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엄청 찾았어. 갑자기 이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오랜만에 본 브레드의 얼굴은 상당히 초췌했다. 미묘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리브가 차분하게 질문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리브. 이야기 좀 하자. 아주 급한 일이야. 우리 작업에 관련된 일이라고.”
작업이라는 말에 리브가 움찔, 몸을 굳혔다. 어느 순간부터 브레드와의 작업은 완전히 뇌리에서 잊고 지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브레드의 누드화 계약은 여전히 유효했다. 단지 잠시 중단하고 있을 뿐이지.
“우선 짐부터 옮기고요.”
“응, 응!”
화색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브레드는 때때로 불안한 시선을 숨기지 못한 채 주변을 살폈다.
기어이 그가 사기꾼과 안 좋게 얽히기라도 한 걸까.
리브의 마음에도 어두운 불안감이 깃들었다. 이 불안감이 브레드를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누드모델이었던 자신을 걱정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근처 커피 하우스를 가려다가 발길을 돌렸다. 화제가 화제이니만큼, 개방된 곳에서 대화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고민 끝에 그나마 대화하기 낫다고 판단한 장소는 브레드의 작업실이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브레드의 작업실은 여전히 춥고 퀴퀴했다.
후작의 깨끗한 저택에 익숙해진 리브는 브레드의 작업실에 들어서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싸구려 물감의 지독한 냄새가 일시에 덮쳐 오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 차라도 내줘야 하는데….”
“괜찮아요. 그보다 우리 작업에 관련된 이야기가 뭐예요?”
“뭐긴! 후작님께 드릴 누드화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지!”
브레드가 눈을 번뜩이며 대번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리브가 대답하지 않자, 금세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모, 몸이 안 좋아서 한동안 작업을 할 수 없었어. 하지만 이제 다 나았으니까 다시 시작하겠다는 거야.”
“…브레드. 후작님께서 정말 그 핑계를 믿으셨으리라고 생각해요?”
“핑계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리브.”
“수도에서 전시회를 열 예정이라면서요.”
리브의 덤덤한 말에 브레드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전시회장은 잘 보고 왔어요?”
멍하게 리브를 보던 브레드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가 리브에게 대관에 관한 이야기를 한 건 맞지만, 전시회장을 확인하기 위해 수도에 올라간다는 것까지는 말한 적이 없었다. 그는 리브가 누구와 대화했는지 단박에 알아챈 듯했다.
“…설마 내 아내에게 대관료 이야기를 한 게 너였어?”
“중요한가요?”
“당연하지! 그 일 때문에 그 여편네가 나를 얼마나…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어? 너는 지금 한 가정을 무너뜨린 거나 다름없어!”
흥분한 브레드가 횡설수설대며 비난 섞인 말을 퍼부었다. 그 반응을 보고 있자니 듣지 않아도 그가 겪었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마를 짚은 채 깊이 심호흡한 리브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께서는 대관료에 관해 전혀 모르고 계셨어요. 그게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할 셈이에요?”
“리브!”
“분명 그때 말했잖아요. 이상하다고. 문제가 커지기 전에 수습하라고 내가 그랬죠.”
“하! 참 잘나셨네!”
씨근덕거리던 브레드가 이내 양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성질을 못 이긴 그가 입 안으로 작게 욕설을 뱉었다. 그러다가 이내 주절주절 말을 쏟아 냈다.
“그래, 리브. 내가 어리석었어. 전시회를 열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잠깐 눈이 멀었나 봐. 나도 인정해. 네 조언을 들었어야 했는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브레드는 한층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어깨를 늘어뜨린 그가 초조하게 작업실 내부를 서성였다.
“그래서 이렇게 너를 찾아온 거야. 나에게 진실한 조언을 해 줬으니까! 지금 나를 도와줄 사람이 너밖에 없어. 제발 나 좀 도와줘.”
“내가 뭘 도울 수 있겠어요.”
리브가 고개를 내젓자, 브레드가 눈을 번뜩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리브의 양팔을 콱 잡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아니야, 도와줄 수 있어! 디트리언 후작님이 갑자기 옆에 끼고 나타났다는 여자 너 맞지? 적갈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 너 맞잖아. 그렇지?”
소문 들었다며, 당연히 너라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브레드의 목소리가 흥분에 젖어 있었다.
아니라고 해 봤자 믿지 않을 것 같았다. 또한 이 순간을 모면하고자 거짓말을 해 봐야, 나중에 더 큰 화로 돌아올 성싶었고.
