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78)화 (78/138)

“오신다는 연락 받고 기다렸습니다.”

“아… 네.”

리브는 그녀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서야 의상실 사장임을 알아보았다.

겨우 한 번 만난 사람의 얼굴이라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며칠 사이 사장의 안색이 확연하게 나빠진 까닭이었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지요.”

하이롭에서조차 사장이 이렇게 헐레벌떡 마중 나오지는 않았었는데.

의상실을 방문했던 날 받았던 시기와 질투의 시선을 기억하고 있는 리브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리브 딴에는 오늘도 은밀한 눈초리를 받을 거라고 각오했던 참이었는데, 눈초리는커녕 누구 하나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곧 다과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요, 저는 그냥 주문한 의복만 수령하면 됩니다.”

리브가 고개를 내젓기 무섭게 사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발 차 한잔 대접해 드릴 기회를 주세요, 레이디.”

리브는 순간 제 손으로 사장의 목이라도 졸랐나 싶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그녀는 사장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더 고개를 내저으면 당장 이 자리에서 졸도할 것처럼 구는 사장의 모습에 차마 더 거절할 수 없었다.

마지못해 안내받은 자리에 앉자, 사장이 다급하게 손짓했다. 바짝 어깨를 움츠린 직원이 테이블 한가득 다과를 준비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다기가 줄줄이 놓였다.

이쯤 되니 리브도 이상함을 눈치챘다.

더 솔직히, 이러는 이유라고는 딱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후작님께 무언가를 해 달라고 청하지 않았어요.”

“네?”

“청한 게 없으니, 제가 그분 의지를 돌이킬 수도 없다는 소리예요.”

리브의 말에 사장이 경직된 표정으로 침묵했다.

마른침을 삼킨 사장이 문가 쪽으로 눈짓하자, 의상실 직원들이 줄줄이 휴게실로 들어왔다. 리브는 기가 죽어서 고개를 푹 숙인 직원들을 조용히 응시했다.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서 있는 수습 직원의 얼굴은 그야말로 시체와 같았다.

“레이디, 지난번에는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일을 배우고 있던 직원이라 미숙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다시는 이런 실수가 없을 겁니다.”

사장도 수습 직원 곁에서 거들듯 말했다. 수습 직원은 해고했으며, 오늘은 사과하기 위해 왔다는 말도.

조용히 앉아 그 모습을 보던 리브가 수습 직원 뒤쪽에 서 있는 다른 직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 역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수습 직원처럼 나서서 사과하거나 변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옷핀에 살짝 긁힌 것 정도는… 사실 리브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실수’로 저지를 수도 있는, 그 정도의 일이니까.

그날 자신이 느꼈던 눈초리도 어쩌면 괜한 자격지심에 착각한 것일 수도 있고.

“수습 직원에게 일을 맡길 정도로 나를 홀대했다고 고백하는 건가요?”

그럼에도 리브는 이 순간, 자신이 순순히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네? 그, 그게 아니라!”

“후작님께서 직접 내 옷을 만들라고 명하셨음에도 대놓고 수습 직원을 배정했다니, 놀라운 판단력이군요.”

사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리브를 보았다. 리브는 늘 보았던 후작의 냉담한 표정을 생각하며, 그와 비슷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로서는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미숙한 수습 직원을 대신해 눈치껏 나설 노련한 정직원 하나 두지 못한 인덕인가요?”

“레이디.”

“설마 직원들이 멋대로 수습 직원에게 일을 떠밀었다고 말할 셈인가요? 직원의 방만을 억제할 통솔력도 가지지 못했다면, 그 또한 문제네요.”

새빨개진 얼굴의 사장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침묵했다. 휴게실은 고요했고,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제대로 뱉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는 불편하다. 리브는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몰아세우는 게 썩 좋지 않았다. 통쾌하거나 즐겁지도 않았다.

그러나 후작이 이미 그녀를 위해 이 의상실에 어떤 방식으로든 불쾌감을 표명했으니, 그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리브 역시 이들을 쉬이 용서해서는 안 되었다.

“죄송합니다. 직원의 실수는 곧 사장의 책임이니, 전부 저의 모자람입니다.”

사장이 허리를 굽혔다. 리브는 불편한 속을 애써 감추며 시선을 돌렸다.

“시샘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 감정을 표출하고자 무리를 지어 작당하는 건 다른 문제죠. 심지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지 않고 어영부영 넘어가려 하는 걸 보았는데, 당신의 사과가 어떻게 진정성 있게 들리겠나요?”

벌서는 것처럼 서 있던 직원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겉으로 보아서는 다들 반성이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리브는 저들의 질투심이 사라졌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해 일차원적이었던 질투가 맹렬한 미움으로 바뀔 가능성이 컸다.

