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으로 인해 부에르노는 연일 떠들썩했지만, 리브의 집은 조용했다.
레스토랑에서의 가벼운 의견 충돌 이후로도 후작과의 관계는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여전히 리브를 자주 불렀고, 그녀의 몸을 탐했으며, 그녀에게 종종 외박을 종용했다.
다만 후작이 따로 언질했는지, 아돌프와 코리다가 따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이제 없었다. 굳이 리브가 보지 않는 곳에서 코리다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코리다의 반응을 보면… 아니, 어쩌면 달라진 게 없음에도 코리다가 리브의 앞에서 말을 조심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코리다도 어떤 말이 리브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테니까.
큰 틀에서 보자면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리브는 더는 무엇도 믿을 수 없었다. 전처럼 제 인생에 엄청난 행운이 나타났다는 우스꽝스러운 망상을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제 후작의 관심을 잡아 두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그의 눈치를 보지 않았고, 그에 관해 무언가 더 알고 싶어서 머리를 굴리지도 않았다.
대신 후작이 그녀에게 바라는 순종적인 태도만 유지했다. 어째서인지 후작은 그런 리브의 태도를 영 마뜩잖아했는데, 그녀로서는 그저 의아한 일이었다. 화초 같은 모습을 바란 건 다름 아닌 그였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리브의 온 신경은 그저 코리다의 건강에만 집중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신약이 코리다의 몸에 잘 맞아서, 이젠 다쳐도 피가 철철 흐르지 않았다. 게다가 살이 오르고 포동포동해져 겉으로 보기에도 퍽 건강해진 상태였다.
아쉬운 게 있다면 코리다를 데리고 외출하지 못한다는 점이랄까? 아직도 바깥에서는 리브에 관한 말이 떠돌고 있으니 차마 함께 외출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추기경이 방문하면 좀 나아질까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리브에 관한 가십은 별개로 취급되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 증거로, 리브는 지금 펜던스 남작 부인의 심각한 얼굴을 마주하는 중이고.
“오랜만이네요, 로이데스 선생.”
이곳은 부에르노의 어느 고급 커피 하우스의 개인실이었다. 남작 부인이 일방적으로 예약한 가게였는데, 장소만 보아도 리브와의 만남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 역력했다.
“네. 오랜만에 뵙네요. 그런데 부인께서는 최근 방문한 손님들 때문에 바쁘시지 않나요? 연락 주셨으면 제가 저택을 찾았을 텐데요.”
리브의 단정한 말에 펜던스 남작 부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저택 내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소문이 안 좋다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남작 부인이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해 주는 것에 감지덕지해야 할지도 몰랐다.
“로이데스 선생. 그동안 선생이 우리 밀리언을 얼마나 열심히 가르쳐 주었는지 잘 알아요. 밀리언도 선생에게 많이 의지했었고요.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펜던스 남작 부인은 굳이 인사치레를 길게 이어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본론으로 진입했다.
실은 어느 정도 예상한 대화의 흐름이었다. 밀리언과 코리다의 약속이 깨진 그날 예감했다.
아, 이렇게 끝나겠구나.
“추기경님께서 부에르노에 방문하신 만큼, 잡음을 내고 싶지는 않아요.”
“이해합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리브의 모습에 펜던스 남작 부인이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곤혹스럽다는 눈으로 앞에 놓인 잔을 응시하던 남작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되도록 조용히 지켜보고, 신중하게 결정하려 했어요. 적어도 내가 곁에서 지켜본 선생은 세간에서 떠드는 말과 다르니까. 하지만 더는 두고 볼 수가 없네요. 밀리언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고.”
“네,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밀리언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할 시간 정도는 주실 수 없을까요?”
수업을 이어 갈 수 없는 상황은 이해했다. 그러나 그동안 쌓아 온 시간이 있는데, 인사 정도는 직접 해야 하지 않을까?
리브의 요청에 펜던스 남작 부인이 난색을 보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말하기 민망해서 넘어가려 했는데, 사실 오늘 오는 길에 우연히 그림을 봤어요. 많이 놀랐고요. 그걸 보고도 선생을 밀리언과 만나게 해 줄 수는….”
“그림이요?”
“그래요.”
리브의 표정을 본 펜던스 남작 부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르나요?”
빠르게 눈을 깜빡이던 리브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머릿속이 점차 새하얗게 변해 갔다.
“무슨 그림을… 말씀하시는 건지…?”
“오늘부터 시작된 야외 전시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추기경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미술관 근처에서 야외 전시를 할 예정이라고 전에 카밀이 알려 줬었지.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가. 거기에 대체 무슨 그림이 걸렸기에.
