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언과 코리다는 족히 한 시간을 더 일방적으로 떠들고서야 진정했다.
그리고 그제야 리브는, 간밤에 퍼진 소식을 하녀들에게 전해 들은 밀리언이 부모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냉큼 저택을 뛰쳐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책 없이 뛰쳐나온 밀리언도 문제지만 그런 밀리언을 말리지 못한 하녀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당장 하녀들을 통해 펜던스 남작가에 연통을 넣고 난 뒤, 리브는 일단 바깥에서 떠돌고 있다는 소식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언급되는 사실은 약방과 의상실에서의 목격담밖에 없네.”
당연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리브와 후작의 접점에 관해 알 리 없으니까.
객관적으로 확인된 진실이라고는 그저 후작이 리브를 대동하고 약방과 의상실을 방문했다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 나온 모든 말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추측과 상상이었고.
이 정도라면 수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 진실은 확실하게 밝힐 수 있으니까.
“후작님께 신세를 지고 있다고 했잖니? 사실 그분께서 코리다의 치료를 지원해 주시고 있어.”
리브의 말에 코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끼어들었다.
“언니!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 디트리언 후작님이라는 말은 없었잖아!”
“쉽게 신분을 밝히기 어려운 분이시잖아.”
리브의 변명은 간단했으나 누구나 쉬이 납득할 수 있을 법한 소리이기도 했다.
“하이롭에 간 것도 그래서야. 후작님께서 감사하게도, 신약을 구매할 수 있도록 손써 주셨거든.”
후작이 제일 처음 리브를 데려간 곳이 하이롭이라 다행이었다. 마침 그 하이롭에서 문지기와 실랑이까지 벌였으니 다음 핑계를 만들어 내기도 수월했다.
“그리고 의상실은… 원래 의상실은 방문할 예정이 아니었어. 하이롭에서 내 차림을 보고 섣부르게 응대했는데, 그걸 보시고 측은한 마음에 챙겨 주신 거야.”
어린 소녀들에게 하이롭에서 홀대받았던 일을 언급하기는 싫었지만, 허무맹랑한 망상을 키워 주는 것보다는 나을 성싶었다.
“세간에 무슨 말이 돌지 짐작되기는 하는데 그거 아니야. 신분이 높은 분들은 개인적으로 익명의 후원을 진행하기도 해. 운이 좋게도 우리가 대상이 되었을 뿐이고.”
막연한 사랑 이야기보다는 훨씬 현실성 있고 그럴듯한 핑계였다. 밀리언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조금은 김샌 표정이었다. 리브는 그녀의 반응에 내심 안도하며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밀리언, 혹시 네 친구들과 대화할 때 이런 화제가 나오면 내용을 정정해 줄래?”
리브는 밀리언의 생일 파티 때 후작이 방문한 일로 난리가 났던 사연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당연히 이번에도 그 어린 귀족 소녀들은 눈에 불을 켜고 정보를 캐려 할 터였다. 리브가 밀리언의 가정 교사인 이상 필연적으로 밀리언에게 질문이 몰릴 테고.
밀리언을 이용해 소문을 바로잡겠다는 생각은 다소 옹색했으나, 직접 나서서 말을 하고 다니는 것보다는 밀리언을 앞세우는 게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적어도 밀리언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말이다.
물론 이 핑계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후작이 만약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더 거리낌 없이 행동한다면, 후원이고 뭐고 전부 우스운 핑계로 전락하겠지.
하지만 이렇게라도 둘러대지 않으면 후작과의 만남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중에 소문 속 두 사람이 무슨 사이로 발전하든, 그 시작은 후원으로 하는 게 좋았다.
“후작님이 후원에 관심이 있는 분인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나도 이번에 알게 되어서 어찌나 놀랐는지 몰라.”
입술을 삐죽거리던 밀리언이 코리다를 돌아보았다.
“코리다가 후작님에 관해 전혀 몰랐다는 건, 후작님을 뵌 적이 없다는 거야?”
“응, 나는 늘 치료만 받고 와서….”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코리다가 문득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데 언니, 그럼 어제 외박은 뭐야? 나는 그… 언니의 새로운 사랑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건….”
갑작스러운 물음에 리브가 멈칫했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찰나, 코리다가 자신의 손바닥을 탁 치며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 이번에도 펜….”
리브는 추가 근무가 확정된 뒤 코리다에게 ‘펜던스 남작 부인’을 들먹이며 둘러댔던 걸 떠올렸다. 종종 늦을 때면 어김없이 그 핑계를 댔던 것도.
리브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저와 코리다를 번갈아 보는 밀리언을 의식하며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 그런데 두 사람은 어떻게 친해진 거야? 오늘 처음 만난 거 아니야?”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질문하자 두 소녀의 관심이 금방 옮겨 갔다. 그중 리브의 질문에 대답한 이는 밀리언이었다.
“아, 선생님 뵈러 왔는데 안 계셔서 좀 기다렸거든요. 기다리면서 대화를 하다가 친해졌어요!”
본래 쾌활한 밀리언과 사교성 좋은 코리다라 친해지는 데에 스스럼이 없던 모양이었다.
요즘 코리다는 교류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덕분인지 부쩍 더 사교적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밀리언이라면 코리다가 리브의 여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을 테고.
“그동안 왜 코리다를 안 데려오셨던 거예요? 일찍 알았으면 진즉 친해져서 놀았을 텐데.”
