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86)화 (86/138)

거짓말.

리브가 숨을 몰아쉬며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후작의 얼굴만 보아서는 꽤 냉담한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하게 가슴을 주무르고 있는 행동이나 내벽을 빠져나가지 않고 크기를 키워가는 성기는 그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흥이 식기는? 도리어 제법 흥분하고 있는 것이면 모를까.

후작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리브가 손을 뻗었다. 그녀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키스한 티가 나는 후작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살짝 쓸어 내자, 다물려 있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사이로 튀어나온 붉은 혀가 그녀의 손가락을 핥았다.

“후작님께서도 저를 ‘선생’이라고 부르시잖아요.”

“그래서 흥이 식었나?”

“이제 그럴 것 같아요.”

되바라진 리브의 반박에 후작이 미소 지었다. 곡선을 그린 입술 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는데, 그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가진 ‘후작’은 아무 가치도 없는 자리야. 하지만 ‘선생’은 아니지 않나?”

“후작님의 ‘후작’이 어떤 가치인지 말씀해 주신 적 없으니 저는 몰라요.”

젖은 백금발 머리카락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리브의 얼굴 위로 툭 떨어졌다.

“이번에도 여쭤봐야 대답해 주지 않으시겠죠.”

“호칭을 바꾸기 위해 그리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줄은 몰랐군.”

비웃듯 중얼거린 후작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입술을 묻었다. 잠시나마 식어 가는 듯했던 열기가 슬금슬금 달궈지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는가 싶던 손이 늘어져 있던 리브의 허벅지를 밀어 올렸다.

“그건 제 주제를 알기 위한 노력이에요. 괜한 연심 같은 건 필요 없으시잖아요.”

‘연심’을 운운한 건 반쯤은 오기였고 반쯤은 체념이었다. 충동적인 단어 선택이었는데, 뱉고 나니 그 의미가 선명하게 와닿아 괜스레 낯이 뜨거웠다.

말을 한 직후 리브는 반사적으로 후작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이 말을 듣고 제 마음을 못 알아챌 리 없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후작의 얼굴에서 경멸이나 혐오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재미있는 소리를 들은 양 눈썹을 씰룩였다.

“선생이라면 충분히 주제를 아는 연심을 키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마치, 연심을 품어도 좋다고 허락하는 투의 답변이었다. 리브가 정확한 의미를 물으려는데 후작이 몸을 움직였다.

한껏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몸뚱이가 벌써부터 버거웠다. 힘을 되찾은 성기가 내벽을 긁으며 반쯤 빠져나갔다.

자극을 받아 더욱 예민해진 음부가 얼얼하고 쓰렸다. 그러면서도 은근한 쾌감이 올라왔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신음을 되삼킨 리브가 가냘픈 음성으로 물었다.

“…제 마음까지 바라세요?”

“몸만 필요했으면 굳이 선생이어야 했을까?”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후작이 허리를 좀 더 뒤로 물렸다. 이제 두툼한 귀두만 질구에 살짝 걸치고, 나머지는 전부 빠져나갔다. 거대한 기둥이 빠져나가자 어쩐지 배 속이 허전해진 느낌이 들었다.

거리를 두고 리브를 내려다보는 후작의 눈동자에는 은은한 욕정과 본성과도 같은 오만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선생이 창부와 다를 게 무엇인가. 선생은 스스로의 가치를 그렇게 낮추고 싶나?”

리브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정말로 모르는 걸까? 아돌프가 처음 피임약을 가져다주었던 그날부터, 그녀는 이미 창부나 다름없는 처지였음을?

“그럼 후작님의 이런 취급은, 제 가치를 높여 주는 건가요?”

“누구도 내게서 선생과 같은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건 확실하지.”

“그러니 만족하면 된다고요?”

