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84)화 (84/138)

베리워스 저택의 사냥터 옆에는, 적당한 크기의 사격장도 따로 있었다.

사냥하러 갈 수 없는 경우에 이용하려고 만들어 둔 장소였는데 실질적으로 드나든 적은 전무했다. 사격장을 찾아 실력을 갈고닦을 정도로 제 능력에 대한 애착을 두고 있지 않으니까.

다만 있는 것을 없애기 귀찮아서 그냥 두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쓸모를 찾게 되었다.

저택에 쌓여 있는 다양한 총기 중 필립이 찾아낸 건 소형 권총이었다. 짙은 고동색 나무와 쇠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평소 디무스가 장난감이나 다름없다고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리브에게는 다를 테지.

사격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리브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녀는 폭력적이거나 과격한 걸 썩 좋아하지 않는 눈치긴 했다.

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이 그녀에게 들러붙을 텐데, 언제나 평화롭게 대화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잡아보게.”

설마 하는 얼굴로 사격장을 둘러보던 리브는 제 앞에 놓인 총을 보곤 질색했다.

“제가요?”

“그래, 선생이. 나는 이렇게 작은 권총을 사용하지 않아.”

“갑자기 권총은 왜….”

그녀는 디무스의 의도를 짐작해 보려는 듯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추측을 입 밖에 내놓았다.

“저와 함께 사냥을 다니고 싶으신가요?”

“선생이 라이플을 다룰 수 있게 되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데.”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리브가 머쓱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는 하나 직설적으로 지적을 받으니 내심 불퉁해진 모양이었다. 의식하지 못한 미소를 지으며 리브를 보던 디무스가 턱짓으로 권총을 가리켰다.

“이런 작은 권총으로는 토끼도 못 잡을 거고.”

“토끼도 못 잡을 권총을 왜 쥐라고 하시는 건가요?”

“토끼는 못 잡아도 쥐새끼 정도는 쫓아낼 수 있을 테니까.”

소형 권총은 여성들의 호신용 무기로도 사용되고 있었다. 핸드백에 넣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다 보니 쏠 수 있는 총알은 두 발에 사정거리도 아주 짧지만, 다루기 쉽다는 게 장점이었다. 그 정도면 리브도 어렵지 않게 사용법을 익힐 테지.

“가만 보니 선생 주변에 꼬이는 게 워낙 많아야 말이지.”

물론 리브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건 디무스의 사람들이고, 리브의 생활 반경은 디무스가 허용한 범위 내였다.

그러니 이것은 강도보다는… 엘레오노르의 애송이나, 빚쟁이 화가 같은 찰거머리들을 상대할 때 사용하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혹은 앞으로 등장할 또 다른 쥐새끼들이라든가.

“내가 구하러 갈 시간 정도는 스스로 벌어 두어야지 않나.”

리브가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오페라 극장에서 받았던 관심을 떠올린 듯했다. 그녀는 이내 본인에게 이 소형 권총이 필요한 이유를 납득했다.

조심스럽게 총을 집어 든 리브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더 가볍네요.”

“지금은 총알을 장전해 두지 않았어.”

집어 들기만 했을 뿐, 선뜻 무언가를 하지 못하던 리브가 그제야 권총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관찰했다.

디무스는 총을 쥔 리브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어설프게 잡은 손가락 위치를 바로잡아 준 그가 총구를 자신의 복부로 이끌었다. 놀란 리브가 잡힌 손에 힘을 주며 버텼으나, 디무스의 힘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이건 사정거리가 길지 않으니, 제대로 된 위력을 내려면 가급적 가까운 거리에서 쏴야 해. 소매에 숨기고 있다가, 불시에 급소를 향해 쏘는 거지. 한… 이쯤에서.”

리브의 손가락 위로 제 손가락을 겹쳐 방아쇠를 당기자, 철컥하는 소리가 났다. 총알이 들어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리브가 소스라치게 놀라 손에 힘을 뺐다. 디무스가 작게 혀를 차며 주의를 주었다.

“실전에서는 절대 놓으면 안 돼.”

권총은 여전히 디무스의 복부에 닿아 있었다. 총신이 아주 짧은 탓에 마주 선 디무스와 리브 사이의 거리도 아주 가까웠다. 지척에서 내려다보니 리브의 표정 변화를 더욱 세세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리브는 당장이라도 권총을 던져 버리고 싶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은 디무스 때문에 무력하게 붙들려 있었다. 결국 체념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작은 것으로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해치는 무기로 사용할지, 방어하는 무기로 사용할지 결정하는 건 인간의 손이네.”

디무스가 살짝 고개를 수그렸다.

“선생이 바라면 이 권총은 누군가를 해치지 못해. 그러니 이런 쇳덩이에 지레 겁먹을 까닭도 없고.”

제 손에 들린 권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브가 고개를 들었다. 디무스가 가까운 거리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까닭에, 그녀가 고개를 들자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자세가 되었다.

