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82)화 (82/138)

“언니이….”

극장과의 거리를 머릿속으로 가늠해 보며 탁상시계를 연신 확인하고 있던 리브가 코리다를 돌아보았다. 코리다는 발갛게 상기된 두 뺨을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언니 너무 예뻐….”

“그게 뭐야.”

“진짜야! 오늘 그 극장에 방문한 사람 중 언니만큼 예쁜 사람은 없을 거야! 후작님도 오페라를 볼 정신 같은 건 없으실걸?”

자신이 아는 모든 단어를 이용해서 저를 칭찬하는 코리다의 모습에 리브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코리다의 눈은 객관성을 상실했고, 고로 저 말의 절반 이상이 과장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듣기 좋은 건 사실이었다.

그래, 평소와 달리 오늘 유독 화려한 건 사실이니까.

리브가 힐끗, 거울을 보았다. 혈색 없던 얼굴은 화장으로 그럭저럭 괜찮았고, 평소 깔끔하게 올려 묶기만 하던 머리카락도 구불구불하게 해 늘어뜨렸다. 머리 장식이 다소 수수했으나, 장신구가 화려하니 오히려 수수함으로 균형을 맞추었다고 해도 설득력 있었다.

목과 빗장뼈 부근을 덮는 목걸이의 형태 때문에 필연적으로 드레스는 어깨선이 다 드러나는 종류의 것을 입어야 했다. 평상복과 비교하면 노출도가 상당히 높았으나, 요즘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형태이기도 했다.

매끄러운 크림색 실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드레스는 허리를 바짝 조이고 있어서 은근히 몸매를 드러내기도 했다. 함께 입을 케이프가 없었다면 부담스러워서 집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구두는 어때? 발 아프지 않아?”

당연하게도 의상을 맞출 때 새 구두도 샀었다. 맞춤 의상에 어울릴 법한 무난한 구두였다. 걷는 게 일상인 리브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굽 높이와 착화감이었으나 이런 옷을 입고 낡은 가죽 신발을 신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밑단으로 앞코라도 드러나면 큰일이니까.

“신발이야 신다 보면 길이 드는 법이니까 오늘 열심히 걸어야지.”

뭐든 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차림으로 집을 나서는 일도,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

오페라 시작 전에 입장하면 많은 사람과 어깨를 부딪쳐야 하리라.

그래서 일부러 오페라 시작 직후에 입장할 수 있도록 시간을 잡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생각보다 조금 일찍 극장에 도착하고 말았다.

느긋하게 나섰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움직였던가?

디무스가 마차에 앉은 채로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리브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바깥에는 오페라 관람을 위해 찾아온 관람객들이 소란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반짝이는 극장 건물을 배경으로 한 관람객들은 저마다 화려하고 우아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대부분이 귀족이거나, 부유한 상류층으로 보였다.

디무스는 저 속에 리브가 서 있는 상상을 해 보았다.

이제껏 그가 보아 온 리브는 언제나 허름하고 남루한 차림이었다. 하다못해 펜던스 남작가에서 마주쳤을 때조차 말이다. 아마 가정 교사 일을 할 때 입는 옷이 제가 가진 가장 좋은 옷일 터인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해진 소맷부리나 치맛단까지는 숨겨지지 않았다.

그런 차림으로 저 속에 서 있는 리브라니, 당연하게도 탄식이 나올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입으라고 사 준 옷과 착용하라고 준 장신구를 두고도 궁상맞은 성격이 발동해서 괜히 평소 같은 차림으로 오는 건 아니겠지.

디무스는 그녀의 집 앞을 들러서 미리 확인할 걸 그랬다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그로서는 드물다 못해 천지가 뒤집힐 만큼 놀라운 감정의 흐름이었으나, 디무스는 이러한 제 상태를 인지하지 못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지금이라도 마차를 돌릴까.

“후작님.”

점점 더 별난 방향으로 치닫는 디무스의 생각을 끊은 것은 찰스였다. 어두운 코트를 걸치고 옷깃을 바짝 올린 찰스가 마차의 열린 창문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는 이쪽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재빨리 마차에 올랐다. 창문을 닫고 대화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한 그가 본격적인 보고를 시작했다.

“말테 공작 영애가 이곳으로 이동 중임을 확인했습니다.”

디무스가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내 일정을 유출했는지는 확인했나?”

“네. 로만 경이 즉각 신병을 확보했습니다.”

“오랜만에 실력을 보였군.”

대체로 디무스가 거느린 사람들은 그의 곁을 오랫동안 지켜 온 수하들이었다. 특히 지척에 두고 부리는 보좌관이나 사병, 그 외 주요 직급을 가진 고용인 중 일부는 군에서부터 연을 맺었다. 찰스와 로만도 디무스의 군 참모 경력을 가지고 있고.

