대 그렇게 당하고만 있진 않았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텐데.

디무스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감정을 털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건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나에게 관심을 끊으면 되는 일입니다.”

시가를 찻잔에 툭 던져 넣었다. 그러지 않아도 거의 마시지 않아서 가득 차 있던 찻잔에 굵은 시가가 잠기자 찻물이 넘쳐흘렀다.

“아주 쉽고 간단한 원리이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재가 떠다니는 찻물이 흥건하게 테이블을 적셨다. 그것을 힐끗, 확인한 디무스는 무심코 생각했다.

아무래도 제 상태 또한 저 잿물과 다를 바 없이 한계치를 넘어선 듯하다고. 리브는 저를 부르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그게 그녀를 보지 못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고.

그러니 당장 그녀를 보러 가야겠다고 말이다.

추기경과의 대화를 마치고 리브의 집 앞에 도착했을 즈음 하늘은 노을빛이었다.

며칠간의 보고에 따르면 외출한 리브와 코리다가 곧 귀가할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단정하고 아담한 집을 응시하던 디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간질거렸다. 리브를 그저 눈으로만 보고 만족하던 게 전부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당장 그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고, 여린 음부를 헤집고 싶었다. 제 흉측한 몸을 귀하게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싶었다.

저택으로 데려가지 못하더라도, 마차에서 급한 사정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디무스는 리브가 어떤 얼굴로 저를 맞이할지 상상해 보았다.

그녀의 집에서 일을 치르자고 하면 질겁하며 마차에 오르겠지. 저런 작은 집구석에서는 소리를 숨길 수 없을 테니까. 여동생에게 신음을 들려줄 수 없다며 도리질 치는 리브를 떠올리기란 쉬웠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려 노력하면서도 붉어진 목덜미를 가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아니, 혹은 반대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몸을 섞었을 때 리브는 상상 이상으로 적극적이고 요사스러웠다. 흡사 베갯머리송사를 하는 코르티잔과도 같았다. 평생 침대 위에서는 목석처럼 뚝딱거리기만 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와 비슷하게 목을 휘감아 올지도 몰랐다.

저도 그리웠다며, 흉터를 만지고 싶었다며, 보고 싶었다고….

수줍게 속삭이든, 간드러지게 속살거리든.

어느 쪽이든 좋을 것 같다. 리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웠다. 그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를 고귀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녀의 신인 이상, 그녀가 저를 신처럼 여기는 이상.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사이 날은 완연하게 어두워졌다. 거리를 밝히는 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자리 잡은 근방의 다른 집 창문에서 불빛이 밝혀졌다.

어둠이 내려앉는 거리, 아직도 리브의 집만 고요했다.

대수롭지 않게 앉아서 기다리던 디무스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귀가가 너무 늦다.

리브는 어두운 거리를 두려워해서 늘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귀가했다. 코리다와의 외출이 시작되고부터는 더 일찍 귀가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 시간이면 벌써 귀가를 하고도 남아야 했는데.

“…주인님?”

후작이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석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식 알아봐.”

짤막하게 명령한 후작이 리브의 집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두운 와중에 불도 안 켜져 있어서 그런지, 괜스레 더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잠긴 문을 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구를 사용할 필요도 없이 힘으로 몇 번 밀어붙이자 문고리는 쉽게 부서졌다. 주인이 없는 집에 성큼성큼 들어선 디무스가 쭉, 내부를 둘러보았다.

거실은 곳곳에 놓인 상자들로 인해 번잡스러웠다. 전부 디무스가 리브에게 보냈던 선물들이었다.

디무스는 가까이에 놓인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손대지 않은 드레스가 곱게 접힌 채로 그대로 들어 있었다.

“…….”

발끝을 타고 냉기가 기어올라 오는 듯했다.

집 안 내부의 초와 램프에 불을 밝힌 뒤 느릿느릿 거실을 가로지른 디무스가 차근차근 남은 문들을 열었다. 공기가 서늘한 걸 빼면, 대체로 집 내부는 생활감이 넘쳤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미묘하게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방을 하나하나 둘러보던 디무스가 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리브의 방이었다. 익숙한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리브의 방은 그녀를 닮아 무척 단정하고 깔끔했다. 필요한 가구와 물건들만 갖추어 둔 것 같았다. 문가에 서서 그 풍경을 우두커니 응시하던 디무스가 가까이 보이는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가장 위에 있는 서랍 하나를 열자, 눈에 익은 상자가 나왔다.

디무스가 주었던 장신구 상자였다.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걸이가 들어 있는. 그 옆에는 다른 장신구들도 있었다. 전부 디무스가 선물한 것들이었다.

디무스가 준 것‘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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