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80)화 (80/138)

말만이라도 그렇게 해 두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궁지에 몰린 브레드가 미친 척 리브에 관한 신상을 팔아먹을지도 모르니까.

브레드가 나타나서 이런 소리를 했다고 하면 후작이 나서 주겠지. 괜히 어설프게 그를 달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는 후작의 도움을 받는 게 안전했다. 후작 역시 누드화 작업을 세간에 드러내고 싶지 않을 테니, 어떤 식으로든 조처하지 않겠는가.

아니, 그런 이해관계가 없더라도 그는 저를 도와줄 것이다. 그는 저를 아끼니까. 아낀다고 했는데, 흠집이 나는 게 싫다고도 했고….

두서없는 상념에 사로잡혀 걷던 리브는 하마터면 마차에 치일 뻔하고 서야 자신이 지금 도로 한복판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거야!”

마부의 욕설이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창백한 얼굴의 리브가 황급히 구석진 인도로 걸음을 옮겼다.

목덜미에 약간의 식은땀이 난 것 같았다. 조금 전 마차에 치일 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 누드화가 아니었으면 네가 후작님의 정부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아?”

분노에 찬 브레드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리브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추가 근무라는 우스운 단어로 애써 눈가림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본질적으로 이 관계를 세간에서 어떤 식으로 정의하는지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때때로 불려 가 섹스를 하고, 대신 그의 호의를 사 각종 지원과 돈을 받는 관계.

알고 있으나, 애써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이었다. 그런 장사치의 마음으로 제 몸을 내어 준 게 아니라고 거듭 되뇌었을 뿐이다. 그녀는 그를 원하고 있으니까. 그의 몸을, 혹은 그의 마음을.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포장하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합리화에 불과했다.

“나에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부에르노에서 가장 대단한 귀족을 유혹할 수 있게 해 줬는데!”

브레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를 두고 그리 생각할 것이다. 무엇 하나 잘나지 않은 여자가 몸을 던져 후작을 유혹했을 거라고. 심지어 그게 사실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후작의 환심을 얻기 위해 자신이 내어 줄 수 있는 걸 내어 주었다. 꾸역꾸역 자존심을 세우며 고고하게 지켜 왔던 소중한 것까지.

그래서 정부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후작에게 간절히 바라는 건 겨우 침대에 오를 권리나 그에게 받을 수 있는 온갖 호사스러운 물질, 혹은 그의 곁에 있음으로 인해 얻게 될 대우 같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리브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 기어이 이 마음을 헐값에 팔아 버렸구나.

이 마음의 값어치라고는 기껏해야 정부 자리나 살 수 있을 정도구나.

“로이데스 선생님?”

우두커니 선 리브의 뒤쪽에서 조심스러운 부름이 들려왔다. 살며시 눈을 뜬 리브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 엉거주춤 선 카밀이 있었다.

“괜찮으세요?”

리브라는 걸 확인한 카밀이 빠르게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고만 있으려니, 카밀이 재빨리 변명을 덧붙였다.

“아, 우연히 지나가다가 선생님을 본 겁니다. 이렇게 뵐 줄은 정말 몰랐어요.”

우연히든 아니든 지금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무심한 얼굴로 그에게 시선을 거둔 리브가 조용히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한 것도 없이 진이 빠졌다.

“얼굴이 많이 창백하신데….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괜찮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리브가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치민 어지럼증에 도로 우뚝 멈춰 서야 했다.

그 모습에 카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근처에 앉아서 쉬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아니요, 저는….”

“안색이 정말 안 좋으세요.”

이건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종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문제일 것이다.

카밀이 그녀를 부축하려는 듯 조금 더 곁으로 다가섰다. 잠시 고민하던 리브는 결국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이겠지. 카밀의 말대로 어디든 앉아서 쉬면 금방 괜찮아질 것이다.

“공원까지 걸으실 수 있으시겠어요? 아니면 저 앞에 있는 커피 하우스에라도….”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의 곁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선 마차 때문이다.

리브와 카밀의 시선이 동시에 마차로 향했다.

“마차를 너무 험하게 운전하네요. 대로에서 좀 더 떨어지는 편이 낫겠습니다.”

