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88)화 (88/138)

리브는 밀리언과 놀지 못해서 상심한 코리다를 달랠 여유가 없었다.

호숫가에서 돌아온 뒤 크게 앓아누웠기 때문이다. 살면서 마음대로 아파 본 적이 없었던 리브는 처음으로 호된 몸살에 걸렸다. 무리해서 일했을 때도, 약을 구하러 다니느라 소나기를 흠뻑 맞았을 때도 걸린 적 없던 몸살이라 더 취약했다.

몸 약한 코리다가 행여 옮을까 싶어 방에 틀어박힌 리브는 처음으로 후작의 부름을 거절해 보았다.

그동안 그를 거절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만 여겼는데, 막상 해 본 거절은 의외로 쉬웠다.

밤새 끙끙거리며 베갯잇을 식은땀으로 흠뻑 적신 그녀는 꿈을 꿨다. 후작이 없는 미래에 관해서.

그 꿈이 악몽인지, 길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얼굴 보기 힘드네요.”

화려한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 앉아 있던 루지아가 눈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디무스.”

디무스는 무심한 얼굴로 루지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루지아의 인사를 받을 생각은 아예 없었다.

“길게 대화할 시간 없으니 빨리 끝내지.”

자리에 앉자마자 회중시계를 확인하는 모양새가, 누가 보아도 다른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루지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얄밉게 웃었다.

“뭐가 그리 급한가요? 정부가 기다리고 있나요?”

“그래.”

가볍게 농담을 이어 가려던 루지아가 멈칫했다. 디무스는 그런 그녀를 힐끗 보고는 냉담하게 말했다.

“내가 요즘 그녀에게 좀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라.”

아닌 게 아니라 지금 디무스는 루지아에게 내 준 이 시간이 무척 아까웠다. 명확한 볼일이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루지아와 마주 앉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루지아는 디무스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양 김빠진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얼굴로 말해 봐야 설득력도 없으니 관둬요.”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디무스는 최근 자신의 상태가 조금 특별하다는 걸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리브를 대하는 제 태도가 확연하게 이상하다는 걸.

그간 미술품을 수집할 때 느꼈던 그런 감정들과는 결이 달랐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한 수집품을 하나 더 늘리는 정도로 여겼는데 말이다.

그가 제 이질적인 상태를 본격적으로 인지한 건 리브가 아프다는 이유로 며칠간 얼굴을 비치지 않고부터였다. 생각해 보니 근래 리브와 자주 만났던 것이다.

만난 날은 꼭 섹스를 했지만, 그것만 한 건 아니었다. 총기술을 가르치거나 산책을 하거나, 이유 없이 사냥터에 데려가고 서재에 우두커니 앉혀 두기도 했다. 디무스의 단조로운 일상 곳곳에 리브가 스며들었음을, 그는 그녀의 부재를 통해 깨달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리브의 존재가 딱 그랬다.

그러는 사이 디무스는 그녀가 앓아눕기 전 수상한 백색 사륜마차에 잠깐 탔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차의 주인이 루지아라는 사실도.

그래서 디무스는 만나자는 루지아의 연락에 응했다. 루지아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리브에게 부담이 될 여자였다. 심지어 루지아가 옛날보다 더 뻔뻔해진 것 같으니, 디무스도 그에 맞는 대응을 할 작정이었다.

“당신 성격 나쁜 거 모르지 않고, 대충 반발할 거라는 거 예상 못 하지도 않았어요. 근데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칼리오페 추기경님이 오셨을 때 좋은 모습 보여 드려야죠.”

디무스가 무슨 생각으로 이 자리에 앉았는지 까맣게 모르는 루지아는 벌써부터 제 뜻을 다 이룬 것처럼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서류를 디무스에게 내밀었다.

“우리 쪽 조건이에요. 외부 파병으로 정리하죠. 기록은 전부 말소해 줄 수 있어요.”

디무스는 대답 대신 눈만 굴려서 서류의 글자를 훑었다.

“지그힐트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스테판 덕분에 당분간 쥐 죽은 듯이 박혀 있어야 할 예정이거든요.”

서류에는 예상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디무스를 말테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 주겠다는, 뭐 그런 내용.

그러니까 이것은 굳이 따지자면 청혼서나 다름없었다. 비록 최소한의 구색도 맞추지 않아서 꼭 물건을 흥정하는 계산서처럼 보이지만.

디무스는 예전에도 이런 ‘청혼서를 빙자한 계산서’를 받아 보았다. 그가 군에 있을 당시였다. 그때 루지아는 스테판과 디무스를 양손에 올렸다. 스테판이 내세울 건 그의 대단한 가문이었고, 디무스의 조건은 가문을 제외한 전부였다.

