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94)화 (94/138)

“그림은 치웠을 겁니다. 애초에 합의되지 않은 작품이었는데 오늘 갑자기 추가되었다더군요.”

“그렇군요.”

“그림을 출품한 사람도 찾아보고 있습니다. 아마 디트리언 후작도 지금쯤 소식을 들었을 테고, 가만히 있진 않을 겁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감당하지 못할 짓을 했어요.”

“그런가요?”

“…선생님, 정말 괜찮은 거 맞으세요?”

허공에 아무렇게나 시선을 두고 있던 리브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네, 괜찮아요.”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조금도 문제가 없는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카밀의 얼굴은 도리어 어둡게 가라앉았다.

창고 문 쪽을 힐끗 본 카밀이 잠시 주저하다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혹시 아까 그림을 제대로 보지 못하셨나요?”

“말씀하시는 게 누드화라면, 봤어요.”

말문이 막힌 듯, 카밀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카밀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리브가 덤덤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직원을 부른 게 마르셀 선생님이시죠? 그림을 철거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복잡미묘한 얼굴로 침묵하던 카밀이 마른세수를 했다.

“…외부 전시에 사용될 작품을 선별할 때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오늘 전시 시작이라고 해서, 확인차 왔다가 발견하고 바로 직원들을 부른 거고요. 좀 더 빨리 치웠어야 했는데….”

그는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자책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고맙다면 고마울 반응이었다. 그리고 조금 우습기도 했다.

묘한 눈으로 카밀을 바라보던 리브가 문 쪽을 돌아보았다.

지금쯤이면 후작도 자신이 카밀과 함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까? 어울리지 말라고 했었는데, 소식을 들으면 틀림없이 화를 내겠지. 그런데 그림 소식도 함께 전해 들었을 텐데, 그렇다면 두 배로 화를 내려나.

아니, 그런데. 그가 화를 낸다고 해서 저 바깥의 수군거림이 사라지기라도 하나?

“요즘 사교계에서 제 이야기가 많죠?”

리브가 여상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자, 카밀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리브와 눈이 마주치고선 흠칫 놀라 굳었다.

“마르셀 선생님은 가십에 밝으시잖아요. 그러니 아시겠죠.”

“그건….”

카밀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태도가 오히려 그 무엇보다 확실한 답변이 되는 줄도 모르고.

“오늘이 지나면 더 유명해지겠네요.”

후작의 뜻대로 이제 자신은 얌전히 집에 틀어박혀 예쁘장한 조각상 노릇이나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리브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수치스러운 소문이 돌아 리브가 고립되면, 후작은 누구보다 그걸 기꺼워할 것 같았다.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사실 후작이 꾸민 게 아닐까? 그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처럼 느껴졌다.

저를 가둬 두고 싶다고 했던가?

하지만 가두고 실컷 예뻐하다가 흥미가 식으면 어쩔 텐가? 관심을 잃은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배려를 거두어 갈 것이다. 그럼 그녀는 차가운 지하실에 덩그러니 남겨져 언제 열릴지 모르는 문이나 하염없이 쳐다보겠지.

그러다가 후작이 정말, 말테 공작 영애의 말대로 이 시골 생활을 전부 청산하고 제 명예를 찾아 떠나기라도 한다면?

초라하게 버려진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디트리언 후작님과 말테 공작 영애는 무슨 관계인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표정을 짓던 카밀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한때 약혼 이야기가 오갔던 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애정에 기반을 뒀다기보다는 정략적인 관계에 가깝겠죠. 아무래도 후작은 칼리오페 추기경과도 연관된 듯하거든요.”

말테 공작 영애도 모자라 칼리오페 추기경까지.

대단하신 이름들이 아무렇게 언급되니 도리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저렇게 대단한 사람들과 얽혀 있어서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던 모양이라는 감상 정도나 들 뿐.

하기야,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던가. 교류도 눈높이가 같아야 가능한 것이라고.

얼마나 험하게 살아서 몸에 그런 흉터를 짊어졌는지 몰라도, 그는 결국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고고하게 피어 있는 장미였던 것이다. 그리고 저는, 그 장미를 어떻게든 한번 만져 보겠다고 무리하게 손을 뻗다가 가시덤불 위를 뒹굴게 된 멍청이이고.

“저 방금 펜던스 남작가에서 해고당했어요.”

“아…. 유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라고 하셨죠.”

리브는 눈을 크게 뜬 카밀을 똑바로 응시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염치없지만 도움을 청해도 될까요?”

미안해, 코리다.

네가 완치할 때까지 버티려고 했는데, 못 하겠어.

