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지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반응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디무스의 이런 반응을 결코 예상하지 못했으리라는 걸.
“그럼 어째서… 왜 그때 그냥 물러난 거예요?”
“내가 그걸 왜 영애에게 설명해야 하지?”
“당신의 전공이 전부 지그힐트의 이름으로 기록될 걸 알면서 물러났다고요? 드디어 당신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 기회를 마다한다고?”
그걸 ‘되찾는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디무스는 조소를 흘렸다.
애초에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음을 이제 그는 안다.
물론 한때 그는 자신의 미래에 명예와 영광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시 필요한 게 바로 그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핏줄로는 나설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그의 발판이 될 이를 찾아야 했다.
반면 스테판 지그힐트는 핏줄 빼고는 내세울 게 없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모자란 놈이었다. 가문이 아니었으면 사관 학교에 입학도 못 했을 머저리라, 필연적으로 곁에 우수한 누군가를 두고 부려 먹으려 들었다.
디무스가 그의 선택을 받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디무스는 속으로 스테판을 무시하면서도 굳이 스테판의 보좌관 자리를 거절하지 않았다.
스테판은 멍청하지만 훌륭한 발판이었으므로.
“고리타분한 분들은 이래서 문제야. 지저분한 일을 본인 손으로 안 했으니, 제 몸에는 흙탕물이 튀지 않았을 거라고 믿거든.”
입대 후 두드러지게 주목받는 디무스를 보며 스테판은 상당히 열등감을 느꼈으리라.
스테판은 때때로 훼방을 놓으려다가 도리어 뒤통수를 맞고 디무스의 진급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루지아 말테가 스테판과 디무스를 두고 저울질하던 시기였다.
디무스는 스테판 같은 놈에게 발목 잡힐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 자신이 못하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실무자들의 충성 또한 스테판보다는 디무스를 향해 있었다.
모든 게 그의 뜻대로 되기 직전이었다. 모두의 앞에서 왕에게 정식 작위를 수여 받고, 훈장을 단 채 말테 가문의 무남독녀 약혼자로 서기 직전.
디무스는 스테판의 치명적인 실수를 대신 뒤집어쓰게 되었고, 그 대가로 이름뿐인 작위를 떠안았다. 막대한 보상금과 함께 함구를 강요받았고, 불명예스러운 제대를 끝으로 그의 군 기록은 전부 기밀이 되었다.
평생 디무스의 뒤를 봐주었던 칼리오페 추기경은 결정적인 순간 그를 외면했다. 그 대가로 추기경이 얻은 건 ‘유력한 그라티아 후보’라는 영광스럽고 신성한 자리였다.
자신이 칼리오페 추기경의 ‘쓸모 있는 거래 물품’으로 키워졌음을, 디무스는 그때 깨달았다. 추기경은 장차 있을 유용한 거래들을 위해 본인의 약점을 선별해 일부러 키운 것이다.
“입으로 뱉을 줄 아는 게 헛소리뿐이라 참 애석하군, 영애.”
아직도 디무스가 군 생활에 미련을 두고 있으리라 여겼을 어리석은 루지아 말테.
단지 그녀만 그렇게 여겼을 리는 없었다. 아마 당시 치욕적으로 물러나야 했던 디무스를 아는 모두가 그리 여기겠지. 복귀할 수 있으면 당장이라도 복귀하려 들 것이라고.
그럴 작정이었으면 처음부터 제 수하들을 끌고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스테판의 팔을 부러뜨리고 공개적으로 하극상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
“후회할 거예요.”
“무엇을? 영애의 청혼을 거절한 것을?”
디무스가 느긋하게 반문하자, 루지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디무스는 그녀를 향해 아낌없는 비웃음을 흘렸다.
“청혼하려면 장미 꽃다발이라도 준비하는 정성을 보이지 그랬나.”
“내가 당신을 죽이진 못해도 우습게 만들 수는 있어요.”
“우리는 서로를 죽이지 못하지만 우습게 만들 수는 있지. 나도 알고 있네.”
루지아는 말테이니 당연히 건드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칼리오페 추기경의 ‘치명적인 약점’인 디무스를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쉬운 대로 서로를 우습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당신 정말 후회할 거예요.”
“나는 후회를 하지 않아, 영애. 그건 아주 쓸데없고 소모적인 감정이니까.”
디무스는 마지막으로 시가를 빨아들인 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서류 위에 그것을 꾹 눌렀다. 불에 지져진 서류가 새까맣게 탔다.
회중시계를 보니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디무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지금쯤이면 티에리가 이미 리브의 집에 도착했을 것이다. 기왕이면 티에리와 함께 움직여서 리브의 얼굴을 본 뒤 다음 일정을 소화하려고 했는데.
다음 일정을 취소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건 리브에게 보내 줄 맞춤 모자를 확인하는 일정이었다. 디무스는 일전에 옷 가게에서의 소동 이후 일부러 여성복이나 여성용 잡화를 주문할 때는 직접 관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종의 경고였다.
게다가 사소한 장식용 보석 하나라도 제가 골라야, 리브가 걸친 모습을 봤을 때의 만족감이 더 크기도 했고.
리브가 다 낫기 전에 모자를 완성하려면 적어도 오늘은 모자점을 방문해야 했다.
뭐, 티에리를 보냈으니 그녀에게 상태를 물으면 되겠지.
