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아저씨는 그냥…. 내 앞가림을 하려면 얼른 건강해져서 언니 신경 안 쓰이게 해야 한다고 하신 것뿐이야. 틀린 말이 아닌걸. 얼른 건강해져서 열심히 공부하고, 돈도 벌고, 혼자서 살아야지. 지금의 나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쓸모없는 짐이지만.”
코가 빨개지도록 울며 더듬거리는 코리다를, 리브가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너는 쓸모없는 짐이 아니라 내 소중한 동생이야. 네가 아니었으면 언니가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어? 네가 벌써부터 나갈 생각을 하면 언니는 너무 서운해.”
조곤조곤 이어지는 리브의 말에 코리다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파묻었다. 리브는 그런 코리다를 꽉 끌어안은 채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자존심이 부서지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코리다가 스스로를 ‘쓸모없다’라고 칭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코리다를 제 곁에 떨어뜨려 놓고 싶다고 하여, 이런 짓까지 할 필요가 있나.
리브는 분노를 느꼈다.
이 모든 걸 감수하면서까지 디무스 디트리언이라는 남자의 변덕스러운 관심 한 자락을 지켜야 할까? 제 몸과 마음, 같잖은 자존심까지 바치고 온갖 사람들의 눈초리와 수군거림을 감수했음에도 풍족해진 이 생활의 대가로는 부족한가?
노엽고 혼란스러운 와중,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 남자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다는 제 마음이 코리다를 울리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있지는 않다는 사실.
내일이라도 당장 사라질지 모르는 남자의 관심보다야 혈육인 코리다가 더 중요한 건 너무도 당연하리라.
***
리브가 몸을 회복한 건 티에리가 다녀가고도 며칠이 지난 뒤였다.
그동안 리브는 차근차근 과거를 돌이켰고, 몇 가지를 더 알아챘다. 가령 이런 것이다. 브레드가 그린 옆모습 누드화에 관해서.
브레드의 성격상, 처음부터 돈이 되지 않았으면 그릴 생각도 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 그가 억지를 써서 옆모습을 그린 건 결국,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리라는 것.
모든 일의 원흉인 그 누드화조차 후작으로 인해 시작된 것일 수도 있음을 말이다.
어쩌면 그가 리브를 곁에 두기 위해 손을 뻗은 시일이 생각보다 더 오래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연이라고 믿었던 모든 도움이 의도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차게 식었다.
관심에 감지덕지하며 어떻게든 눈길을 붙잡아 두려 아등바등하는 그녀를 보면서 후작은 재미있었을까?
“몸이 회복됐다며.”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손이 멈추었다. 거의 손대지 않은 제 앞의 고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리브가 시선을 들었다. 후작은 아예 식기를 쥐고 있지도 않았다. 언제부터 식사를 멈추었는지 알 수 없었다.
“회복됐습니다.”
“하지만 전혀 먹지 않고 있군.”
그들은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리브의 몸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작이 이곳을 예약했다고 했다. 리브가 알기로 이곳은 예약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은 더욱 그랬을 것이다.
오늘은 드디어 부에르노에 추기경이 입성하는 날이었으니까.
그들이 앉은 자리는 부에르노에서 가장 큰 예배당 광장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였다. 환영 인파들이 지금 이 순간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아침부터 시작된 축하 행진과 축하 공연이 창밖에서 끊이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저 모든 광경을 볼 수 있는 이 자리의 값어치는, 돈으로 매기기도 어려울 정도였으리라.
내내 앓느라 집에 틀어박혀 있던 리브에게 후작은 기분 전환을 하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예전이었다면 그의 말대로 저 요란스러운 풍경을 감상하며 음식의 맛을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소화가 잘되지 않아서요.”
“저택의 주방장을 데려올 걸 그랬나.”
레스토랑 소속 주방장이 들었으면 기함했을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 후작이 직원을 불렀다. 그러곤 소화가 잘될 만한 음식을 내오라고 명령했다.
“지금이라도 거트루드 박사에게 진찰받아.”
“괜찮습니다.”
“그런 말을 하려거든 괜찮은 얼굴로 해야지.”
“저는 괜찮아요.”
재차 거절의 말을 뱉은 직후, 리브가 시선을 내렸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손 가는 대로 잘게 자르기만 한 고기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훌륭한 음식이었다. 소화가 안 되는 건 음식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걸 먹는 리브가 이 비싼 음식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두 번은 흉내 낼 수 있으리라. 한두 번 정도는.
“늘 괜찮았어요. 후작님이 나타나시기 전까지는….”
