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90)화 (90/138)

아돌프는 그날 코리다를 언제까지고 감쌀 수 없으니, 의사에게 보이고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 후작이라면 훌륭한 의사를 찾아 줄 거라고 하면서. 그리고 나중에는….

“동생분이 건강해진다면요?”

“동생분이 건강해져서 로이데스 양의 곁을 떠날 시기가 온다면 말입니다.”

“로이데스 양은 동생분이 건강해지길 원하시니, 이러한 상황도 염두에 두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런 소리를 했었지. 리브가 처음으로 코리다의 독립에 관해 인지하게 된 순간이었다.

지금 코리다는 예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건강해져서 외출이 가능해졌다. 신약을 받았으니 앞으로 더 건강해져서, 티에리의 말대로 곧 완치에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건강해진 코리다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할 테고, 더 넓은 세상을 꿈꾸겠지. 코리다는 호기심이 많고 쾌활한 소녀였다.

코리다와 금방 친해진 아돌프도 그걸 알았을 테고.

우두커니 서 있던 리브가 응접실 쪽을 힐끗 보았다가,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한 곳은 코리다의 방 쪽이었다.

서로의 방이 생긴 뒤로 자매는 좀 더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보냈다. 코리다가 방에 틀어박히면 리브는 그녀가 무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만 돌리면 보이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방문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리브가 문가에 서서 방을 둘러보았다. 단정하게 정돈된 방 한쪽, 작은 책상이 보였다. 리브가 성큼성큼 책상으로 다가갔다. 요즘 편지를 주고받느라 바쁘다는 걸 증명하듯, 책상 위에는 잉크와 편지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리브가 책상 첫 번째 서랍을 열자, 한 뭉치의 편지 봉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릴로에게 받은 편지였다. 여러 개의 편지 봉투 중 가장 위에 놓인 것을 열어 내용물을 보자, 동글동글한 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작은 평범한 인사였다. 그리고 요즘의 일상, 취미. 그리고….

개인사로 추정되는 부분을 빠르게 넘기던 리브가 문득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리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부분이었다.

코리다의 걱정을 이해한다며, 지금이라도 리브가 사랑에 빠졌다면 동생으로서 그걸 적극적으로 응원해 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로는 마주르칸으로 유학을 가는 방법에 관해서 설명해 주고 있었다.

시릴로는 아돌프가 소개해 준 독서 친구다.

리브가 편지를 접어 도로 봉투에 넣었다. 서랍을 닫고, 조용히 방을 나온 리브가 응접실 쪽으로 향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내부를 확인하니, 진지하게 코리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 티에리의 모습이 보였다.

티에리는 자존심이 아주 높아 보였으니, 일부러 코리다의 상태로 장난을 칠 것 같지 않았다. 정말 진심으로 코리다를 건강하게 만들어 줄 것 같다는 뜻이었다.

건강한 코리다의 독립을 언급하던 아돌프, 그리고 코리다에게 마주르칸 유학을 권유하는 친구 시릴로.

여기에 아무런 의도가 없다는 건 믿을 수 없었다.

아돌프는… 후작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남자였다.

“선생의 여동생은 혼자 집을 볼 줄 아는 나이 아닌가?”

마치 코리다와 떨어지는 연습을 시키려는 듯 요즘 부쩍 외박을 종용하던 후작.

아돌프가 무언가를 의도했다면 그건 결국 후작의 뜻이리라. 하지만 왜? 후작이 자신과 코리다를 떨어뜨려 놓으려 하는 거라면, 어째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가 도대체 자신을 통해서 뭘 하고 싶은….

혼란스럽게 이어지던 생각이 문득 뚝 끊겼다. 응접실 문이 열리며 티에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경과가 아주 좋아요. 신약도 몸에 잘 맞으니까 주기적으로 먹으면 금방 효과를 볼 거예요. 집에만 있지 말고 가볍게 산책이라도 하면서 몸을 계속 움직여요. 햇볕을 쬐고 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회복해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먹는 건… 뭐, 지금도 충분히 잘 먹고 있으니 됐고.”

고개를 끄덕이며 코리다를 보던 티에리가 리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로이데스 양의 진찰을 하죠.”

“전 됐습니다.”

“후작님께서 로이데스 양의 상태를 확인하라고 명령하셨어요.”

“괜찮아요.”

리브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생각보다 더 단호한 거부에 티에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후작에 관해서는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던 리브를 티에리도 모르지 않았다. 정색하며 거절하는 제 모습이 이상해 보이리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리브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낫고 있어요. 열도 안 나고, 모든 게 좋아요.”

티에리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당사자가 질색하며 고개를 내저으니 억지로 앉히지도 못했다.

“…그래요. 뭐, 그렇다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해열제와 간단한 감기약 정도는 두고 갈 테니 여차하면 그걸 사용해요.”

“네, 감사해요.”

“감사는 후작님께 하세요. 그분이 이렇게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건 처음이니까.”