깔끔하게 아쉬움을 접은 디무스가 곁에 두었던 지팡이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가겠다고요? 후환이 두렵지도 않아요?”
“과거의 후환이 두려워서 꽁무니에 불붙은 개새끼처럼 나를 찾아온 건 영애야. 게다가 기껏 와서 한다는 게 이런 삭막한 청혼이라니, 실망스럽기만 한데.”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루지아를 ‘개새끼’로 격하시킨 디무스가 핏물을 짓밟으며 등을 돌렸다.
그대로 방을 나서려던 디무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보다….”
말끝을 늘이며 반쯤 고개를 돌린 그가 오연한 시선으로 루지아를 응시했다.
“내 비위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영애를 곁에 세우는 상상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는군.”
기어이 루지아가 치욕스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걸 보고서야, 디무스는 방을 나섰다.
***
리브가 앓아눕는 바람에 코리다의 주기적인 치료 일정에도 변동이 생겼다. 코리다는 한 주 정도는 지나가도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리브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티에리가 직접 집까지 와 주겠다고 한 건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후작의 저택이 아닌 곳에서는 절대 진료를 보지 않는다던 티에리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리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이건 아주 특별한 취급입니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해맑게 인사하는 코리다의 모습에 티에리가 말문이 막힌 듯 침묵했다. 그러다가 미간을 찡그리며 다시금 진지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아무리 후작님이라고 해도 나를 막 부려 먹지 못하세요. 이건 내 판단이라는 것만 알아 두세요.”
“네!”
환하게 웃는 코리다를 물끄러미 보던 티에리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미간의 주름이 스르륵 풀리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티에리는 주기적인 치료 속에서 코리다를 꽤 기껍게 여기게 된 모양이다.
티에리가 뭐라고 하든 코리다는 집으로 직접 방문한 티에리가 마냥 반가운 눈치였다. 손님이 왔다며 들뜬 얼굴로 서 있던 코리다가 아픈 리브 대신 음료와 간식을 준비하러 갔다.
“그런데 이 좁은 집에 무슨 짐이 이렇게 많아요?”
코리다를 따라 이동하던 티에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거실을 둘러보았다. 두꺼운 숄을 걸친 채 벽에 기대서 있던 리브가 민망함을 감추며 대답했다.
“선물을 받았는데 둘 곳이 없어서… 안쪽 응접실은 자리가 넉넉하니까 진료를 보시기에도 좋을 거예요.”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앓아누운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입을 일이 있기나 할까 싶은 드레스나, 건드리기도 무서운 장신구, 그에 맞춘 수십 켤레의 구두와 모자까지. 더 기겁할 일은 선물 행렬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돌프가 넌지시 흘린 말에 의하면, 아직 제작 중인 물건도 꽤 많은 듯했다.
오페라를 보러 갔을 때 했던 치장이 후작의 마음에 별로 들지 않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리브가 다소 무심한 눈으로 선물 상자들을 훑어보았다. 한가득 쌓인 선물을 보고도 놀랍도록 아무 감흥이 일지 않았다.
“차라리 좀 넓은 집으로 이사하는 게 어때요? 사람이 둘인데 이런 좁은 집에서 지내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
리브가 맥없이 웃었다. 이 집보다 훨씬 작았던 이전 집이었으면 티에리는 아마 다시는 왕진을 오지 않겠다며 진저리 쳤을지도 모르겠다.
“저택 문제는 아돌프가 잘 알 텐데, 그에게 자문을 구해 보든가요. 노총각이라 세심함은 부족할지언정, 서류 작업은 깔끔하게 처리하는 사람이니까.”
웃으며 티에리의 말을 흘려듣던 리브가 멈칫했다.
“…네?”
“아돌프요. 그가 후작님의 법률 대리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어요?”
아니, 리브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아돌프 씨가 독신이셨어요?”
“그래요. 딱 봐도 그럴 것 같지 않아요?”
“…혹시 이혼을 하셨다든가, 숨겨 둔 자식이 있다든가….”
“아돌프를 애 딸린 이혼남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는 줄은 몰랐네요.”
티에리가 가볍게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마침 접대 준비를 마친 코리다가 응접실 쪽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박사님! 쿠키 좋아하시나요?”
“나는 그런 거 안 먹어요.”
“사과주스랑 먹으면 정말 맛있거든요!”
“내 말 듣고 있어요?”
퉁명스러운 어조로 꼬박꼬박 대답하는 티에리와 그 앞에서 조잘거리는 코리다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응접실로 들어가는 티에리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던 리브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제게도 동생분 또래의 아픈 딸이 있어서, 병든 가족을 부양하는 문제에 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게 거짓말이었다고?
하지만 왜 그런 거짓말을 하지? 그렇게까지 해서 아돌프가 얻을 수 있는 게 도대체 뭐기에?
몸을 감싼 숄을 더욱 세게 잡아당기며, 리브가 몸을 웅크렸다. 그러지 않아도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그런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게 될 것만 같았다. 그날 아픈 딸 이야기를 들먹이며 아돌프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저도 여러모로 알아보며 깨달았습니다. 어떤 병은 이제 치료할 수 있다는 걸요.”
“그저 같은 처지에서 드리는 조언입니다. 검진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면, 이번 기회에 몸 상태를 다시 살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아마 후작님이라면 충분히 걸맞은 자를 찾아내 주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