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76)화 (76/138)

대답을 종용하는 것과 잠깐 주춤거리던 손이 다시 움직이는 건 거의 동시였다. 차곡차곡 단추를 풀면서, 리브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 흉터가 무엇으로 인한 것이든 후작님께서는 살아 계시고, 모두가 그런 후작님을 선망의 눈으로 우러러보고 있죠.”

마침내 셔츠의 모든 단추가 풀어졌다. 느슨하게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근육질의 몸이 드러났다. 착색된 흉터들이 가득한 살결은 그가 거쳐 온 시간을 대변하고 있었다. 몇몇 큰 흉터를 제외하면, 자잘한 흔적은 어디에서 다쳤는지 기억도 안 났다.

리브는 복부에 보이는 흉터 위로 손끝을 가져갔다. 그녀의 손은 생각보다 더 따뜻했다.

“그러니 이 흉터를 승리의 훈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까닭이 있나요?”

리브가 건드리고 있는 흉터를 확인한 디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확하게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지뢰 파편으로 인한 부상의 흔적이었던 것 같다. 어떤 전투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제 흉터를 보자 머릿속에서 달갑지 않은 과거의 잔상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디무스는 눈살을 찡그린 채 중얼거렸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열심이군.”

냉소적인 그의 말에 리브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지척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리브의 얼굴은 말갛기만 했다. 녹색 눈동자 속에는 어떤 간교한 꿍꿍이도, 영악한 잇속도 보이지 않았다.

“제가 후작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괜찮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니까.”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일부러 드러내자, 리브가 어색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살짝 좁아진 미간이 그녀의 난처함과 복잡한 심경을 내보이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을 믿어 달라며 아부를 떨지 않았다. 대신 디무스의 셔츠를 완전히 벗기려는 듯 손을 움직였다.

디무스는 그녀에게 순순히 옷을 맡겼다. 상체가 완전히 벗겨지자, 숨겨져 있던 다른 흉터가 오롯이 공개되었다. 팔이며 가슴이며, 견갑골이며 복부며. 눈 닿는 곳곳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흉터가 그득했다.

그것들을 발견한 리브가 눈을 크게 떴다. 디무스는 이번에야말로 그녀의 낯에서 어떠한 혐오감이나 두려움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뱉은 말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제가 이 흉터들이 좋다고 말하면, 싫으실까요?”

그 목소리는 티 없이 순진했다. 어쩐지 경탄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후작님의 몸이 조각상처럼 매끈하지 않아서 안도했다고 말씀드리면, 불쾌하실까요?”

순간 디무스는 처음으로 그녀의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의 침묵을 부정적인 반응으로 받아들였는지, 흉터를 매만지던 리브가 눈치를 보다가 슬쩍 손을 뗐다.

잠시나마 그의 몸을 감상하는 데에 취해 있는 듯하던 그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헛기침하며 가운을 찾았다. 다소 요란스럽게 방을 둘러보는 리브를, 디무스는 한참이나 눈으로 좇았다.

마침내 리브가 여벌 가운을 찾아냈다. 디무스가 순순히 팔을 벌리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가운을 걸쳐 주었다.

“선생은 미술품 투자 같은 것에는 절대 손대지 말게.”

가운의 늘어진 허리끈을 정돈하고 있던 리브가 의아한 눈으로 디무스를 올려다보았다. 디무스는 그녀의 손에 들린 허리끈을 빼앗아 대충 바닥에 던져둔 뒤, 성큼성큼 침대로 향했다.

“안목이 형편없어서, 순식간에 자본을 탕진할 테니.”

“바지는….”

“선생이 내 바지를 벗기면, 잠을 잘 생각이 없다는 의사로 받아들이겠네.”

리브는 군말 없이 디무스의 바지를 포기했다. 외박하는 와중에 밤을 지새우는 건 영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지금 이런 상태라면 평소보다 훨씬 더 거칠게 그녀를 안을 것 같으니까.

“자장가라도 불러 줘야 하나?”

“아니요, 그냥… 곁에 있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뒹굴 만큼 뒹굴고, 내보일 것도 다 내보인 주제에 그녀는 새삼스럽게 부끄러운 낯이었다. 넓은 침대 끄트머리에 겨우 몸을 누인 리브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불을 한껏 끌어 올렸다. 디무스는 안절부절못하는 리브를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리브의 체향과 숨소리가 지척에서 느껴지자 학습된 성욕이 들끓었다. 그러나 굳이 이를 해소하고 싶지 않았다. 위험을 감지한 온몸에서 신경이 곤두선 까닭이었다.

