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
오늘 디무스가 착용한 장갑은 며칠 전 리브가 조심스럽게 선물한 것이었다.
평소 디무스가 사용하는 장갑과 비교하면 썩 좋은 제품이 아니었으나, 놀랍도록 잘 맞고 착용감이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리브가 그의 손 크기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게 기분 좋았고, 그에게 어울리는 걸 찾느라 고민했을 그 시간이 짐작되어 흡족했다.
그것만으로 디무스가 이 장갑을 사용할 이유는 충분했다.
“착용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착용하라고 준 게 아닌가?”
“물론 그렇지만, 후작님께는 더 좋은 장갑이 많이 있으실 테니까요.”
리브가 묘한 눈으로 장갑을 응시했다. 그녀는 정말로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그걸 뻔히 알면서 왜 장갑을 선물했나?”
“…자기만족이요.”
그것은 참 신기한 대답이었다. 또한 생각해 보지 못한 대답이기도 했다.
“후작님께서 그러셨듯, 저도 그랬을 뿐이죠.”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인 리브가 디무스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런 뒤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거두었다.
이제 정말 후작의 파트너가 되어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리브의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목을 훤히 드러내는 드레스의 디자인 때문에 마른침을 삼키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극장 쪽을 확인하던 리브가 미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사람이 별로 없네요?”
“그야, 오페라가 시작했으니까. 관람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나?”
크게 뜬 눈을 보니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설마 오페라 시작에 맞추느라 사람들 틈에 휩쓸려서 입장할 거라고 생각했나?”
빠르게 눈을 깜빡이던 리브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후작님께서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시겠죠.”
“그래. 궁금한 게 풀렸으면 이제 진짜 입장했으면 하는데.”
리브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한적한 극장 건물 앞에 약간 남아 있던 몇몇 사람이 디무스를 발견하고는 크게 놀라며 수군거렸다.
그들은 이내 디무스의 곁에 서 있는 리브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고 멀찍이 서서 힐끔거리는 꼴들이 꼭 놀란 토끼들 같았다.
태연하게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디무스가 힐끗, 곁을 보았다. 혹 고개라도 푹 숙이고 걷진 않을까 싶었는데, 그녀는 꽤 의연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긴장한 내색을 완전히 숨기진 못했으나 그녀가 받고 있을 부담감을 고려하면 썩 훌륭한 태도라고 평가할 만했다.
역시, 그녀라면 어떤 자리에서든 제대로 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디무스가 흡족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오페라는 훌륭했을 것이다.
현장에서 직접 관람했음에도 이렇게 평가하는 이유는, 디무스가 극에 전혀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페라에 집중하기에는, 그보다 더 흥미로운 파트너가 지척에 앉아 있었으니까.
불이 꺼진 관객석. 그곳에 앉아 있던 많은 이들이 오페라글라스를 통해 그들이 앉은 박스석을 훔쳐보았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수많은 유리알을 리브가 알아챘는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다만, 눈부시게 빛나는 무대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앉아 있었다.
고고하게 무대를 응시하는 옆얼굴이 그간 보지 못했던 또 다른 모습이라, 디무스는 질리지도 않고 리브를 감상했다. 이따금 리브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리브는 살짝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순종적으로 앉아 있었다.
아마 오페라 관람객들은 오늘 귀가하는 내내 극의 내용을 논하는 대신 ‘디무스 디트리언 후작이 오늘 대동한 여성에게 얼마나 푹 빠졌는지’ 따위를 떠들어 대느라 바쁘리라. 아울러 그 여성이 얼마나 의외의 인물인지도.
부에르노처럼 작은 시골 도시일수록 이런 소식은 빨리 퍼지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루지아 역시 전해 들었을 테고.
디무스는 루지아와 마주치지 않았다. 찰스의 보고에 의하면 그녀가 오페라 극장까지 찾아온 건 확실한 듯했다. 다만 대놓고 리브를 곁에 세운 디무스를 보고선 선뜻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리브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는 상태일 테니 당연했다. 게다가 루지아의 자존심이라면 곁에 여성을 대동한 디무스에게 본인이 매달리는 모양새를 보이고 싶지도 않았을 테고.
