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74)화 (74/138)

어느 정도 숨을 고른 것 같은데,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오히려 디무스에게 완전히 기댔다. 그녀로서는 아주 큰 결심이라는 걸 증명하듯, 옷자락을 쥔 리브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후작님께서는 제가 무슨 각오를 했는지 모르시겠죠.”

“내 비위를 맞추는데 ‘각오’까지 필요하나?”

디무스가 조소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리브는 대답 대신 그저 그의 옷자락을 꽉 말아 쥐었다. 전이라면 구겨지는 부분이 눈에 거슬렸을 텐데, 절박하게 매달리는 리브를 보니 옷자락 조금 구겨지는 것쯤이야 큰 흠처럼 여겨지지도 않았다.

디무스가 손을 들어 리브의 뒷머리를 슬쩍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 얽혔다. 덕분에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제 손짓에 따라 점점 더 엉망으로 변하는 머리카락을 보던 디무스가 손을 내려 리브의 목덜미 쪽을 감쌌다. 힘주어 잡은 덜미를 끌어당기자, 리브가 순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무슨 각오인지 말하고 싶다면 들어 주겠네.”

조금 전의 키스 때문일까? 흥분감이 은은하게 남아 있는 듯, 리브의 눈가가 조금 붉었다.

“괜찮아요, 후작님께는 대단치도 않을 각오니까. 그냥….”

짧지만 거친 키스로 살짝 부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이번에도 제가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걸 말씀드리는 거예요.”

디무스는 처음으로 리브의 속을 알 수 없다고 느꼈다. 올곧은 시선은 늘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전부 내비쳐 왔는데.

그러나 그는 이 낯선 감상에 집중할 수 없었다. 곧 두 팔을 뻗어 디무스의 목을 끌어안은 리브가 적극적으로 입술을 맞대 왔으므로.

***

의상실에서의 반응은 하이롭보다 더 심했다.

디트리언 후작이 손수 드레스를 맞춰 주기 위해 데려온 여자라니!

사장이며 직원이며 시종일관 리브에게 눈길을 떼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리브는 그 시선 속에서 시샘과 질투, 그리고 경악을 느꼈다. 순수한 감탄도 어느 정도는 있었겠으나, 그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이 더 컸다.

그럴 거라고 짐작하고 갔음에도 괜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기실 후작에게 한마디만 하면 전부 사라질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건 잠깐일 터였다. 후작이 그녀의 모든 일상을 단속해 주지는 못할 테고, 리브는 앞으로 어딜 가나 저런 적의와 불쾌한 호기심을 마주해야겠지.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차라리 익숙해지는 게 나았다. 그럼 적어도 무시할 수는 있을 테니까.

다만 의외라고 생각되는 게 있다면 후작의 태도였다.

리브는 이제껏 후작이 그녀 못지않게 이 관계를 숨기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후작은 제 입으로 ‘흔적을 남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힌 적이 있질 않나. 이제 와서 만인 앞에 여성을 대동하고 나서면 그가 싫어하는 ‘게걸스러운 자들’이 달라붙을 게 뻔한데.

아직 뜨거운 공기가 사라지지 않은 침대 위에 누워서 숨을 고르던 리브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후작은 오늘도 관계를 맺고 바로 침실을 나가지 않았다. 지난번에 리브에게 장신구를 주기 위해 남아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은 딱히 그런 목적도 없어 보였다.

저 사소한 행동이 이제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미세하게 변해 가는 그의 태도가 리브의 속을 엉망진창으로 뒤집었다. 누군가 손을 넣어 휘저은 것처럼, 감정이 마구잡이로 엉켰다.

“구설수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싫어하네.”

침대에 걸터앉아 시가를 물고 있던 후작이 냉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언제나처럼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었다. 관계를 맺었을 때 엉망으로 무너지는 건 늘 리브뿐이었다.

어차피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관계이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욕심 내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저 차림이 못내 서운했다. 오늘은 그녀와 대놓고 의상실을 방문했으면서. 그만큼이나 남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그녀를 내보였으면서.

“오늘의 후작님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신 것 같아서요.”

그는 왜 이 관계를 남들에게 드러내기로 마음먹었을까? 설마하니 그가 자신의 ‘기이한 취미’를 공개할 작정은 아닐 텐데.

“구설수가 때로는 꽤 쓸모 있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지.”

후작이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대꾸했다.

“나는 내 뒤를 캐는 걸 싫어하는 거지, 숨고 싶은 게 아니거든.”

“후작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게 없으니까, 당연히 조용히 지내시길 바라시는 거라고 여겼어요.”

“나를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있지.”

후작이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눈치를 볼 필요가 없고.”

