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거친 손길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물건들이 우르르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쏟아진 잉크가 카펫을 새카맣게 물들이고, 종이가 사방으로 휘날려 아무렇게나 팔랑거렸다.
“…후작님.”
“나가.”
어지러운 바닥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던 필립이 조용히 물러났다.
홀로 방에 남은 디무스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진열장에 있던 보드카를 꺼냈다. 단숨에 한잔을 비우자 속에서 불길이 치밀듯 더운 기운이 끓어올랐다.
리브와의 저녁 식사 자리는 엉망진창으로 끝났다. 본래 의도했던 일정은 소화하지 못했고, 그녀에게 주려던 물건들은 꺼내지도 않았다.
서럽다는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던 리브가 떠오르자, 다시금 정체를 알 수 없는 짜증과 분노가 치밀었다. 잔을 꽉 쥔 채로 침묵하던 디무스가 기어이 그것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벽에 부딪힌 유리잔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속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계획했던 일정이 어그러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시종일관 죽상을 하고 있던 리브 때문인가? 아프다기에 기껏 쉬게 해 주고, 모처럼의 만남이니 눈요기를 시켜 주겠다며 잡은 외부 일정을 그녀가 다 망쳐서?
그런 거라면 이 분노의 끝에는 리브가 서 있어야 했다. 별 시답지도 않은 문제 때문에 울면서 성가시게 구는 그녀에게 본인의 주제를 알려 주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디무스는 아까 어떻게 행동했던가.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리브를 앞에 두고, 그는 처음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을 느꼈다.
그녀가 우는 걸 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예배당에서 응답하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며 우는 리브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울음소리를 전혀 내지 않으며 눈물 흘리는 리브의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건 몹시, ‘단정한 슬픔’처럼 느껴졌다.
반면 오늘은 달랐다. 예배당 때와 다를 것 없는 울음이었는데 전혀 다르게 와닿았다. 우는 걸 보니 화가 나는데 원인을 알 수 없었고, 따라서 감정을 다스리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점점 더 창백해져 가는 리브의 얼굴이 꼭 병자 같아서 계속 둘 수 없었다. 그녀에게 화를 표출하는 것 또한 상상도 못 했다.
“아무래도 식사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군.”
차라리 저택에 데려와서 좀 쉬게 하려 했으나, 그녀는 한사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의사나, 하다못해 시중을 들 하녀 하나 없는 그 좁은 집구석으로.
여동생이 있다고는 해도 환자인 처지에 남의 수발을 들 줄 알겠는가. 평생 제 언니의 수발을 받기만 했을 텐데.
탐탁잖은 기색이 뻔히 보였을 텐데도 리브는 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최근 그녀에게 너무 관대했지. 생각해 보면 그답지 않게 군 적이 많았다. 리브가 그런 디무스의 태도를 몰랐을 리 없으니, 오늘도 기어오르면 봐줄 거라고 믿은 게 틀림없었다.
“코리다와 떨어질 생각 없습니다.”
그놈의 아픈 여동생. 그 존재가 작은 가시처럼 거슬렸다.
“코리다는 제 유일한 가족이고, 제게 살아갈 힘을 주는 아이예요.”
리브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디무스는 잘 알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여동생은 리브의 첫 번째였다. 리브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리브의 모든 감정과 행동에 있어서 가장 최우선으로 고려되는 존재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냥 둘 수 있겠는가? 디무스가 리브를 원하는데. 몸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전부를.
“후작님께서는 이미 제 모든 걸 손에 쥐셨어요.”
그런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가 그에게 온 마음을 다 바치길 바랐다. 리브가 내리는 모든 판단 기준의 우위에 자신이 서 있기를 바랐다.
그간 그녀에게 베푼 모든 은혜가 그걸 가능하게 하리라고, 디무스는 믿어 의심치 않아 왔다. 실제로 리브는 디무스에게 마음을 연 것처럼 보였고, 그에게 늘 순응했다. 똑똑한 여자라 순종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구별해 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게 편안해지리라는 걸 알면서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저는 전리품이 아니에요. 비싼 조각상처럼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해 두는 그런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요.”
너는 어째서 그런 얼굴이었지?
“제게도 자의식이라는 게 있어요.”
꼭 상처받은 것처럼.
그에게 실망이라도 한 것처럼.
…그래, 실망한 사람처럼.
“후작님, 로만입니다.”
우두커니 서 있던 디무스가 눈을 들었다. 문밖에서 로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표물을 잡았습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죽여.”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디무스가 명령을 이어서 뱉었다.
“저택도 정리하고 전부 폐기해.”
“…저택에서 보관 중이던 작업물은 어떻게 할까요?”