리브의 정체를 알고 난 뒤에는 더 큰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리브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날파리를 쫓아내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의 취향에 꼭 맞는 모습으로 나타난 와중 제 역할을 이리도 잘 마무리해 주었으니 디무스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선뜻 그녀와 함께 랑제스로 귀가하기로 했다.
“선생의 여동생은 혼자 집을 볼 줄 아는 나이 아닌가?”
잠깐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리브는 순순히 디무스의 뜻에 따랐다. 아름답게 꾸민 모습으로 움직이는 리브는 잘 빚어 놓은 조각상 같았다.
앞으로도 쭉, 곁에 두고 감상하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오페라는 어땠나?”
“멋졌습니다.”
랑제스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 넌지시 건넨 물음에 리브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멋졌다고 답하는 사람치고는 다소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대답한 직후 리브 역시 제 감상이 너무 건조했음을 깨달았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좀 더 긴 평가를 덧붙였다.
“다만 상류 계급의 관람 예절이 이런 거라면, 굳이 현장에서 극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디무스가 눈매를 접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특수한 경우지.”
“그렇겠죠. 덕분에 첫 오페라 관람에 대한 추억이 훼손될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에요.”
“주변 시선을 그리 신경 쓰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후작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많이 신경 쓰고 있습니다.”
슬쩍 내리깐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였다.
“저로서는 그 시선들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어서.”
“답지 않게 연약한 소리를 하는군.”
디무스의 대답을 들은 리브가 입매를 끌어 올렸다. 다소 기운 없는 미소였다.
“후작님께는 해도 되지 않을까요?”
화장 때문인가? 리브의 안색은 창백했다. 본래 그녀의 피부가 흰 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생기가 없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 핏기 없는 얼굴이 그녀를 더욱 조각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생기 없는 조각상.
소유자가 의도한 자리에서 우두커니 놓여 있는, 아무런 자유 의지를 가지지 않는 조각상.
“제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분인데, 이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나요?”
아니, 그녀는 조각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 있는 인간이지. 저 하얀 피부 아래에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 말이다.
디무스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창백한 쪽보다 약간이라도 혈색이 도는 편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꽃물이 들 듯 번지는 홍조가, 도자기 같은 매끈하고 흰 뺨보다 보기 좋다고.
“…오늘의 관람이 선생에게는 생각보다 더 부담이었던 모양이야.”
디무스가 손을 들어 리브의 뺨을 감쌌다. 붉게 칠한 입술을 엄지로 쓱 문지르자, 장갑에 빨간 염료가 묻어났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피로가 풀릴 걸세. 필립에게 명하면 금방 준비할 테니 조금만 참도록.”
“관대한 배려에 감사드려요.”
“감사하면 안 될 텐데.”
겨우 두어 번 문질렀을 뿐인데 입술 색이 퍽 옅어졌다. 그것만으로도 화장은 훨씬 연해 보여서, 디무스가 아는 바로 그 리브 로이데스가 드러났다.
“피로가 풀리면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걸 모를 리가요.”
리브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조그맣게 터진 이 웃음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아마도 그건 꼭 봄에 갓 틔운 작은 꽃망울처럼 생겼을 것 같다. 탐스럽게 피어날 준비를 하며 꿈틀거리는 꽃망울.
입술로 꽃을 피워 내는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어처구니없는 감상이라고 여기면서도, 디무스는 제 평가가 꽤 객관적이고 정확하다고 결론 내렸다. 우습게도 말이다. 동시에 이러한 사실을 다른 누군가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라도 리브의 이런 재주를 알면 탐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손을 미끄러뜨려 반짝이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던 디무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조만간 모자점도 가야겠어.”
장신구와 드레스 정도로는 부족했다. 좀 더, 제 것이라는 티가 날 수 있도록 치장해야겠다. 괜찮은 모자점이 어디더라? 더불어서 몇 가지 다른 것도 사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지, 일단 쥐새끼들이 접근했을 때 스스로 대처할 수 있도록….
“내일 다른 일정이 있나?”
“없습니다.”
“잘됐군.”
디무스의 머릿속에 빠르게 내일 일정이 결정되었다.
저택에 여성용 총이 있는지부터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