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은 그 태도 때문인지 리브는 그의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를 멀뚱멀뚱 보며 깜빡이는 큰 눈이 제법 귀여웠다.
덕분에 엘레오노르의 애송이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수직으로 하락했던 디무스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고.
“그 화가만 사라지면 선생이 누드모델을 했다는 걸 퍼뜨릴 인간은 없을 텐데. 어려운 일도 아닐 걸세.”
브레드는 이미 빚더미에 앉은 인간이었다. 거리에서 갑자기 급사한다고 한들 누가 이상하게 여기겠는가. 그의 죽음은 눈길을 끌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죽음에도 가치가 매겨지는 세상인 것을.
“말해 보게. 내가 그를 죽여 줬으면 좋겠어?”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가냘프게 나온 음성은 희미한 떨림을 동반했다.
“어째서? 죽이는 것보다 더 깔끔하고 편한 해결책이 또 있나?”
“저는 그저 브레드와 저의 관계가 무탈하게 마무리되길 바랄 뿐이에요.”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자리하고 있던 리브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그 작은 손이 퍽 절박해 보였다.
“누군가의 죽음을 어떻게 편안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디무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마음이 여리다고 해야 할지, 겁이 많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의 미소를 비웃음으로 받아들였는지, 리브가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렸다.
오늘따라 그녀는 영 기운이 없었다. 장담컨대 지금의 리브는 디무스의 기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리라.
눈치 빠른 리브의 태도가 좋아서 곁에 두었던 건데, 희한하게도 본인 감정에 취해 이렇게 눈치 없이 구는 게 마냥 싫지만도 않았다. 오히려 색다른 모습이라 기껍기까지 했다.
“그거 아나?”
디무스의 엄지가 리브의 눈가를 느리게 문질렀다.
“내가 선생을 아주 많이 봐주고 있어.”
그 말에 리브의 가지런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리브가 시선을 들어 디무스를 응시했다.
평소에 순종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녹색 눈동자에서 유독 선명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 어떤 품질 좋은 에메랄드를 가져다 놓아도 이 눈동자보다는 못할 것 같다.
디무스가 다시금 손끝으로 리브의 눈가를 매만졌다.
자꾸 문질러서 그런가? 피부가 조금 벌겋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눈가가 붉은 탓에 리브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 애송이랑은 어울리지 마.”
“카밀 마르셀 선생님 말씀이신가요?”
“그래.”
마르셀이라니. 그런 성으로 리브에게 다가섰던가.
디무스는 조소를 흘리며 카밀을 떠올렸다. 검은색 고수머리에 제법 혈기 왕성해 보이는 꼴로 서 있던 놈. 카밀은 새카만 마차 안에 누가 있는지 안다는 듯 경계심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여 ‘도움’을 운운하기도 했지.
그가 엘레오노르만 아니었어도 진즉 치워 버렸을 텐데.
안타깝게도 엘레오노르 가문은 베렌에서 힘깨나 쓰는 가문이었다. 아무리 남의 눈치 안 보고 사는 디무스라고 해도 대놓고 엘레오노르의 직계를 처리했다가는 베렌에서의 생활이 여러모로 난감해질 터였다.
전쟁터에서 마주쳤으면 모를까, 신사의 가면을 쓰고 사는 사회에서는 더욱.
잠시나마 카밀을 떠올리자 겨우 좋아졌던 기분이 도로 나빠졌다. 디무스가 인상을 찡그린 채 혀를 차는데, 리브가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그가 아직도 후작님의 뒤를 캐고 있나요?”
물론 그러고 있기는 했다. 디무스로서는 카밀이 설사 자신에 관해 알게 된다고 한들 얼마나 써먹을 수 있겠느냐 싶어서 가소로워하고 있을 뿐.
아무튼 그런 쥐새끼 같은 면모가 성가신 것은 맞지만, 지금 리브에게 다시 한번 이런 당부를 하는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 새끼의 눈빛이 거슬려.”
“…눈빛이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지, 리브는 당황한 눈치였다. 디무스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만 봐도 얼마나 발정이 났는지 뻔히 보이거든.”
내내 혈색 없이 질려 있던 리브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꼭 흰 캔버스 위에 붉은색 물감이 칠해지는 순간을 보는 느낌이었다.
“마르셀 선생님과는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아까 만난 것도 우연이었고, 그마저도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잠시 도움을 청했던 것뿐이에요.”
“당연히 아무 관계도 아니겠지. 발정은 그놈 혼자 났으니까.”
리브와 어떤 접점이 있었다면 어디 그놈이 그렇게 멀쩡한 낯으로 걸어 다닐 수 있었겠는가. 가문의 이름에 기대어 목숨이야 부지할 수 있을지라도, 다리 하나 정도는 진즉 부러졌겠지.
“하지만 선생, 아무리 급해도 아무 놈에게나 도움을 청하지는 마.”
디무스의 말에 리브가 입술을 감쳐물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입매에 까닭 모를 서러움이 묻어났다.
“그럼 제가 도움이 필요할 때, 후작님께서 늘 곁에 있어 주실 건가요?”
“새삼스럽군. 이제껏 늘 그래 오지 않았던가?”
도리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자, 리브가 말문이 막힌 듯 침묵했다. 디무스는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처럼.”
리브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것과 그녀가 디무스의 품으로 몸을 기대 오는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저에게 매달리는 리브를, 디무스가 기꺼이 안아 주었다.