그래서 리브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후작님께서 내게 계속 의뢰를 주시면 돼. 누드화가 계속 팔리기만 하면 금방 해결될 문제야.”
잡힌 팔이 아팠다. 힘겹게 브레드의 팔을 뿌리친 리브가 그와의 거리를 벌리며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절절하게 매달리던 브레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연이은 리브의 거절에 울컥한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네가 어떻게 후작님 눈에 들었는데! 다 내 덕이잖아! 내가 너를 그려서!”
“브레드.”
“제발, 리브. 나 이러다가 정말 죽을지도 몰라. 지금도 간신히 도망쳐 왔어. 다시 잡히면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거라고.”
그가 수세에 몰린 건 맞은 듯했다. 본래 형편이 좋지 않았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지금의 그의 차림새는 딱 거리의 부랑인과 다를 바 없이 보였으니까.
작업실을 가득 채운 물감 냄새 사이로 브레드의 오래 찌든 땀 냄새나, 퀴퀴한 체취가 섞이고 있었다. 수염은 오랫동안 다듬지 못했던 건지 중구난방으로 뻗어 있었고, 헌팅캡 아래로 삐져나온 머리카락도 엉망이었다. 형형한 눈초리는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처럼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말이다.
사람이 이렇게 초췌해질 정도라니, 도대체 얼마나 악질적인 사기꾼과 얽힌 걸까?
“아까 보니까 이사한 집이 좋더라. 네 형편 내가 아는데, 그거 다 후작님이 주신 거지? 나도 양심이 있는데 거기까진 안 바랄게. 그냥 목숨만 살려 줘. 응?”
브레드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애써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내도 자식들도 다 나를 떠났어. 내 곁에는 지금 아무도 없다고.”
마음 같아서는 더 듣지도 않고 여길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건, 그녀가 매몰차게 브레드를 뿌리치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브레드는 누드화 작업을 함께했던 화가였다. 그리고 리브가 누드모델을 했다는 이력은 절대 드러나서는 안 될 치명적인 행적이고.
“도대체 나에게 뭘 바라는 거예요?”
“후작님께 말이라도 해 줘. 응?”
“후작님께서 제 말을 들으실 리 없잖아요.”
그는 리브가 대단한 코르티잔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말 한마디로 사내의 마음을 휘어잡고, 손끝으로 그들을 뜻대로 부릴 줄 아는 기술이라도 가진 줄 아나 보지.
후작이 리브에게 잘해 주고 있는 건 맞지만, 그건 리브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도 말하지 않았던가. 눈치껏 행동하면 된다고.
브레드와 거리를 두라는 경고를 건넨 게 다른 누구도 아닌 후작이었으니만큼, 괜히 브레드의 말을 전해 봐야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차라리 돈을 빌려줄 테니까 우선 급한 것부터 해결해요.”
리브가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브레드의 마음에 전혀 차지 않은 듯했다.
“그깟 돈 몇 푼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야!”
이를 악문 브레드가 결국 꾹꾹 누르고 있던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언성을 높였다.
“내가 대단한 걸 부탁했어? 그냥 몇 마디 말 좀 해 달라고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내 덕에 호사를 누리고 있으면서! 내 누드화가 아니었으면 네가 후작님의 정부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아?”
정제되지 않은 막말에 리브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라고요?”
“보나 마나 뻔하지! 언젠가 이럴 줄 알았어. 네가 결국 누구 하나 자빠뜨릴 줄 알았다고!”
브레드가 입술을 비틀었다.
“후작님께 그 몸을 홍보해 줬으니 나에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부에르노에서 가장 대단한 귀족을 유혹할 수 있게 해 줬는데!”
무차별적으로 쏟아진 적나라한 말들이 리브의 머리 위로 차갑게 쏟아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날카로운 칼날에 난도질당한 듯했다.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브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은 우리 둘 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네요.”
리브가 몸을 휙 돌렸다. 그제야 잔뜩 흥분해서 씨근대던 브레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당장 작업실을 나가려는 리브의 팔을 다급하게 잡은 브레드가 허겁지겁 말했다.
“리브, 리브! 내가 말이 헛나왔어, 잠깐만 기다려! 리브!”
리브는 다시금 애원할 것처럼 매달리는 브레드의 팔을 있는 힘껏 뿌리쳤다. 그런 뒤 그대로 작업실을 나가고자 문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곧장 문을 여는 대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리브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을 드리겠지만, 그분의 선택에 제가 영향을 미칠 수는 없어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리브!”
브레드가 환희에 차서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넸다. 리브는 끝까지 그를 돌아보지 않고 작업실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