그렇지 않아도 희던 리브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등줄기에 불길한 소름이 스쳤다.
***
무슨 정신으로 펜던스 남작 부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는지 모르겠다. 리브가 당장 야외 전시장으로 가려는 것을 알아챈 펜던스 남작 부인은 그녀에게 넌지시 충고해 준 참이었다.
갈 때 가급적 얼굴을 가리는 게 좋겠다고.
미술관으로 가는 내내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원치 않아도 온갖 불안한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신과 연관된 그림이라니, 리브의 머릿속에는 딱 하나만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브레드가 그린 누드화.
하지만 브레드의 누드화는 전부 후작이 소유하고 있었다. 유별난 소유욕과 결벽증을 드러내는 후작이 이제 와서 누드화를 외부로 팔진 않았을 터였다.
무릎 위로 초조하게 치맛자락을 문지르는 사이 마차가 전시회장에 도착했다. 리브는 보닛을 최대한 앞으로 눌러쓰고 마차에서 내렸다.
미술관 앞에 마련된 넓은 공터에는 원목 이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다. 그중 유독 한 지점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는데, 리브는 본능적으로 저곳에 펜던스 남작 부인이 말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음을 알아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리브가 성큼성큼 그쪽으로 향했다.
“…직접 보지 않고 저렇게 그릴 수 있나?”
“내가 치수 잴 때 봤었는데, 얼추 맞는 것 같아.”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누던 여성들이 리브를 보고선 흠칫하며 물러섰다. 그들을 확인할 여유도 없이, 리브가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잘 보이지 않아서 몸을 비집고 들어가자, 몇몇 이들이 밀려나며 짜증스러운 욕설을 뱉었다.
그러다가도 보닛 아래로 보이는 리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리브는 어렵지 않게 인파 사이로 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사스러워서, 정말.”
바로 옆에 서 있던 여자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다가 뒤늦게 리브를 발견하고 헛기침했다. 그러나 리브는 그녀의 반응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리브의 시선이 액자도 없이 놓인 캔버스에 꽂혔다.
그것은 여성의 뒷모습을 그린 누드화였다.
마치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겠다는 듯 나신에는 얼룩덜룩한 울혈이 그려져 있었고, 주변으로는 사치스러운 장신구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살짝 고개를 돌린 옆얼굴은 딱 누구라고 특정하기 어려웠으나, 또렷하게 말려 올라간 입매가 무언가를 암시하고 싶은 듯 요염했다.
거친 붓 터치와 어딘가 익숙한 형태.
이건 브레드가 후작의 저택에서 작업해 왔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브레드의 그림이 아니기도 했다.
일단 저 옆얼굴이 그랬다. 본래 작업물에서는 뒷모습만 그렸고, 몸에 저런 울혈 같은 건 없었다. 배경에 그려진 장신구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미완성인 그림을 다른 누군가 덧그려 낸 듯했다. 당연하게도 기존에 브레드가 그려 온 누드화와는 분위기나 느낌이 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모델은 리브였다.
…저 누드화는, 디무스 디트리언 후작의 정부인 리브 로이데스를 그린 그림이었다.
“선생님!”
멍하게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리브의 뒤쪽으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누군가 리브를 강하게 잡아 돌려세웠다.
뛰어왔는지 이마에 땀을 송골송골 매단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는 카밀이었다. 카밀의 뒤로 몇몇 남자들이 따라붙었다.
“죄송하지만 이 그림은 전시용이 아닙니다.”
“잠시 물러나 주세요.”
남자들이 그림을 치우려는 듯 몸을 움직이자 누군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항의했다. 보기 좋은데 왜 치우느냐는 외침이었다. 유독 크게 들린 그 말에 리브도 환상에서 깨어난 듯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일단 자리를 옮기죠.”
카밀이 리브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따라붙었으나, 앞을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
문란하다는 소문이 더 부풀어지겠네.
홀린 사람처럼 걷던 걸음을 멈추고서야 뒤늦게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감정은 고요했다. 걱정된다거나, 불안하다거나, 두렵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카밀에게 잡힌 팔을 힐끗 내려다본 리브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창고 같은 장소에 들어와 있었다. 여러 개의 이젤이 쌓여 있고, 페인트 통 같은 게 가득 보관되어 있고, 화구를 담아 놓은 듯한 상자도 쌓여 있었다. 아마 미술관 주변에 만들어 둔 창고인 모양이었다.
“로이데스 선생님, 괜찮으세요?”
“…네.”
걱정스럽게 저를 보는 카밀에게 미안하게도, 리브의 마음은 지금 무척 잔잔했다.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상태라 스스로도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