“충분히 과분한데 무얼 더 원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는 대화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세게 허리 짓을 했다. 리브의 투정 같은 건 어차피 아무 소용 없는 빈말이라고 여기는지, 대화를 마무리할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가장 깊은 곳까지 사납게 찔러 오는 단단한 성기에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리브가 헛숨을 들이켰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질척한 혀가 파고드는 바람에 숨은 금방 부족해졌다. 입술을 금세 떨어져 나갔다.

휘몰아치듯 시작된 쾌감의 소용돌이에 몸을 맡기며, 리브가 두 팔로 후작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곤 순순히 그가 바라는 대로 속삭였다.

“…흐으, 디무스.”

“하.”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사내의 손아귀가 리브의 팔목을 잡아 거칠게 짓눌렀다. 새파란 눈동자가 위험하고 음험한 빛으로 빛났다.

“훨씬 낫군.”

감히 그의 이름을 불렀는데 훨씬 낫다니. 그는 제 말이 리브에게 어떤 기대와 욕심을 불러일으키는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방금 리브가 ‘주제를 알기 위한 노력’에 관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리브는 조금 지쳤다.

아무래도 그녀가 맞닥뜨린 태풍은 갈대의 얄팍한 뿌리로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강대했던 모양이다.

이상하기도 하지. 그가 주는 대로 받아들이고, 그를 욕심 내는 제 마음 또한 인정하기로 했는데….

유연한 갈대처럼 굽히면 거센 태풍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거 아니었나? 리브는 굽힐수록 도리어 자신이 점점 더 바스러지고 있는 것 같다고 여겼다.

유수에 휩쓸려서 금이 가고 부서져 가는 돌멩이가 된 기분이었다.

복잡하게 이어지는 상념조차 곧 밀려드는 쾌감에 휩쓸려 흐려졌다. 강렬한 자극에 더는 생각을 이어 갈 여유가 없었다.

혹은, 체념일지도 모르고.

***

오랜만에 부에르노로 외출을 했다. 호숫가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석하기로 한 밀리언과 코리다의 약속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리브는 코리다의 보호자로서 동행했다. 이미 티에리에게 돌아다녀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지만 이렇게 외출을 하게 두려니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코리다는 잔뜩 들뜬 얼굴로 이동하는 내내 창문에 매달려 있었다.

“잠깐 기다려, 코리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리브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혹시나 먼저 와 있을지 모르는 밀리언을 찾기 위해서였다. 축제라더니 사람이 많아서, 마차에 앉아 가만히 기다리면 만나지도 못할 것 같았다.

호숫가를 방문한 사람들이 타고 온 마차가 한쪽에 늘어서 있었다. 리브는 펜던스 남작가의 마차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던 리브가 뒤따라 오는 시선을 느낀 건,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저 여자….”

“…후작님의….”

“오페라….”

드문드문 들려오는 수군거림 사이로 뻔한 단어들이 섞였다. 한번 인식하고 나니 그 소리는 더욱 쏙쏙 귓가에 박혀 왔다.

“가정 교사래.”

“만나던 남자가 있었다던데.”

“염문설을 뿌리고 다니는 가정 교사라니, 행실이 너무 문란한 거 아닌가.”

정확하게 누구라고 지칭하지 않고 있을 뿐, 대화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리브가 덤덤한 시선으로 다시 마차를 훑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곧 펜던스 남작가의 문양을 찾아냈다. 리브가 재빨리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마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황한 눈으로 비어 있는 마차를 보고 있는데, 마부석에 앉아 있던 하인이 내려 리브에게 다가왔다.

“오늘 아가씨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부득이하게 약속을 취소하셨습니다.”

밀리언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코리다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졌을 수도 있겠지. 밀리언이 아무리 건강해도, 한 번쯤은 그럴 수 있으니까. 전에도 아파서 수업을 취소했던 전력이 있지 않던가.

리브는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아픈가요? 나오지 못할 정도라니, 걱정되네요.”

“네, 당분간 외출이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그건 일개 하인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 점을 지적해 봐야 소용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밀리언이 어서 건강해지길 빌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님께서 조만간 뵙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인이 이곳까지 온 목적은 밀리언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작 부인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었다.