거의 다 완성된 누드화가 떠올랐다. 사실상 마무리만 남겨 둔 그림이었다. 평소 누드 작품을 광적으로 긁어모으던 디무스에게는 그 또한 당연히 소장해야 할 작품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굳이 완성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그토록 마음에 들어 하던 리브의 누드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태워.”
스스럼없이 결정하고서야 디무스는 깨달았다.
아, 그림 같은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제 더는 누드 작품을 보며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 따위는 가능하지 않으리라.
그에게는 진짜가 필요했다.
그가 욕심난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살아 숨 쉬는 진짜 리브 로이데스가.
***
루지아 말테는 평생 고고하게 남을 꿇리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얻어맞듯 뒤집어쓴 모욕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감히 말테의 외동딸인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그 남자가 그따위였으니 정부라는 것도 그리 건방지기 짝이 없었지! 천박한 것들끼리 참으로 잘 만나질 않았나!
마음 같아서는 디무스를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었으나 디무스의 뒤에 있는 사람이 칼리오페 추기경인 이상 손댈 수 없었다.
루지아는 이를 갈았다. 특히나 마지막, 저를 보며 한 치의 주저도 없이 ‘구역질 난다’고 표현한 디무스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자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디무스가 아닌가. 작위도 없이 빌빌거릴 때 자신에게 버림받았던 그 디무스!
이대로 물러나는 건 절대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지아는 집요하게 디무스의 뒤를 캤다. 그리고 디무스의 일정표를 빼돌릴 능력이 있을 정도로 유능한 수하들은 이번에도 무언가 냄새를 맡아 왔다.
루지아에게 일정표를 유출한 내통자를 잡아냈던 로만이, 이번에는 웬 화가 하나를 잡았다는 소식이었다. 디무스가 부에르노에 정착한 뒤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다는 걸 아는 루지아는 본능적으로 그 화가가 수상쩍다는 걸 느꼈다.
로만은 화가를 어느 외딴 저택으로 끌고 갔다. 소식을 들은 루지아가 수하에게 명한 건 그 화가를 빼돌리라는 것이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실패했습니다.”
디무스를 생각하며 씨근거리던 루지아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사납기 짝이 없는 그녀의 시선에 검은 복장을 한 그녀의 수하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실패?”
“저택이 폐쇄되고 화가도 제거됐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놈을 빼돌리라고 한 거잖아.”
“…죄송합니다.”
주어진 시간이 짧다 보니, 루지아가 화가에 대해 알아낸 건 많지 않았다. 그저 빚을 많이 졌고, 허풍이 심하며 실력이 나쁘다는 것 정도?
알아낸 정보만으로는 디무스와의 연관점을 딱히 알기가 어려웠다. 좀 더 수소문하면 무언가를 캐낼 수 있겠으나 루지아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칼리오페 추기경이 부에르노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평화 순례단에 합류해 신심 깊은 말테 공작 영애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긴 싫었다.
디무스가 저렇게 기고만장한 건 전부 칼리오페 추기경 덕분이니까, 두 사람의 관계를 망치고 싶었다. 디무스의 이름에 먹칠할 일이 터지면 그를 데리러 이곳까지 행차한 칼리오페 추기경도 실망하지 않겠는가.
디무스가 추기경에게 다시금 외면당하면, 그리하여 영원히 시골에 처박혀 사는 꼴을 보면 루지아의 속도 편할 성싶었다.
“대신 저택에서 몇 가지 물건을 확보하긴 했습니다만.”
“뭐가 나왔는데?”
“그게… 특별한 건 아니었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걸 뭐 하러 확보해?”
“물건을 태워 없애려고 하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수하의 설명에 루지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애초에 외딴 저택이라 그냥 폐쇄해도 누구 하나 들여다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그 저택 내에 있던 물건을 태워서 완전히 없애려고 했다면, 수하의 말대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뭔데?”
“그림입니다.”
“가져와.”
잠시 후, 수하가 캔버스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딱 봐도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은 그림이었다. 루지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림은 아주 못 그린 누드화였는데, 특이하게도 뒷모습이었다.
그림 속 모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지아는 문득, 모델의 머리카락 색이 묘하게 누군가를 연상케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분 눈에 들고 싶으시다면 개인적으로 노력해 보세요.”
아, 그래. 그 예쁘장한 정부. 그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디무스가 요즘 정부를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는 소문이 부에르노에 파다하게 퍼졌다지?
“내가 요즘 그녀에게 좀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라.”
오만하던 디무스의 목소리도 생각났다.
그리 죽고 못 산다 이거지.
“내게 아주 재미있는 생각이 났어.”
루지아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손 빠른 화가를 하나 수배해서 이 그림을 넘겨. 내가 지시한 대로 완성하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