디무스는 지난밤에도 랑제스 저택에서 그녀와 뒹굴었다. 기껏해야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일이었는데, 이렇게 코앞에 두니 다시금 속이 들끓었다. 오늘은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말이다.

그가 얼굴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려 입술을 맞물리려는 순간이었다.

“후작님의 무기는 어느 쪽이었나요?”

여린 숨결과 함께, 리브가 말문을 열었다. 디무스의 움직임도 뚝 멈추었다.

“궁금해요. 어느 군에 계셨는지, 아주 유능하셨을 것 같은데 왜 이런 곳에 계신 건지, 왜 누구도 후작님의 과거를 모르는 건지….”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조금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욕심이에요. 후작님에 대해서.”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은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뜨거운 숨을 뱉었다. 물러서지도, 그렇다고 키스를 하지도 않은 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던 디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많이 알아봐야, 서로 간에 불필요한 위험요소가 생길 뿐이야.”

디무스가 직접 말해 주지 않는 한 리브가 그의 과거를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녀에겐 디무스의 뒤를 캘 수 있는 지위나 재력이 없으니까. 그래서 더욱 궁금해하는 건지도 몰랐다.

리브 역시 남들과 같은 환상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가 여느 왕실의 숨겨진 사생아라는 흥미로운 환상 같은?

“저는 후작님께서 평생 군림하며 살아오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더군.”

디무스는 제 외모가 어떻게 보이는지 잘 알았다. 살면서 외모의 득을 크게 보기도 했고, 이 외모를 이용해서 뜻하는 바를 손쉽게 얻기도 했다. 그가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감히 거리에서 태어나 정착할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디무스의 모습 따위를 상상하지 못했다.

착각을 정정해 줄 이유가 없으므로, 디무스는 한 번도 제 입으로 누군가에게 제 과거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닌 것 같아요.”

디무스가 고개를 조금 뒤로 물려 리브와 눈을 마주쳤다.

“정말 군림하고 살아오셨다면 몸에 그런 흉터들이 있었을 리가 없으니까요. 후작님께서는 제 생각보다 더 험난하게 살아오셨을지도 모르죠.”

저를 연민하는 건가.

순간적으로 든 의문은 금세 사라졌다. 리브의 눈동자 그 어디에도 측은함 같은 건 엿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그녀의 처지에 어디 그를 불쌍히 여길 여유가 있겠는가. 리브의 과거사를 알면서도 잠시나마 든 생각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연민이 아니라면 새삼스럽게 과거를 운운하는 이유가 뭘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욕심을 내게 돼요. 장미가 생각보다 더 가까이에 피어 있는 것 같아서. 손을 뻗어도 될 것 같아서요.”

디무스는 이제 리브에게서 완전히 물러났다. 단단히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아주자, 리브가 총을 쥔 손을 스르륵 내렸다.

“지금 보니 선생은 나에게만 용감하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격술이고 뭐고 다 나중으로 미루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지금은 놀랍도록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디무스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용기를 남발하면 그것은 만용에 불과하다네.”

적당한 표적물 몇 개를 가져와 쏘게 하면 감을 잡겠지.

무심하게 사격장을 둘러보며, 디무스가 감흥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흉터들은 그냥 전투의 흔적이야. 곳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전쟁들 말이지. 선생 말대로 나는 죽음에 익숙하고, 늘 그 곁에 있었으니까. 그 시간 속에 특별한 건 없어.”

리브는 눈치가 빨랐다. 디무스의 말 속에 선명하게 그어진 선을 알아챈 그녀는 화제를 더 이어 가는 대신, 묵묵히 들고 있는 총으로 관심을 돌렸다.

살짝 수그린 얼굴이 미묘하게 우울해 보이긴 했지만 물러나야 함을 인지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굳이 매 순간 용감해질 필요는 없어. 주어지는 명령에 충실하기만 해도 훌륭한 병사가 될 수 있으니, 상심하지 말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리브는 조금 쓰게 웃을 뿐이었다.

***

어느 순간부터 후작은 이 저택에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정해 주는 느낌이었다.

예기치 못하게 또 외박하게 된 것도 모자라, 그의 목욕 시중을 들게 된 리브는 생각했다. 랑제스 저택에 계속 머무르게 될 경우 이 저택 내에서 맡게 되는 역할이 아마도 이런 것일 터라고.

후작의 옷 시중을 들고, 목욕 시중을 들고, 그의 침상에 오르는 일. 그러다가 이따금 그가 사 주는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그와 시간을 보내는 그런 역할.

그가 타인에게 제 맨몸을 내보이는 걸 극도로 꺼린다는 건 이제 리브도 알았다. 그런 의미에서 리브에게만 옷이나 목욕 시중을 맡기는 건 얼핏 특별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좋아해야 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리브는 그가 저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절절하게 체감했다. 단어를 뱉지 않았을 뿐, 모든 상황이 명확하게 하나의 정의를 내리고 있었다.

“선생은 시중을 드는 데에 영 재주가 없군.”

나지막한 목소리에 리브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욕조 속에 몸을 누인 후작이 언젠가부터 욕조 옆에 걸터앉은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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