리브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펜던스 남작 부인도 후작과 리브의 소문을 들었을 테니, 언제고 만나서 대화하긴 해야 했을 터다.

“그럼 저는 이만.”

갑작스럽게 취소된 약속을 코리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까.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는 펜던스 남작가의 마차를, 리브는 다소 막막한 심정으로 응시했다. 자신이라도 코리다를 데리고 돌아다녀야 할까.

오는 내내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있던 코리다였으니 둘이서라도 구경하자고 하면 기쁘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왜 하필 후작님께서는….”

이런 소리가 들리는데 어떻게 코리다를 데리고 돌아다니겠나. 자신의 구설수에 코리다까지 휘말리게 할 수는 없었다. 수군거리는 사람이 한둘도 아닌 이런 장소에서는 더욱. 리브는 코리다가 기다리고 있을 검은 마차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저기….”

막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누군가 리브에게 다가왔다. 신문팔이 소년이었다.

“어떤 분이 전해 드리라고 하셔서요.”

소년이 리브에게 곱게 접힌 종이를 건넸다. 답장을 받아 갈 필요는 없었는지, 소년은 종이를 건네고 곧장 떠났다.

얼떨떨한 눈으로 후다닥 가 버리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던 리브가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는 적힌 문장은 아주 짧았다.

‘백색 사륜마차.’

글귀를 멍하게 보던 리브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많은 마차 사이로 유독 눈에 띄는 백색 사륜마차가 보였다. 창문에는 붉은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서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저 마차에 탄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리브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후작이었다. 그는 종종 마차를 타고 리브를 보러 오곤 했으니까. 그가 아니고서는 이런 식으로 리브를 불러낼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리브가 알기로 후작은 언제나 검은색 마차를 탔다. 저렇게 요란스럽고 화려한 백색 마차가 아니라.

누군지 모를 사람의 부름에 응하는 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마차가 너무 비싸 보이는 게 문제였다.

무시할만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 아닐 것 같은데.

주저하던 리브가 결국 백색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마차 옆에 서 있던 풋맨이 리브를 발견하고는 마차 안쪽으로 무언가 보고를 하는 게 보였다.

쭈뼛거리던 리브가 조금 더 가까이 접근했다. 커튼이 들썩거리더니, 마차 창문이 조금 열렸다.

“동석을 허락하마.”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마차 안쪽에서 들려왔다.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살짝 열린 마차 창문을 바라보던 리브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죄송하지만 누구신가요?”

리브의 물음에 마차 옆에 서 있던 풋맨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감히 아가씨의 정체를 묻다니!”

“적당히 해, 폴. 놀라서 도망가면 어쩌려고.”

“하지만 아가씨….”

아가씨라고 불린 여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희고 고운 손이 커튼을 조금 더 젖히자, 비로소 안쪽에 앉은 이의 얼굴이 보였다. 탐스러운 블론드가 유독 잘 어울리는 미인이 리브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테 가문은 무지를 비난하지 않지. 용서해 주마.”

벌꿀 같은 블론드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 리브는 단숨에 상대의 정체를 알아챘다.

루지아 말테. 곧 방문할 추기경과 함께 순례를 다니고 있다던 말테 가문의 영애였다.

“아가씨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는 거지?”

풋맨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리브를 재촉했다. 놀란 얼굴로 굳었던 리브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빡였다. 상대방의 정체를 알았다고 하여 당장 마차에 탈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자 하신다면….”

“이제 보니 무지한 게 아니라 건방진 게로구나. 그가 버릇을 이리 들여 둔 모양이지?”

낭랑한 루지아의 음성에 미세한 짜증이 섞였다. 짐짓 관대함을 가장하고 있던 눈동자가 차가운 눈으로 리브를 훑었다.

“말테의 시간은 아무에게나 길게 내어줄 정도로 값싸지 않단다.”

리브가 마른침을 삼켰다. 창백하게 굳은 리브의 얼굴을 보며 그나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루지아가 창문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달칵, 마차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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