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75)화 (75/138)

“희망?”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희망이요.”

리브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꼭 엄청난 행운 같은 게 없어도…. 적어도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을 수도 있잖아요.”

“선생은 이제껏 그런 마음으로 아픈 여동생을 돌봤나?”

그 물음은 비웃음이라기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워 보였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후작이 리브를 빤히 응시했다.

“언젠가 나을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네. 그리고 결국 저는 희망을 얻었죠. 후작님 덕분에….”

말끝을 흐리며 잠시 주저하던 리브가 차분한 시선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셨으니까.”

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두커니 선 그의 표정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리송했다. 본래 포커페이스에 능한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특히나 더했다.

그나마 그가 그녀를 비웃거나, 폄하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위안을 주었다. 적어도 리브의 진심을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는 소리일 테니까.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리브였다. 슬쩍 시선을 내리깐 그녀가 슬슬 몸을 움직였다. 후작이 방을 나서고 있으니 그녀 역시 이제 씻고 돌아갈 준비를 해야 했다.

평소처럼 욕실로 이동하려는데, 문득 후작이 말문을 열었다.

“자고 가게.”

그것이 그동안 시혜적으로 건네던 빈말이 아니라는 걸, 리브는 너무도 쉽게 알아챘다.

그가 권유를 가장한 명령을 내린다면 리브가 거절할 재간은 없었다. 차갑게 식은 방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지는 게 싫다는, 개인적인 감상을 후작이 고려해 주진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리브는 충동적으로 대꾸했다.

“혼자는 못 자요.”

그럴 리가. 어린애도 아니고 혼자서 못 잔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하지만 이미 말을 뱉은 뒤였다.

눈썹을 치켜세우며 눈을 가늘게 뜨는 후작의 반응을 확인한 리브가 재빨리 변명했다.

“…그, 코리다랑 같이 자는 게 습관이 되어서.”

뒤늦게 민망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괜스레 목을 가다듬은 리브가 슬그머니 후작의 시선을 피했다.

잠깐이나마 자신이 미쳤었나 보다. 후작이 관대하게 굴어 준다는 사실에 취해 욕심이 아주 끝 모르고 치솟은 게 틀림없었다. 후작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끝내 민망함을 참지 못한 리브가 그냥 자고 가겠노라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씻고 나와.”

아,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는 건가.

그렇게 이해하려는데, 후작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나는 베리워스에서는 잠을 청하지 않으니.”

“…네?”

리브가 얼떨떨한 눈으로 후작을 보았다. 후작은 무심한 얼굴이었으나, 내뱉는 목소리에 연유를 알 수 없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재워 달라며.”

어둠을 무서워하는 어린애를 보는 듯한 꼴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런 게 아니라고, 그냥 농담이었다고 말하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리브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번번이 섹스하고 난 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던 후작이 언제 또 이런 변덕을 부릴지 모르니까.

마른침을 삼킨 리브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부디 날뛰는 심장이 얼른 진정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사람들이 곧잘 하는 오해 중 하나는, 디무스가 사람과 전혀 부대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정확히 규정하자면, 디무스는 사람과 부대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간 일관적으로 모두를 배척했으니 뭔가 차이를 구별할 계기도 없었으리라.

리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녀는 디무스가 밤새 타인과 한 침대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자 눈에 띄게 굳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도대체 얼마나 범접할 수 없는 괴물이었는지 모르겠다.

황당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그녀는 제 생각이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을 테니.

“코리다 양에게는 소식을 확실하게 전했습니다. 안전을 위해 집 주변에 호위를 세웠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외박을 결정하고도 집에 홀로 있을 코리다를 생각하느라 근심을 감추지 못하던 리브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필립은 그런 리브에게 몇 가지 안내를 더 해 준 뒤 조용히 물러났다.

그들이 있는 곳은 랑제스 저택의 수많은 방 중 하나였다. 디무스의 개인 침실은 아니었으나, 손님방이라기에는 과도하게 좋은 방.

이미 전에도 랑제스에서 일을 치른 적이 있기 때문일까? 리브가 이 방에서 잘 준비를 하는 게 딱히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전에 그녀를 저택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했었지.

“자기 전에 따로 필요한 건?”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런데 후작님께서는 그렇게 주무시나요?”

리브의 얼굴에 의아한 감정이 묻어났다.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라기에 디무스의 차림이 너무 불편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디무스가 힐끗, 제 옷을 확인했다. 확실히 지금의 옷차림은 홀로 잠자리에 들 때와는 조금 달랐다. 목까지 잠근 셔츠에, 면바지는 실내복이긴 하지만 잠옷으로 입기에는 갑갑한 부분이 있으니까.

“문제가 있나?”

“한 침대를 사용하는 게 꺼려지신다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무리해서 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무엇을 행하든 예상 가능한 손바닥 위에서 다루었고.