성욕을 짓누르는 생존 욕구가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이곳에 그를 위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머리로 아는데, 오랜 시간 그를 살아남게 한 본능이 연신 경고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녀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 느껴지는 이 위험 신호의 원흉인 것 같아서.

이상하게도 말이다.

***

아침에 눈을 뜨자 넓은 침대에는 리브 홀로 누워 있었다.

너무 긴장되어서 제대로 잠들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누우니 곁에 있던 사람이 가 버리는 줄도 모르고 푹 자 버렸다.

리브는 떠난 지 오래되어 차갑게 식은 것도 모자라, 애초에 누운 티도 거의 나지 않는 옆자리를 다소 우울하게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이곳은 랑제스 저택이니 내심 후작과 아침 식사라도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후작이 이른 아침부터 외출했다는 소리만 들었다.

결국 코리다가 걱정할 거라는 이유를 들먹이며, 아침을 먹고 가라는 필립의 권유를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온 게 조금 전이었다.

그리고 리브는 문을 열자마자 뜻밖의 손님과 마주쳤다.

“선생님!”

“언니!”

찻잔을 둔 채 코리다와 나란히 앉아 있는 이는 밀리언이었다. 놀란 리브가 현관문 앞에서 멈춰 서자, 두 소녀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양팔을 하나씩 잡고 식탁 의자에 그녀를 앉혔다. 그러고는 마치 심문을 앞둔 경관처럼 엄숙한 얼굴로 리브의 맞은편에 앉았다.

도대체 밀리언이 여길 왜 와 있는 건지, 코리다와는 왜 이렇게 죽이 잘 맞는 건지 물어볼 틈 같은 건 없었다.

“서―언생니―임, 제가―아 아주 이상한 소식을 들었는데―에.”

양손으로 얼굴을 받쳐 꽃받침처럼 한 밀리언이 리브의 맞은편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옆에 앉은 코리다도 덩달아 눈을 가늘게 뜨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언니―이, 내가―아 밀리언에게 이상한 말을 들었는데―에.”

도대체 언제부터 밀리언의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 건데?

말문을 잃은 리브가 밀리언과 코리다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체념 어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두 소녀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었다. 애써 외면하고 모른 척해 봐야 소용없을 것이다.

리브는 일단 침착하게 밀리언을 마주 보았다. 아무리 급해도 지적할 건 지적하고 넘어가야지.

“사전에 허락받지도 않고 자택에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했잖니, 밀리언.”

아무리 열심히 가르치면 무얼 하나. 실생활에서 활용이 되어야 제대로 된 배움이지.

당장 이 자리에서 예법 교본이라도 펼칠 기세로 저를 보는 리브의 모습에 밀리언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기는 한데요! 언제 그걸 기다리고 있어요!”

“도대체 얼마나 긴급한 일이기에 심부름꾼을 보낼 시간도 못 참아?”

“얼마나 긴급한 일이냐니요! 이보다 더 긴급한 일이 어디 있어요?”

“수업이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걸 확인하게 된 것만큼 급한 일이 또 있을까?”

그 말에 밀리언이 제 가슴을 퍽퍽 치며 앉은 채로 발을 굴렀다.

“아, 선생님! 진짜 이러실 거예요? 디트리언 후작님이요!”

짐작하긴 했지만 정말 간밤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었다. 얼마나 대단하게 소문이 퍼졌을지 듣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리브가 주춤하는 기색을 보이자, 밀리언이 눈을 빛내며 냉큼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진짜예요?”

“어떤 말을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디트리언 후작님이 세기의 사랑에 빠지셨다고요!”

과연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정할 수나 있을까. 어쩐지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리브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선생님이 그분께 신세를 좀 지게 되었어.”

“꺄악, 진짜 사랑에 빠지신 거예요?”

“밀리언, 사랑이 아니라 신세.”

다행히 밀리언은 후작과 엮였다는 리브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본인이 책에서나 보던 사랑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졌다며 연신 비명을 지르기 바빴다.

리브가 밀리언의 분홍빛 상상을 현실적으로 바꿔 주기 위해 열심히 첨언했으나, 밀리언은 전혀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지 않았다.

흥분한 건 밀리언뿐만이 아니었다.

“언니, 정말 대단한 분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야? 세상에!”

“사정이 좀 복잡해, 코리다. 그….”

“꺄악! 어떡하면 좋아!”

“언니, 멋져! 어떻게 만난 거야? 첫눈에 반했어?”

“아니, 그게….”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얼른 작가를 섭외해야 해요! 소설로 남겨야죠!”

“정말 낭만적이다!”

“…제발 두 사람 모두, 내게 말할 시간을 좀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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