***

레스토랑에서 나눈 대화 이후 리브와의 관계가 달라졌다.

겉으로는 달라진 게 없어 보였지만 디무스는 미세한 변화를 본능적으로 느꼈다. 다만 무어라 트집 잡기도 어려워서 두고 볼 수밖에 없을 뿐.

그런 와중 매일 들려오는 칼리오페 추기경의 소식 또한 그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사방에서 추기경을 칭송하는 목소리, 무료 봉사를 한답시고 며칠째 부에르노 곳곳을 누비는 추기경의 존재, 곧 있을 추기경과의 만남. 모든 게 짜증 났다.

이런 상황에서 일이 터졌으니, 곱게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퍼억!

정강이를 걷어차인 로만이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아 냈다. 휘청거리는 몸을 얼른 추스른 그가 부동자세로 섰다. 그러나 곧장 날아온 발길질에 다시 한번 채여 비틀거렸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라서인지, 로만은 디무스의 분노를 묵묵히 감내했다. 물론 그가 감내한다고 하여 디무스의 분노가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로만에게 당장의 분풀이를 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디무스가 이를 갈며 명령했다.

“당장 이 짓거리를 한 인간들을 전부 찾아내.”

“알겠습니다.”

로만이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창백한 안색으로 한쪽에 서 있던 아돌프가 재빨리 로만을 데리고 집무실을 나갔다.

범인을 찾아내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보복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일이 터지고 뒤늦게 수습하는 게 디무스의 방식이 아닐 뿐.

처음부터 그림을 랑제스 저택으로 가져오라고 해야 했나.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의자에 앉은 디무스가 신경질적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의 시선이 옆쪽에 가져다 둔 이젤로 향했다.

이젤 위에는 브레드가 시작하고 누군지 모를 화가가 완성한 형편없는 졸작이 걸려 있었다. 추악한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림이었다.

미완성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저 누드모델은 리브였다. 그래서 그 위에 덧칠된 천박한 요소가 불쾌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주인님, 로이데스 양이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필립의 음성이 들려왔다.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음에도 문이 열리고, 리브가 조용히 집무실에 들어섰다.

디무스에게 다가오던 그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림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조금 전까지 야외 전시장에 있었는데.”

혼잣말 같은 리브의 중얼거림에 디무스가 비로소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림을 응시하고 있는 리브의 얼굴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저 차분함은, 이미 그림을 한번 본 뒤이기 때문인가?

야외 전시장에서 리브를 빼낸 게 카밀이라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전시 작품을 검수한 당사자라서 그 자리에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검수를 어떻게 했기에 저런 쓰레기 같은 게 내걸린단 말인가.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놈이었다.

“선생이 내가 보낸 마차를 타고 왔으면 저 그림보다 빨리 도착했겠지.”

“마르셀 선생님께 도움을 받게 되어서, 그분께 감사 인사를 하느라 늦었어요. 전해 듣지 않으셨나요?”

물론 전해 들었다. 덕분에 로만이 두들겨 맞는 시간이 더 길어졌고.

대체 무슨 감사 인사를 했는지 몰라도 굳이 대화가 길어질 까닭이 있나. 못마땅했으나 당장 충격을 받았을 리브를 굳이 다그치지는 않기로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별개로, 이번만큼은 카밀의 발 빠른 대처가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하고 말이다.

“…연관된 자들은 금방 잡아들일 수 있을 거야.”

“네.”

“법정에 세워야 하니 저 쓰레기를 당장 태울 수는 없네.”

“법정이요?”

“공개적으로 짓밟아야 다른 인간들이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을 테니까.”

디무스는 폭력적인 해결 방법을 꺼리지 않으나, 가끔은 대상을 사회적으로 말살하는 쪽이 더 효과가 좋다는 걸 알았다. 지금과 같은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렇다고 한들 저 그림을 본 사람들의 기억을 전부 지울 수는 없어요.”

“경고는 되겠지.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선생은 당분간 외출하지 마.”

“…그런데 저 그림은 원래 후작님의 저택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어쩌다 유출되었을까요?”

순간 말문이 막힌 디무스가 입을 다물었다. 아랫사람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무능한 주인이 된 기분이었다. 딱히 틀린 사실도 아니었다.

겨우 진정되었던 속이 다시 화로 들끓었다.

그간 너무 나태하게 지냈던 게 패착이었을까. 옛날과 달리 지금은 굳이 고용인들을 빡빡하게 단속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어서, 적당히 느슨하게 살아온 게 문제였던 것 같다.

“일부러 외부에 내보이신 건 아니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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