그리고 저울은 스테판에게 기울었다.

“유서 깊은 귀족 간의 결합을 깨뜨리기에는 내 몸값이 너무 낮다고 평가한 게 영애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유서 깊은 귀족 간의 결합은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법이죠. 요즘 누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나요?”

손바닥 뒤집듯 루지아의 태도가 돌변했다. 과거에 그랬듯.

그녀의 대답에 비스듬히 입매를 뒤튼 디무스가 손끝으로 서류를 툭 건드렸다.

“이것도 결국 고리타분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디무스가 냉담한 미소를 흘렸다.

“나도 고리타분한 여자는 별로 흥미가 없어서.”

좀처럼 뜻대로 풀리지 않는 대화가 탐탁지 않았는지, 루지아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조금 옅어졌다. 서류만으로는 쉽사리 디무스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루지아가 상냥한 음성으로 말했다.

“못 본 사이에 새로운 취미를 만들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그런데 미술품 수집이라니, 당신 취미로는 너무 고상하지 않나요?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던 남자가 한가롭게 미술품 품평이나 하면서 이런 시골에 틀어박혀 있겠다고요?”

“좋은 지적이군. 영애도 알다시피, 내가 주기적으로 피를 좀 봐야 직성이 풀리거든.”

디무스가 반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문가에는 그를 이곳까지 수행한 찰스가 서 있었다.

“들여보내.”

고개를 숙여 보인 찰스가 문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루지아의 호위들이 긴장한 얼굴로 문가를 주시했다. 디무스는 그런 호위들을 비웃듯 나른하게 몸을 뒤로 기댔다.

잠시 후,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로만이 들어왔다. 로만의 손에는 한 남자가 단단히 붙들려 반쯤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남자는 로만에 의해 소파 옆 가까이에 서게 되었다. 얼굴에 군데군데 피딱지가 앉은 그가 덜덜 떨며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루지아를 발견하고는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히, 히익. 마, 말테 공작 영애!”

루지아가 눈살을 찡그렸다. 다리를 꼬고 앉은 디무스가 무료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는 사이?”

“전혀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은 루지아가 매몰차게 남자를 외면했다. 남자의 눈에 절망감이 스쳤다. 그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애처롭게 말을 뱉었다.

“여, 영애! 제발 살려 주시…!”

그러나 그는 제 말을 채 다 맺지 못했다. 상의 안쪽에서 은색 리볼버를 꺼낸 디무스가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장전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물 흐르는 듯한 행동이었다.

이내 곧게 뻗은 리볼버의 총구에서 굉음이 났다.

타앙!

“컥….”

“꺅!”

“아가씨!”

남자의 가슴팍이 붉게 물들었다. 피를 토하는 남자의 모습에 루지아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고, 호위들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무기를 꺼내는 것보다 디무스가 방아쇠를 다시 당기는 게 더 빨랐다.

손쓸 사이도 없이 호위 하나가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나머지 호위들은 로만과 찰스에 의해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찰나에 무방비한 상태가 된 루지아가 창백한 얼굴로 주춤거렸다.

“무, 무슨 짓이에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란 사람은 이게 문제야. 모든 위험이 자신과 무관한 줄 알거든.”

희게 질린 얼굴로 서 있던 루지아가 이를 악물었다.

“가, 감히 나를 위협하는 건가요? 나는 말테…!”

“스테판에게 듣지 못했나? 내가 저지른 하극상 중 하나가 그의 팔을 부러뜨리는 거였는데. 가문 이름을 내세우는 건 나쁜 판단이라고 말해 두겠네.”

“디무스!”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는 걸 배우지 못한 모양이지? 가정 교육이 형편없어, 말테 공작 영애.”

탕!

허공에 찢어진 섬유 조각이 흩날렸다.

루지아가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몸을 굳혔다. 디무스가 쏜 총알은 그녀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었던 고급스러운 소파를 망가뜨린 상태였다.

숨을 쉬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얗게 질린 루지아를 확인한 디무스가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훨씬 보기 좋아.”

한결 편하게 몸을 늘어뜨린 디무스가 시가 케이스를 꺼냈다. 찰스가 얼른 곁으로 다가와 불을 밝혀 주었다.

“그래, 뭐라고 했더라. 군 기록을 말소해 주겠다고?”

시가를 빨아들였다가 후, 뱉는 숨과 함께 냉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정말 ‘못’ 돌아가는 거라고 믿었나? 똑똑하신 말테 공작 영애께서 정말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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