그중 로만의 경우 실전에 출중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호위를 비롯한 현장 전반을 맡기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이곳에서 신분을 드러낼 것으로 보입니다.”

“…루지아 말테의?”

디무스의 목소리에 깃든 의혹을 알아챈 찰스가 딱딱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지그힐트 가문 쪽과의 파혼이 지저분하게 마무리됐다고 합니다.”

“아, 스캔들이 필요하다고.”

디무스가 냉소적으로 입술을 비틀었다.

“나쁘지 않은 발상이군. 내 이름이라면 스테판 지그힐트의 자존심을 긁기에도 좋고.”

파혼했다고 해도 명색이 예전 약혼자인데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하기야, 루지아 말테는 옛날부터 그랬다. 늘 태세 전환이 빠르고 약삭빠르게 움직이는 여자였지.

물론 그녀가 지금 의도하고 있을 스캔들 또한 단순히 본인의 파혼 소식에 쏠리는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만은 아닐 터였다. 그녀가 염두에 두고 있을 이득이 뻔히 보였다.

“말테는 칼리오페 추기경이 확실히 그라티아가 된다는 확신을 가진 모양이야.”

스캔들부터 일으켜서 디무스의 이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는 걸 보니, 그들은 계산을 마친 듯했다.

분명 몇 년 전만 해도 말테는 어거스틴 추기경의 가능성을 더 높이 쳤을 텐데. 그 어거스틴 추기경의 가장 큰 뒷배가 바로 지그힐트였다. 돌변한 말테의 태도에 지그힐트가 얼마나 노발대발하고 있을지 선했다.

그리고 스테판 지그힐트.

그와는 제법 지긋지긋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사관 학교에서부터 이어진, 지루하고 시시한 인연. 그건 기억을 되살릴 가치도 없었다.

“하기야, 말테의 고고한 자존심으로 머저리 같은 스테판을 참아 주는 것도 한계였겠지.”

조소를 흘리며 중얼거린 디무스가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분침의 위치를 확인한 디무스가 창문을 살짝 열었다.

조금 전까지 시끌시끌하던 거리가 제법 한적했다. 오페라가 시작된 것이다.

조용해진 거리에 시선을 둔 채로 디무스가 찰스에게 명령했다.

“루지아는 말해 둔 대로, 적당히 늦게 도착하도록 처리해.”

“아예 막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보다는 내 곁에 얼마나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는지 보여 주는 게 더 효과가 좋을 것 같군.”

디무스의 대꾸에 찰스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침묵했다.

물론 리브는 굳이 명시하자면 아름다운 여성이었으나, 루지아 말테의 미모를 생각하면…. 아마 그런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다.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찰스를 가볍게 무시한 디무스가 곁에 두었던 지팡이를 집어 들고선 마차에서 내렸다.

그의 마차 바로 옆, 지금 막 도착한 것으로 보이는 검은색 마차의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심스러운 구두 끝이 발판을 더듬었다.

디무스가 사 준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저 드레스도, 장신구도. 느리게 시선을 들며 발끝부터 찬찬히 확인한 디무스가 깊이 숨을 들이켰다.

잠깐이나마 했던 우려가 무색하게도 리브는 그의 뜻대로 꾸미고 나왔다.

“후작님? 먼저 와 계셨나요?”

리브는 발밑을 살피며 내리느라 디무스의 존재를 조금 늦게 알아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다. 화려한 드레스나 장신구를 의식해서 조금 짙게 한 화장이나, 늘 단정하게 묶거나 아예 풀어 버리던 머리카락을 다르게 꾸몄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혹은 자신이 내어 준 것들에 휘감긴 모습이라서 그럴지도.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 로이데스 양?”

디무스의 뒤쪽에 서 있던 찰스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리브에게 아는 척을 했다. 디무스에게 머물러 있던 리브의 시선이 찰스에게로 향했다.

이제껏 리브를 상대해 온 이는 아돌프라, 찰스와는 사실 초면이었다. 누군지 모를 이가 자신을 아는 척한다는 사실에 리브는 경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누구시죠?”

“아, 저는… 후작님을 모시고 있는 찰스….”

찰스가 그답지 않게 어물거렸다. 디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냉담한 눈초리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만 가 보도록.”

“네?”

어둑한 와중에도 찰스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는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디무스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가라앉았다. 그 변화를 코앞에서 확인한 찰스가 허둥지둥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저는 가 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후작님!”

찰스가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부리나케 멀어지는 찰스를 탐탁잖게 노려보던 디무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리브는 통성명하다 말고 가 버리는 찰스를 당황스럽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디무스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 제 팔 위에 걸치듯 올렸다.

“들어가지.”

자신이 잡은 팔로 시선을 옮긴 리브가 흠칫 놀랐다. 그녀의 눈길이 디무스의 손에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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