“아픈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소리로 들리는군.”
“그럴지도 몰라요.”
후작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음이 느껴졌다. 리브는 굳이 고개를 들어 그 시선을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쥐고 있던 식기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모든 게 더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옛날보다 풍족해졌는데…. 나아진 건 껍데기뿐이에요.”
루지아 말테는 정부 따위에게 투기를 부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 까닭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정부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흉내 내 봐야, 결국 상류층 사람을 따라 하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겠지.
기껏해야 정부, 마음에 드는 소유물 따위로 취급받는 리브는 평생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코리다와 떨어질 생각 없습니다.”
“뭐?”
“코리다는 제 유일한 가족이고, 제게 살아갈 힘을 주는 아이예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눈살을 찌푸린 후작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리브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본인이 뒤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들켰음에도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선생. 애를 싸고도는 건 좋은 양육법이 아니야.”
짧은 적막을 깨고 나온 말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리브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쩌면 그의 지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희망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혹은 말이라도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 주길 바랐을지도.
“코리다의 치료를 도와주신 점 너무 감사드려요. 이후의 모든 경제적 지원과 관련해서도요. 후작님께서 제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은혜를 베푸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 맞잡았다. 깍지를 낀 손에 잔뜩 힘을 준 리브가 혀로 입술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코리다의 미래를 결정하는 문제에서는 저를 배제하지 않으셨어야 해요. 후작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든지요.”
“이해할 수 없군. 선생의 동생을 없애 버리려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정도면 감사하다며 허리를 굽혀야 하는 것 아닌가?”
누군가는 이를 두고 배부른 투정이라고 하리라. 하지만 일방적인 시혜를 언제까지 감사하게 받아야 한단 말인가. 심지어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건네는 저, 독선적인 도움을.
저것은 그저 본인이 만족하기 위한 적선이질 않나.
“후작님께서는 이미 제 모든 걸 손에 쥐셨어요. 무얼 더 바꾸거나 치울 필요가 없으세요.”
“나는 선생이 랑제스 저택에 들어오길 바라.”
탁, 하고 거칠게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라 리브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출렁거리는 와인 잔이 보였다.
잔을 얼마나 세게 내려놓았는지, 붉은 와인 몇 방울이 바깥으로 튄 상태였다.
그 자국을 짜증스러운 눈으로 확인한 후작이 리브를 돌아보았다.
“들어와서 나가지 않기를 바라.”
서늘하게 내려앉은 벽안에 얼핏,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그건, 선생이 남의 손을 타는 게 싫다는 의미네.”
그는 당장이라도 리브를 저택에 데려다 놓고 가두고 싶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맺었다. 섬뜩할 정도로 강렬한 시선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굳어서 입술만 벙긋거리던 리브가 쥐어짜 내듯 물었다.
“지하실에 보관해 둔 그 수많은 작품처럼요?”
“차라리 그랬으면 편했겠군. 적어도 그것들은 얌전하게 자리를 지키니까.”
“저는 전리품이 아니에요. 비싼 조각상처럼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해 두는 그런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요.”
리브의 눈가가 설핏 일그러졌다.
“제게도 자의식이라는 게 있어요.”
제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 준 적 없는 후작에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리브가 내내 전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정부’니 ‘조각상’이니, 그런 게 아니라 ‘리브 로이데스’라는 사람이라는 걸 적어도 저 남자만큼은 알아주어야 하지 않나.
그의 말대로 그가 정말 그녀를 조금이라도 ‘아낀다’면, 그렇다면….
“후작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주고받는 것에 익숙하시겠지만 저는… 최소한 사람 사이에서는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선생.”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리브의 말을 끊었다.
“이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러지 않아도 시끄럽던 창밖에서 불시에 환호성이 터졌다.
“선생이 말하는 ‘교류’는 적어도 눈높이가 같아야 가능할 일인데, 보게. 선생과 나 사이에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아련한 환호성 사이로 사람들이 추기경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분명 선생은 주제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란스러운 바깥을 힐끗 확인한 후작이 혀를 차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나로서도 이런 대화는 애석하군.”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감쳐물고 버티던 리브가 기어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눈가가 화끈거리고, 주체할 수 없는 절망감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길처럼 치솟아 모든 것을 검게 태웠다.
견딜 수 있을 줄 알았다.
스스로 과신했다.
그녀는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무릎 위로 점점이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초라하게 옷을 적셨다. 저 남자가 선심 쓰듯 허락하는 건 언제나 극히 일부에 불과할 거고, 그건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으리라.
그러나 전부가 아니면 소용없다.
차라리 가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