이따금 그는 본인의 과거로 추정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흘렸다. 어차피 리브가 들어 봐야 어디 가서 떠들지도 못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리브의 입을 믿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리브는 좋았다. 먼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재촉할 수는 없으나, 후작이 이렇게 한마디씩 흘릴 때마다 그녀는 자신만 아는 후작의 모습에 그 정보를 추가해 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정보는 흥미로웠다. 후작을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니, 역시 가문과 연관된 일이겠지? 카밀은 후작의 가문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정말로 어느 왕족의 살아남은 혈족일 수도 있고.

왕족인 디무스를 떠올리는 건 퍽 쉬웠다.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옷감과 보석을 휘감은 그는 상상만으로도 대단했다.

헛된 상상에 잠겨 있던 리브는 맨살에 닿은 손길을 느끼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디무스가 옆구리 쪽을 손가락으로 살살 긁고 있었다. 정확히는, 옆구리에 남은 흉을.

“나는 선생이 흠집 나는 게 생각보다 더 싫은 모양이야.”

날카로운 바늘로 길게 긁힌 상처였다. 아까 의상실에서 치수를 재던 와중 수습 직원이 옷핀으로 긁어 놓은 것이었다. 실수라며 울음을 터뜨리는 수습 직원의 뒤로, 만족감을 미처 숨기지 못한 직원 몇이 힐끔거리고 있었지.

아마도 그 수습 직원은 저보다 높은 연차의 다른 선배 직원의 강요에 떠밀려서 그런 짓을 벌였을 것이다. 리브가 이를 문제 삼았을 때 수습 직원이 홀로 책임지고 해고되는 결과를 맞이할 수 있도록.

리브는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 덕분에 후작은 침대 위에 오르고서야 리브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알아챘다.

“금방 사라질 거예요. 깊지 않은 상처니까.”

“쯧.”

리브의 말에도 후작은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리브는 그가 건드리는 대로 몸을 맡긴 채 몸을 늘어뜨렸다.

“깨끗한 나신을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아름다우니까.”

자꾸 상처를 건드려서일까? 희미하게 생긴 딱지가 조금 간지러워지는 듯했다. 혹은 다 식은 체온이 다시 올라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문제 아닌가? 뭐든 흠집이 난 건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네.”

리브의 시선이 제 옆구리로 향했다. 금방 사라질 상처. 인간의 질시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저런 모양일 것이다. 붉고, 따갑고, 미세하게 거슬리는.

“하지만 흠집은 삶을 견뎌 냈다는 증거이기도 하잖아요.”

상처를 응시하던 눈동자가 조금 더 움직여, 사내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사이라서 굳이 벌리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지만, 리브는 저 손에 있는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후작님의 손에 남은 그 흉터처럼, 승리의 증거요.”

저것이 좋다고 말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후작은 본인의 손에 있는 흉터를 싫어하는 듯했다. 그러나 리브는 그 흉터가 좋았다.

먼지 한 점 허락하지 않고 살아온 듯한 남자가 조금쯤은 사람처럼 여겨져서. 적어도 그녀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 같아서.

미친 척 욕심내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삶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승리했다고 할 수 있으니까.”

리브의 말에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간지럽히다시피 하던 손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리브의 살을 짓누르며 움켜쥔 후작이 입매를 비스듬하게 끌어 올렸다.

“선생의 시각은 참 특이하고.”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시가 연기가 희미하게 뱉어졌다.

“흥미롭군.”

“제 시각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흠집을 싫어하시는 게 꼭, 후작님의 손에 남은 흉터도 싫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후작은 리브에게 시선을 준 채 조용히 시가를 빨아들였다. 굵은 시가 끝에 붉은 열기가 반짝였다.

“다르게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아까보다 더 진한 연기가 방을 뿌옇게 채워 나갔다. 어딘가 매캐하게 느껴지는 연기 사이로, 후작의 차가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찢어지고 절단되어 사방으로 내던져진 사지를 본 적 있나?”

건조한 어투였다.

“피와 흙이 엉겨서 말라붙어 있고 뿌연 먼지가 가득 쌓인 대지 위에서는 팔다리 하나 날아가는 것 정도는 우습지. 겨우 목숨을 부지해 봐야 기괴하게 뒤틀리고 변한 몸뚱이로 평생을 살아야 하고, 잠조차 편히 들지 못하고….”

그가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묘사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들이 뱉는 비명과 절망의 소리가 얼마나 시끄럽고 추한지 몰라.”

언제나 오만함과 냉소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던 벽안에 처음으로 낯선 감정이 스쳤다. 그것은 허무함이었다.

그것은 리브가 무언가 반응을 보일 새도 없이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리브가 감정의 자취를 찾아보려 했으나, 디무스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그의 눈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킨 디무스가 시가를 재떨이에 내려놓았다. 나가려는 듯 등을 보인 그를 향해 리브가 툭 말을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면, 희망을 꿈꿀 수도 있잖아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갈 줄 알았던 디무스가 힐끔, 리브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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