그 순간 리브가 떠올린 건 랑제스 저택의 지하실이었다. 저택의 집사장인 필립조차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 저택 가장 깊은 곳에 마련된 장소. 그곳에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누드 작품들이 모여 있었다. 단 한 사람의 관람객을 위해서.

리브는 깨달았다. 그는 이제 저를 그곳에 보관하고 싶어 하는구나. 모든 것과 유리되어서 오직 그만을 위해 존재하는 조각상이 되도록.

“진찰 끝났으니 난 이만 가 볼게요.”

왕진 가방을 챙긴 티에리가 새침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거트루드 박사님.”

“…진찰을 거부하겠다니 그냥 가긴 하는데, 좀 더 쉬는 게 좋겠어요. 안색이 아주 나빠요.”

찜찜하다는 얼굴로 한마디를 남긴 티에리가 돌아가고, 코리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브에게 다가왔다.

“언니, 왜 그래? 몸이 다시 안 좋아졌어?”

“코리다.”

“응?”

“일단 사과할게. 언니가 뭘 좀 확인하느라 네 편지를 읽었어.”

“…응?”

“그래서 묻지 않을 수가 없어. 혹시 너 마주르칸으로 유학 가고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리브를 올려다보던 코리다가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듯 빠르게 눈을 깜빡이던 코리다가 더듬더듬 입술을 뗐다.

“어, 음, 그건,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줘. 네 의지로 독립하고 싶은 거라면 화내지 않아. 혹시 눈치를 보느라 그동안 말하지 못했다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유학 이야기는 뭐야?”

“그건….”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하던 코리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나도 부모님 같은 수공예 장인이 되고 싶은데, 부담 없이 공부할 방법이 있나 싶어서 알아본 거야.”

“후원을 받아서 유학 가는 게 그 방법이야?”

“다, 다들 그렇게 공부한다던데?”

리브는 코리다를 가만히 응시했다. 머릿속이 복잡한데, 이게 무슨 감정인지 쉽게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제게서 코리다를 떼어 놓기 위해 이토록 치밀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게 황당하고 어이없으면서도, 묘하게 배신감이 들었다. 만약 지금 알아채지 못했으면….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 코리다가 건강해지고, 원하는 공부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걸 정말 싫다고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한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꾸물꾸물 피어오르던 배신감과 화가 엉망진창으로 뭉개지고, 비참할 정도로 무기력한 감정만 남았다.

“언니?”

“…언니가 능력이….”

능력이 없어서,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제대로 화를 낼 자격을 얻지 못하고.

차마 나오지 못한 말이 가슴속에서 켜켜이 쌓여 짓눌렸다.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브가 결국 별다른 말 없이 몸을 돌렸다.

후작이 가지고 싶어 하는 건 오직 리브 한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코리다를 눈 밖으로 치워 버리려는 것일 터다. 애초에 그는 거추장스럽고 지저분한 모든 걸 거슬려 했고, 거치적거리면 스스럼없이 제거하는 남자였으니까.

그의 아름다운 전시실에 입성하려면 리브 또한 그리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가 치워 버리려는 것이 리브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든.

“언니 조금만 쉴게.”

무엇을 위해서 이제껏 그리 열심히 살아왔을까? 값싼 자존심을 팔아 한 사람의 관심을 얻는 것만으로 모든 게 이토록 쉽게 해결되는 거였는데.

“언니, 언니! 괜찮아?”

“괜찮아, 코리다. 조금 쉬면 나을 것 같아. 편지를 본 건 다시 한번 미안해.”

“아니야, 그건… 그건 내가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하지만 언니, 나 유학 가겠다고 한 거 아니야! 그냥 그런 방법이 있다고 듣기만 한 거야!”

“그래.”

“정말이야! 나 혼자 외국 가기 싫단 말이야!”

그대로 방에 들어가려던 리브가 코리다의 외침을 듣고 멈춰 섰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반쯤 고개를 돌려 코리다를 보았다. 코리다의 눈가가 불긋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언니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아….”

입술을 삐죽거리며 울음을 참던 코리다가 기어이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렸다.

“미안해, 언니. 나 때문에 언니 인생이 다 망가진 거 아는데…. 내가 너무 이기적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코리다. 언니 인생이 왜 망가져. 그런 소리 하지 마.”

리브가 정색하며 코리다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나 코리다는 조금도 위로받지 못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먹거렸다.

“어, 언니도 언니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아픈 여동생한테 발목 잡혀서 마음대로 살지도 못하고 일만 했잖아….”

평소 코리다가 리브를 여러모로 걱정해 온 건 맞지만, 이런 반응은 어딘가 과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리브가 심각한 얼굴로 리브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언니는 너에게 발목 잡힌 적 없어.”

“나 이제 어린애 아니야! 아돌프 아저씨가 좋은 후원자와 연결해 줄 수 있다고 했으니까, 언니는 내 걱정 안 해도 돼.”

“…너 아돌프 씨와 서재에서 그런 대화를 나눴어? 네가 내 인생을 망쳤다고 그래? 그 사람이?”

리브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분노를 느꼈는지, 코리다가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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