떨떠름하게 말한 카밀이 리브를 인도 안쪽으로 당겼다. 그러나 리브는 도리어 그의 손을 놓았다. 시선은 여전히 마차에 고정된 상태였다.

“로이데스 선생님?”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괜찮아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

당황한 표정으로 리브를 보던 카밀이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마차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문양도 없는 평범한 검은색 마차는 얼핏 보아서는 길가의 다른 대여 마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외관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마차를 이루고 있는 구성품 하나하나가 고급스러웠다. 무엇보다 고삐를 쥔 마부가 리브를 향해 슬쩍 눈짓하고 있었다. 안면이 있음을 굳이 숨기지 않는 태도였다. 리브 역시 마부를 향해 선뜻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카밀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리브는 덤덤한 얼굴로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놀란 얼굴의 카밀은 리브의 작별 인사에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리브가 등을 보이려는 순간 덥석, 그녀의 팔을 잡아 세웠다.

“위험한 건 아닙니까?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카밀이 반쯤 열린 마차 창문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리브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가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리브를 도와주겠다는 저 말에 담긴 걱정만큼은 진심이라는 점이었다.

조용히 카밀을 응시하던 리브가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버석한 입술을 몇 번 달싹인 그녀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제게는 좋은 사람이세요.”

“하지만….”

“마르셀 선생님께는 좋지 않아도, 제게는 그래요.”

빙긋 웃으며 말하는 리브를, 카밀은 더 잡지 못했다. 힘없이 팔을 놓는 카밀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준 리브가 몸을 돌려 마차로 향했다.

익숙하게 마차 문을 열자,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인형이 보였다. 턱을 괸 사내가 열린 문을 통해 리브를 가만히 응시했다. 사내의 오만한 벽안을 가만히 보던 리브가 천천히 마차에 올랐다.

리브를 태운 검은 마차가 미련 없이 떠나고, 거리에는 카밀만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

검은색 마차와, 그 마차를 끄는 마부를 아예 상주시켜야겠다.

리브의 집 앞을 지키던 호위들이 브레드의 소식을 알려 왔을 때 디무스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생활을 조금 더 단속해야겠다고.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하고 맡겨 두었더니 리브는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화가 놈의 일을 신경 쓰지 말라고 친히 당부했는데도 기어이 만나 주었다니?

혀를 차며 데리러 왔더니만 어울려 놀지 말라고 했던 또 다른 쥐새끼와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있는 꼴을 보이질 않나. 아주 가관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지금 디무스의 저조한 기분을 눈치채지 못한 채 어쭙잖은 청탁까지 시도하고 있었다.

“브레드의 건강이 좋아졌다고 해서요. 작업하던 누드화는…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알아서 빚쟁이들에게 잡혀갈 줄 알았던 화가는 생각과 달리 쥐새끼처럼 그들의 손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리브와 접촉한 걸 보면 여전히 디무스에게 어떠한 기대를 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와 얽히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물론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브레드는 제 누드화를 그린 화가예요. 어떻게 제가 그를 무시하겠어요.”

“그가 미쳐서 선생에 관해 떠벌리고 다닐까 봐 걱정되나?”

다소곳하게 앉아 있던 리브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평정심을 되찾고 싶은 듯 고개를 돌렸으나, 마차 안에서 고개를 돌려 봐야 큰 도움은 되지 않을 터였다. 반쯤 열어 두었던 창문은 그녀를 태우기 무섭게 닫아 둔 참이었으니.

틈 없이 닫힌 마차 창문 쪽을 꿋꿋하게 바라보고 있는 리브를 가소롭다는 눈으로 보던 디무스가 손을 뻗었다. 그는 약간의 힘만으로도 아주 손쉽게 리브의 시선을 제게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정면으로 리브의 얼굴을 마주한 디무스가 눈살을 찡그렸다. 마차에 탄 직후 내내 고개를 숙이거나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그녀의 안색이 아주 나빴다.

누드화 작업과 관련해서 화가 놈에게 무언가 협박이라도 받은 걸까?

궁지에 몰렸을 놈이라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았을 성싶었다. 행여 제 누드화가 밝혀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리브에게는 확실하게 먹혀들 만한 협박이었다.

“죽여 줄까?”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자세로 리브를 바라보던 디무스가 다소 성의 없는 어투로 툭, 말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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