***
이제 리브는 모든 외출에 검은 마차를 이용하게 되었다. 집 근처에 상주하고 있는 호위들은 여전히 떠나지 않았다.
외출은 잦지 않았다. 밀리언을 가르치러 나가기라도 하면 콧바람을 쐴 일이 있을 텐데, 펜던스 저택의 손님맞이 때문에 한동안 발길을 끊었더니 더욱 외출할 일이 없었다.
안 그래도 협소하던 생활 반경이 더욱 한정적으로 바뀌었다. 이제 리브가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베리워스 저택이나, 랑제스 저택의 사람들이었다. 그마저도 늘 보는 필립이나 아돌프, 몇몇 고용인들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것이 답답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부에르노 시내를 돌아다니지 않는 덕분에 무슨 소문이 도는지 알 수 없었고, 소문을 듣지 못하니 피로감도 덜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언제까지고 이렇게 조용히 지낼 수는 없을 테니까.
리브는 이 기간을 짧은 휴가로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동안 생활을 꾸려 가느라 치열하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이렇게 나태하고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 젖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렇게 한가로운 생활을 살다 보니 후작에게 받은 오페라 관람권을 사용할 날이 다가왔다.
약속은 저녁 시간이었으나, 리브는 조금 이르게 준비했다. 간편한 차림으로 다니던 평소와 달리 오늘은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았기 때문이다.
우선 최근에 맞춘 다양한 의상들이 그랬다. 옷을 갈아입는 내내 챙길 게 많아서 그녀는 부득이하게 코리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언니, 너무 예뻐!”
코리다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리브는 그런 그녀에게 어색하게 웃어 준 뒤 거울 앞에 앉았다.
화려한 옷과 화려한 장신구에 걸맞은 화장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막막함이 앞섰다. 그러나 미적거리다가 꾸미다 만 꼴로 나가는 것보다는 뭐라도 손을 대는 게 낫겠지.
맞춤 의상답게 몸에서는 여느 때보다 편안한 착용감이 느껴졌다. 다만 몸에 느껴지는 불편함이라고는 전혀 없는데도 어딘가 묘하게 갑갑한 게 이상했다. 그 감각을 무시하며, 리브가 차분하게 심호흡했다.
거울 속에는 며칠간 살이 빠져서 턱선이 조금 더 날카로워진 허여멀건 한 얼굴의 여자가 있었다.
한동안 집에만 있어서 그런가? 유난히 얼굴에 생기가 없어 보였다. 심지어 코리다보다도 말이다.
“와, 목걸이 아름다워….”
화장 도구를 집어 들던 리브가 힐끗 옆을 보았다. 코리다의 관심은 리브의 옷에서 리브가 착용할 장신구로 넘어간 상태였다.
“어쩜, 이것도 후작님이 선물해 주신 거란 말이지?”
“선물이라기보다는… 아무튼. 그분의 파트너로 극장에 가는 건데 아무렇게나 갈 수는 없잖아. 최소한 구색은 맞춰야지.”
최소한의 구색이라기에는 너무 과한 장신구이긴 하지만.
몽롱한 눈으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바라보던 코리다가 갑자기 고개를 확 돌려 진지한 표정으로 리브를 보았다.
“언니, 내 생각에는 후작님께서 언니를 좋아하시는 게 분명해. 내 치료를 지원해 주시는 것도 다 언니 때문이야. 틀림없어.”
밀리언과 친해지더니 로맨스 소설에 재미를 붙인 걸까.
리브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가, 이내 툭 털어 버렸다.
바깥에서는 리브를 두고 공공연하게 후작의 정부 아니냐고 수군거릴 것이다. 코리다는 리브보다도 외부 접촉이 적어서 나쁜 소문에 노출되지 않고 있다지만, 언제 어디서 예기치 못한 말을 전해 들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중에 그런 소문을 듣고 동요하느니 착각이라고 해도 저런 낭만적인 상상을 확신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그래도 차마 양심상 코리다의 말에 동조할 수는 없어서, 리브가 나지막하게 변명했다.
“오늘은 그냥, 마땅한 파트너가 없다고 하셔서….”
“언니. 내가 집에만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지레 제 발이 저린 리브가 다소 경직된 눈으로 코리다를 살폈다. 코리다는 리브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듯,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은 관심 없는 상대에게 시간과 돈을 쏟지 않는다고 했어.”
그 말을 하는 코리다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코리다를 보던 리브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질문했다.
“도대체 누가 너에게 그런 소리를 한 거야?”
“시릴로가!”
아, 그 마주르칸 출신 친구.
“…하아. 너희는 참 다양한 대화를 하는 모양이구나.”
도대체 무슨 할 말이 많아서 편지지를 그리도 사용하나 싶었는데, 딱 그 나이대 소녀들의 관심사에 흠뻑 빠져 있었나 보다.
뜻밖의 방법으로 코리다의 교우 관계를 확인하게 된 리브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미소를 어떻게 이해한 건지, 코리다는 짐짓 어른스러운 얼굴로 리브의 등을 토닥였다.
“언니, 용기를 가져. 내 눈에는 언니가 더 아까워.”
그것이야말로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코리다는 아마도 진심이리라.
세상 모두가 리브에게 감히 과분한 사람을 넘본다고 비난해도, 코리다만큼은 우리 언니가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들 것이다.
“말만으로도 고마워, 코리다.”
곁에서 소소하게 준비를 도와주는 코리다 덕분에 남은 시간은 비교적 수월하게 지나갔고, 약속된 시간보다 이르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