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87)화 (87/138)

외관만큼이나 마차 내부는 고급스럽고 휘황찬란했다.

앉아 있는 것조차 황송할 정도로 매끄러운 가죽 의자의 끄트머리에 겨우 엉덩이를 걸친 리브가 조용히 심호흡했다.

리브를 제 앞에 앉혀 놓은 루지아는 한참이나 별말 없이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실망스럽네. 대단치 않아 보여.”

가벼운 어투로 중얼거린 루지아가 작게 혀를 찼다.

“유모 말대로 밤일이 뛰어난가?”

“무엇이 궁금하신 건지 말씀해 주신다면….”

“나는 입을 열라고 허락하지 않았단다.”

힘겹게 연 말문은 금세 도로 닫혔다.

“가정 교사라더니, 썩 머리가 좋지도 않은가 봐. 하기야 평민 출신인데 얼마나 수준이 높겠느냐만.”

불퉁하게 중얼거린 루지아가 부채 든 손을 뻗었다. 접힌 부채 끝이 단정하게 묶어 둔 리본의 고리를 당기는 바람에 목을 감싸고 있던 옷깃이 느슨하게 벌어졌다.

놀란 리브가 몸을 뒤로 물리려다가, 루지아의 눈초리가 사나워지는 것을 보고선 겨우 참아 냈다. 루지아는 단순히 ‘무례한 사람’이 아니라, ‘무례한 말테 공작 영애’이니까.

리브가 속으로 루지아의 신분을 곱씹는 사이 앞섶이 아무렇게나 열리고 감춰져 있던 목덜미가 드러났다.

루지아의 시선이 드러난 살결에 닿았다. 정확히는 그 자리에 있을, 붉은 자국에.

“덕분에 그 남자가 고자는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그것 하나는 다행이네.”

웃음기 어린 음성은 귄력자 특유의 나른한 여유를 담고 있었다. 부채 끝이 리브의 목덜미에 남은 울혈을 조심성 없게 긁어 댔다.

“설마 다른 사내의 흔적은 아니지? 아무리 문란해도 그를 만나는 동안은 얌전히 지내는 게 좋을 텐데.”

턱을 괸 채 말을 이어 가던 루지아가 낮게 탄성을 뱉으며 새삼 깨달았다는 듯 어조를 높였다.

“아, 입을 열라고 허락하지 않았던가? 이제 허락할게.”

얼핏 보아서는 놀랍도록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리브는 그녀가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저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걸 금방 알아보았다. 루지아는 철이 없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제 위치를 알기 때문에 저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리브를 응시하는 도도한 시선이 저토록 차가울 리 없었다.

“…알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정확하게 물으시면 됩니다.”

“방금 묻지 않았니. 그거, 다른 사내의 흔적이냐고.”

“아마 이 흔적을 남긴 분은 영애께서 생각하시는 분일 겁니다.”

리브의 대답에 루지아가 입매를 끌어 올려 예쁜 미소를 지었다.

“디무스?”

루지아의 입에서 친근하다는 듯 흘러나온 후작의 이름이 낯설게 들렸다. 겨우 얼마 전, 제 입으로 힘겹게 뱉었던 ‘디무스’와 비교되어서 더욱 그랬다.

루지아의 이름을 부르는 후작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리브와는 달리 두 사람은 같은 세상을 살고 있으니까.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브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많은 걸 알아보신 것 같은데, 제게 진위를 확인하러 오신 건가요?”

“꽤 문란하게 살아온 것 같은데 까탈스러운 디무스의 눈에 어떻게 들었는지 신기해서.”

“문란하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머? 전에 일하던 일터에서 그 집 장남을 꾀어내려다가 쫓겨났다며? 지금 일하고 있는 저택에서도 남자 교사와 붙어먹었다고 하고.”

언제부터 제 과거가 이리도 동네방네 떠벌려지는 정보였을까. 권력자들이니 평민 여자의 뒷사정을 캐는 일이야 어렵지도 않았겠지만, 초면인 상대가 잊고 싶은 과거를 운운하고 있는 걸 보려니 속이 쓰렸다.

게다가 다음 말은 더 가관이질 않나.

지금 일하고 있는 저택이라면 펜던스 남작가였다. 펜던스 남작가에서 추문이라고?

이해할 수 없는 루지아의 말을 속으로 곱씹어 보던 리브가 문득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펜던스 남작 부부는 카밀이 리브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걸 알고 있지.

아, 그 사실이 입을 타고 옮겨 가며 새로운 추문으로 번졌구나. 리브는 우울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카밀에 대한 미약한 원망이 솟았다. 전부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더불어 아무렇지 않게 저를 깎아내리는 루지아를 향해서도 반발심이 일었다. 까마득하게 높은 상대방이라는 걸 알면서도 고운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말테 가문에서는 고상한 언사를 가르치지 않는 모양입니다.”

“고상한 언사는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나 사용하는 거지. 아랫것들은 그 수준에 맞는 단어를 사용해 주지 않으면 통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루지아가 눈매를 접으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리브의 소심한 반발에는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 듯.

“그러니 그대도 점잔 떨 필요 없어. 살다 보니 별별 정부들의 꼴을 봐 왔거든. 물론, 디무스의 정부는 처음이지만.”