그간 리브는 펜던스 남작가에서 일하며 아픈 여동생이 있다는 말은 했었지만, 특별히 무언가를 더 밝힌 적이 없었다. 좋지 않은 가정사를 구구절절 늘어놓을 까닭이 없기도 하고, 말해 봐야 괜한 자격지심이나 우울감만 느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형편이 나아진 데다 코리다의 건강도 좋아지고 있어서 그런가, 밀리언과 코리다의 만남이 기껍게 느껴졌다.
“둘이 잘 맞는다니 다행이네.”
“밀리언이 같이 놀러 가자고 했어.”
“마침 평화 순례단 방문을 축하하는 축제가 호숫가에서 열린댔어요! 코리다랑 같이 가면 안 돼요?”
빈말처럼 흘려들으려던 리브가 밀리언의 구체적인 제안에 주춤했다.
“축제?”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벌써 외출 약속까지 잡았단 말이야?
선뜻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리브의 모습에 코리다가 슬금슬금 끼어들어 밀리언의 말을 거들었다.
“나 외출해도 된다고 의사 선생님이 저번에 그랬어! 많이 좋아졌대!”
마당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언니를 누구보다 잘 아는 코리다였다. 때문에 코리다는 기운이 넘친다는 주관적인 근거 대신, 티에리의 진찰 내용을 들먹이며 외출 허락을 받으려 들었다.
리브는 미간을 좁힌 채 잠시 고민했다. 티에리가 코리다의 상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건 맞지만, 오랜 시간 동생을 애지중지해 온 습관 탓에 외출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축제를 한 번도 제대로 즐겨 보지 못한 코리다가 저렇게 눈을 빛내며 간절하게 저를 보고 있으니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을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밀리언과 함께라면…. 밀리언의 외출 때마다 따라붙는 시중과 호위를 떠올려 보자면, 오히려 안전하게 외출해 볼 기회일지도 몰랐다.
“며칠 남았으니까, 의사 선생님께 다시 물어보고 결정하자.”
리브는 일단 여지를 두기로 했다. 그 대답만으로도 코리다의 표정은 환해졌다. 밀리언도 새로운 친구와 놀 생각에 즐거워졌는지, 꽤 들뜬 얼굴로 말했다.
“후작님께서 신약을 구매할 수 있도록 손써 주셨다면서요! 그럼 분명 순식간에 나아서 외출할 수 있을 거예요!”
신약, 그래. 코리다는 실력 좋은 의사에게 진료받는 것도 모자라 이제 신약으로 치료받을 수 있었다.
그걸 떠올리자 리브의 마음에 티끌이나마 맴돌던 걱정도 서서히 걷혔다.
“응.”
구설수 같은 것에 불만을 느끼고 투덜거리기에는 너무도 기적 같은 변화였다. 제 생활이 이렇게나 좋아졌는데 바깥의 눈초리쯤이야 감당하지 못할까.
밀리언과 코리다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브가 마음을 다잡았다. 시기나 질투 같은 건 의연하게 넘길 것이다. 어차피 살면서 모두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모두가 오해해도 가까운 제 사람들만 변하지 않으면 괜찮았다.
지금처럼 이 정도의 평화와 후작의 곁을 얻을 수 있다면, 온갖 소문에 휩싸이는 것쯤은.
***
후작과 리브가 약방이나 의상실을 방문한 뒤로, 한동안 부에르노에는 온갖 소문이 들끓었다.
그러나 일단 리브의 신상이 대외적으로 명확하게 공개된 것도 아닌 데다 이후의 목격담이 없어서 그런지 소문이 부풀어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머리카락 색이나 눈 색 같은 것으로 특정한 한 사람을 지목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니까.
밀리언처럼 부에르노 내에서 어느 정도의 권력이 있는 집안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리브의 정체가 전부 밝혀진 것 같았지만, 당장 리브에게 접근하기보다는 조심스럽게 상황을 지켜보는 분위기였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잠잠한 반응이었다. 이대로 잠적하면 소문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그러나 완전히 숨을 수는 없었다. 신약과 맞춤 의상을 찾아오기 위해서는 리브가 직접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하이롭에서는 리브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두 번이나 리브에게 면박을 주었던 문지기는 보이지 않았고, 리브는 극진한 환영과 함께 안쪽 휴게실로 안내받았다. 사장은 리브가 처음 하이롭을 방문했을 때 문지기가 어떤 식으로 그녀를 내쳤는지 전해 들은 눈치였다.
하이롭에서 확보한 신약이 전부 리브에게 제공되었다. 이미 티에리를 통해 이 신약이 코리다의 완치를 두 배는 더 빠르게 앞당겨 줄 수 있으리라는 확답을 받은 리브로서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주소를 남겨 주시면 저희가 직접 배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앞으로도 제가 직접 받으러 올게요.”
이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처지가 되었으니 함부로 주소지를 남기지 않는 게 좋으리라. 게다가 배달로 받아도 되는 물건이었으면, 애초부터 후작이 심부름꾼을 붙여 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브는 하이롭 사장의 호의를 거절하며 몸을 일으켰다. 의상실까지 들르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후작과 방문했던 의상실은 부에르노에서 가장 큰 가게였다. 그러니 아마도 손님이 많을 거라고 예상한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서 보니 의외로 의상실이 너무 한적했다.
멀리서 보아도 북적거리던 의상실의 인기를 알고 있는 리브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혹시 오늘 영업을 아예 안 하는 건가.
의상실 입구에서 주춤거리는데, 리브가 문을 열기도 전에 안쪽에서 누군가 확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