억울하고,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질 테지.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겨우 옷핀에 살짝 긁힌 걸 가지고 가게를 뒤집어 놓는다며 온갖 험담을 해 댈 것이다.

리브는 쓰게 웃었다. 제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너무도 훤히 짐작되어서.

운 좋게 엄청난 뒷배를 짊어진,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까탈스러운 정부쯤일까.

“주문한 의복은 수령하겠습니다. 하지만 직업의식이 없는 가게와 더 연을 맺고 싶지 않네요.”

어차피 어중간하게 착하게 굴어 봐야 뒷말만 무성해지리라. 뒤에서 욕먹는 게 똑같다면, 앞에서만큼은 아무 말 못 하게 만드는 게 낫다. 특히나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한바탕 뒤집어 놓으면 적어도 전과 같은 치졸한 술수는 쓰지 않을 테니까.

“레이디!”

“완성된 의복을 가져다주세요.”

리브는 앞으로 이와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겪으리라는 걸 예감했다.

썩 내키지 않으나,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도.

의상실에서의 일을 의식해서 바로 귀가할까 했던 리브는 걸음을 돌렸다.

가급적 이쪽 거리로는 발길을 주고 싶지 않아서, 나온 김에 볼일을 전부 처리해야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대여 마차에 짐을 실어 둔 뒤 최대한 모자를 눌러쓴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의복과 연관된 다양한 잡화를 파는 상점이었다. 그녀는 필립이나 아돌프 등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할 만한 물건을 궁리해 본 끝에 무난한 손수건으로 결정한 참이었다.

옛날이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고급 상점이었으나, 지금의 리브에게 이 정도 지출은 큰 부담이 아니었다.

“손수건이라면 이쪽에서 보시면 됩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던 리브가 문득 어딘가에 시선을 주었다. 직원 역시 리브가 바라본 곳을 확인했다.

“그쪽은 저희 상점에서 특별히 취급하는 고급 제품들입니다. 귀족가에 납품되는 것이라, 가격대가 상당히 높답니다.”

직원이 넌지시 설명했다. 리브를 무시했다기에는 그 목소리에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리브의 차림을 보고 나름대로 형편을 지레짐작한 듯했다.

리브는 직원을 뒤로한 채 성큼성큼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반짝이는 커프스였다. 은빛의 반짝이는 부토니에르, 매끄러운 크라바트 등도 보였다. 판매용이라기보다는 보유 중인 상품을 홍보하기 위한 진열장이었다.

느리게 그것들을 훑어보던 리브의 눈길이 가장 끝에 있는 진열장에 오래 머물렀다.

“귀한 분께 선물할 만한 장갑도 있을까요?”

“귀한 분이시라면… 부인께 드릴 물건일까요?”

“아니요, 신사분이요.”

“물론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직원이 빠릿빠릿한 태도로 자리를 비웠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리브가 가만히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관계할 때가 아니면 늘 장갑을 끼던 후작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는 질 좋고 값비싼 장갑을 주문 제작해서 사용할 테지만….

선물해 봐야, 착용하는 모습 같은 건 영원히 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손님, 혹시 사이즈를 아시나요?”

제품을 가지러 안쪽으로 들어갔던 직원이 고개를 내밀어 질문해 왔다. 리브가 여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알아요.”

저를 만지는 손의 크기를 그녀는 선명하고 또렷하게 기억했다.

***

그녀 인생에서 가장 큰 사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할 손수건의 값을 전부 더해도 후작에게 줄 장갑의 가격과 비견할 수 없었다.

결제할 때 손을 떨진 않았겠지?

“감사합니다. 저 앞에 옮겨 주시면 돼요.”

마부의 도움을 받아 생각보다 많은 짐을 집 앞에 옮기고 나자 큰일을 해치운 느낌이 들었다. 이제 당분간 외출은 좀 줄이고 코리다와 시간을 보내야겠다.

마부에게 약간의 수고료를 얹어서 보낸 리브가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리브!”

익숙한 목소리에 이끌려 뒤를 돌아보자, 허름한 차림의 브레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리브와 눈이 마주치자 반색하며 달려왔다. 그러나 곧 갑자기 튀어나온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리브가 외박했을 당시 후작이 붙여 주었던 호위들이었는데, 지금은 그대로 상주하며 근방의 치안을 봐 주고 있었다.

“잠깐, 전 리브와 아는 사이입니다! 리브! 잠깐 시간 좀 내줘!”

“…제가 아는 분이에요. 괜찮으니 놓아주셔도 돼요.”

리브의 말에 호위들이 순순히 손을 놓았다. 잠깐 잡혀 있던 팔이 아팠던지, 브레드가 앓는 소리를 내며 제 팔을 문질렀다. 잠시 호위를 흘겨본 그가 행여 또 가로막힐까 걱정하며 후다닥 리브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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