당장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바로 그 증거가 아닌가. 알아서 걸어 들어온 이 여자 역시, 언제나 그의 예상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디무스의 말에 리브가 입술을 말아 다물었다. 디무스와 달리 펑퍼짐하기 짝이 없는 제 잠옷을 내려다본 리브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디무스를 외면했다.

“불편해 보이세요.”

그 말이 꼭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들렸다. 조금 미친 생각인가 싶기는 하지만.

“가벼운 차림이 숙면에도… 좋다던데요.”

“선생.”

우물쭈물하던 리브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디무스는 그런 그녀를 빤히 보다가 무심한 어조로 툭 말을 던졌다.

“나를 벗기고 싶은 건가?”

아마도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내젓거나,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치지 않을까.

그렇게 예상했던 디무스를 비웃기라도 하듯 리브의 안색은 퍽 멀쩡했다. 도리어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나지막한 탄성을 뱉기까지 했다.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이불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제 앞에서는 편해지셔도 괜찮지 않으신가요?”

말을 뱉은 직후, 리브가 그의 눈치를 보듯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태연한 척 목소리를 꾸미며 말을 덧붙였다.

“저는 후작님의 침상에 오르는 유일한 사람인데.”

불현듯 그녀가 어설픈 유혹을 한답시고 옷을 벗어 던질 때가 떠올랐다. 지금 이 기분이 그때와 비슷한 것 같았다.

리브는 그가 랑제스 저택에 데려오고, 지하실까지 보여 준 것도 모자라서자고 가는 걸 허락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를 터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넘치도록 과분한 관심을 쏟아 준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것도 모르니 저렇게 더 과한 관심을 달라며 떼쓰는 것이지.

디무스는 그가 내키지 않은 내색을 보이면 그녀는 즉각 제 말을 철회하리라는 걸 알았다. 당장 이 순간 기분이 나빴다면 아마 고민할 필요도 없이 리브를 비웃어 주었을 텐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은 불쾌감보다는 호기심이 먼저 일었다.

“그렇다면 선생이 내 침실 시중을 들어 볼 텐가?”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흉터를 두고 승리의 훈장이라고 칭하던 여자.

“제가요?”

“그래. 그리 벗기고 싶다니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과연 이 몸뚱이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올지 궁금했다.

훈장이라고? 훈장. 참으로 태평하고 귀여운 표현이었다.

“어떤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브를 보며 디무스는 다소 신경질적인 웃음을 흘렸다. 리브는 날카롭게 곤두선 디무스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무방비하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목둘레를 꽉 조이고 있던 첫 번째 단추가 리브의 손에 의해 풀렸다.

디무스는 자신의 앞에 바짝 붙어 서서 조심스럽게 단추를 푸는 리브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옷시중을 받은 게 얼마 만의 일이었더라? 제 손으로 대강 벗어 던지던 셔츠가 남의 손에 의해 벌어져 가는 모습이 꽤 신기하고 생소했다.

본래 그는 스스로 무언가를 하는 게 익숙한 남자였다. 사관 학교에서도 그랬고, 전쟁터에서도 그랬다. 특히나 사적인 부분에서는 더욱 그랬다. 단지 흉터 가득한 나신을 내보이기 싫다는 감정적인 요인을 제외하고서라도 말이다.

지금이야 괜찮다고 해도 한창 전쟁터를 누빌 때는 늘 목숨의 위협을 염두에 두었다. 사소한 시중 하나에서도 의심과 검증을 거듭해야 하는 나날이었다.

디무스가 잠시 옛 생각에 잠긴 사이, 셔츠 단추는 어느덧 절반 이상 풀렸다. 그에 따라 안쪽에 가려져 있던 맨살도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일정한 속도로 단추를 풀던 손길이 주춤거리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징그럽나?”

뱉은 것은 물음이나 실상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단정하고 있는 어조였다. 솔직히 디무스가 보기에도 그의 몸뚱이는 객관적으로 정말 징그러우니까.

“벌레가 기어 다니는 모양새지.”

실제로도 그런 느낌을 종종 받았다. 다 아문 상처가 간지럽고, 흉터가 점점 더 커지는 듯한 착각이 들고, 밤새 온몸에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느낌.

일부러 이 몸을 보지 않고자 옷으로 꽁꽁 싸매도 소용없었다. 그의 기억 속에는 부서지고 찢어지고 망가진 사지가 수두룩하게 남아 있으니까. 그 기억은 바래지도 않고 시시때때로 튀어나왔다. 코를 찌르는 악취와 피비린내, 악을 쓰는 비명까지 덩달아 말이다.

그는 고깃덩어리에 더 가까워 보이는 그것들이 한때 사람이었음을 인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누드 작품들은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가. 영원히 유지되는 그 완벽하고 깨끗한 모습이란.

디무스는 리브를 물끄러미 보았다. 고개를 내리고 있는 터라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말해 보게, 선생. 아직도 흉터가 승리의 훈장으로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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