특별히 마차 내부에 어떤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자꾸 입술이 메말랐다. 혀로 입술을 축인 리브가 덤덤하게 시선을 들어 루지아를 보았다.

“궁금하신 건 제가 디무스 님의 눈에 든 비결인가요?”

“그래.”

“그걸 제가 왜 말씀드려야 하나요?”

“…뭐?”

루지아가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리브는 후작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과 뒹군 저택에 손님을 들일 생각이 없다던 그의 말을. 루지아는 후작의 초대를 받지 못하는 손님이었다. 자신과 달리 말이다. 그건, 후작에게도 이 여자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루지아가 이내 다시 매끄러운 웃음을 지었다.

“어리석게도, 내가 디무스와 어떤 사이인지 모르나 봐.”

“죄송하지만 말테 공작 영애. 제가 알기로 영애께서는 디무스 님의 저택에 초대받지 못하는 손님이십니다.”

시종일관 오만한 여유를 잃지 않고 있던 루지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사라졌다. 무표정하게 변한 루지아는 조금 전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방금까지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 같은 모습을 꾸미던 것과 달리 지금은 그저 고고한 고위 귀족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저 싸늘한 모습이야말로 진짜 루지아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말버릇이 당돌하네. 디무스를 믿고 이러는 건가?”

“그분이 제 말버릇을 좋게 봐 주고 계십니다.”

리브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가늘게 뜬 루지아가 무미건조한 눈으로 리브를 훑어보다가,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한낱 정부에게 투기를 부릴 정도로 한가롭지 않아. 당장 네가 그에게 얼마나 귀염받고 있던 관심이 없다는 소리란다. 어차피 그 변덕은 곧 끝날 게 뻔하거든.”

그 말은 단순히, 디무스의 변덕스러운 성정을 가리키는 건 아닌 듯했다. 리브가 저도 모르게 루지아의 말을 곱씹었다.

“…곧 끝난다고요?”

“애초에 디무스는 여색에 빠져서 제 인생을 내 버릴 인간이 아니니까. 시골 생활에 슬슬 질릴 때도 되었고.”

무언가 리브가 모르는 다른 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뭘까?

불현듯 낭만적인 사랑에 관해 떠들던 밀리언의 말이 생각났다. 세기의 파혼을 한 말테 공작 영애와 미혼의 디트리언 후작의 관계.

아마 밀리언의 상상처럼 낭만적인 사랑이 들어 있지는 않으리라. 다만 루지아의 입에서 ‘관계’라는 단어가 나왔으니만큼, 두 사람은 확실히 무엇으로든 얽혀 있을 터였다.

루지아가 갑자기 부에르노를 방문한 것 또한 그와 연관된 일 때문일 테고 말이다.

리브는 그간 몇 번이나 후작에게 말했다. 당신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싶다고. 그리고 번번이 후작은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건… 리브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끝은 그분께 직접 듣겠습니다.”

루지아의 말대로일지도 모르겠다. 리브는 ‘끝’이 정말로 내일 당장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후작이 주는 관대함과 티끌 같은 배려심에 취해 막연하게 이 생활에 익숙해지려고만 했었는데.

사실 처음부터 그런 걸 노력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리석긴. 뭐, 그러니 이런 추문을 일으킨 것일 테지만.”

이를 악문 리브가 조용히 심호흡했다. 그녀는 루지아의 말과 태도를 전부 이해했다. 다만 버림받을 예정인 정부라고 해서 이렇게 조롱받는 게 당연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제가 영애의 질문에 답할 이유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분 눈에 들고 싶으시다면 개인적으로 노력해 보세요.”

“내가 디무스의 눈에 들기 위해 이런 걸 물어본다고 생각하니?”

무표정하던 루지아의 얼굴에 희미한 비웃음이 서렸다.

“네 답은 듣지 않아도 돼. 짐작대로 밤일이 전부인 것 같으니까. 너를 내 앞에 앉힌 건 순전히 호기심이란다. 불명예 제대를 하고 여기까지 쫓겨났으면 자중할 줄 알아야 하는데, 웬 삼류 쓰레기 같은 추문을 일으켰다기에 궁금해진 거지.”

불명예 제대?

뜻밖의 단어에 놀라 굳어 있는데, 루지아가 어이없다는 듯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나에게 노력을 하라니!”

촤르륵.

루지아의 손에 들려 있던 부채가 활짝 펼쳐졌다. 느슨하게 몸을 기대고 앉아 부채질하던 루지아가 말을 이었다.

“겁이 없으니 재미있긴 하네. 이만한 말재간이면 곁에 두고 심심할 때 부를 법해. 네가 디무스의 정부라는 게 안타깝구나.”

루지아는 정말로 우습다는 듯 작게 키득거리기까지 했다.

“나를 즐겁게 만들었으니 치하의 의미로 조언 하나 해 주마. 디무스는 곧 시골 생활을 청산할 거야. 그러니 늦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에게 크게 한몫 챙겨 두렴.”

나긋나긋한 음성이 사뭇 다정했다.

“애초에 너도 그의 곁을 평생 지킬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거 아니니?”

침묵하는 리브를 가소롭다는 눈으로 보던 루지아가 손수 마차 문을 열었다.

“일행이 기다린다고 했던가?”

살짝 열린 문을 턱짓으로 가리킨 루지아가 빙긋 웃었다.

“이만 가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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