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71)화 (71/138)

정말 누드화가 외부에 유출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이 저택 지하실에 두는 게 정답이라고.

그런 말을 하려 했다. 그런데 도리어 리브의 말을 듣고 멀쩡히 걸어 두었던 그림들을 치우게 되다니.

디무스는 제 행동이 조금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딱히 후회되지 않는 게 또 이상한 일이었다. 리브를 제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는데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산뜻한 기분이었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그녀는 이제 제법 능숙하게 원하는 것을 요구해 왔다. 아마도 의도한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 요구하는 태도가 퍽 그의 음심을 동하게 했다.

그는 제 행동에 확신을 얻었다. 여자를 데려오기 위해 그가 한 모든 수작질은 전혀 부질없고 무의미한 노력이 아니었다. 도리어 반드시 해야 했을 일이다.

얼마나 만족스러운가. 심지어 절정 직전의 그는 아주 잠깐이나마, 그녀를 이 저택 바깥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

한숨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를 향한 성욕은 나날이 정도를 모르고 날뛰었다. 이제껏 제 속에 이런 욕정이 있었던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말이다.

디무스는 조금 전까지 뒹구느라 엉망으로 구겨진 침대 시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조용히 와인 잔을 들었다. 그가 막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순간, 리브가 안쪽 욕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을 걸치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꾹꾹 누르며 나오던 그녀가 디무스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작님?”

느슨하게 묶은 가운과 젖은 머리카락, 말갛고 뽀얀 얼굴을 보자 속이 근질근질했다. 탐스러운 허벅지 사이에서 허리를 놀렸던 게 바로 조금 전의 일인데 전부 없던 일처럼 모든 감각이 다시 곤두섰다.

그가 치미는 갈증을 달래고자 와인을 들이켰다. 잔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왜 그렇게 놀라지?”

디무스의 물음에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보던 리브가 슬며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당연히 안 계실 거라고 생각해서….”

그동안 디무스는 늘 관계를 마친 뒤 먼저 자리를 떴다. 딱히 어떤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침구에 남은 정사의 흔적이나 공기 중에 떠도는 짙은 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브와 몸을 겹치는 건 이제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지만, 체액으로 더러워진 공간에서 굳이 시간을 오래 보낼 까닭은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그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리브에게 전해 줄 물건이 있었던 것이다.

본래 섹스하기 전에 주려 했는데, 지하실에서부터 발정이 나는 바람에 여유 없이 그녀를 안았다. 실컷 파정을 하고, 지칠 대로 지친 리브가 욕실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그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상자를 떠올렸다.

그래서 별수 없이 기다린 참이었다. 그런데 화들짝 놀라는 리브의 반응을 보니 어째 미묘한 기분이었다.

저렇게까지 놀라울 일인가.

“이곳은 내 저택이니, 내가 어디에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

“그 말씀이 맞습니다.”

조심스럽게 가운의 앞섶을 여민 리브가 디무스의 눈치를 보았다.

“제게 지시할 내용이 있으신가요?”

“내가 꼭 지시할 일이 있어야 선생을 마주하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후작님께서도 씻으셔야 할 텐데 저를 기다리셨으니 무언가 볼일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되어서요.”

그녀의 생각은 아주 타당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디무스는 퍽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그녀를 부를 때는 대체로 의도가 있었지만, 가끔 아무 이유가 없기도 했었다. 그런데 저렇게 꼭 볼일이 있어야만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거기 위, 상자를 열어 보게.”

디무스가 턱짓으로 침대 옆 탁자를 가리켰다. 탁자에는 붉은색 벨벳 상자가 놓여 있었다.

“이건….”

리브가 멈칫했다. 아마도 그녀는 상자만으로도 내용물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미 선례가 있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몰랐다.

“열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툭, 말을 뱉은 디무스가 빈 잔에 와인을 채웠다. 잔을 들고 빙글빙글 돌리자, 투명한 유리잔 안에서 붉은 와인이 출렁거렸다.

그런 디무스를 물끄러미 보던 리브가 조용히 상자를 열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리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상자 속에 담긴 건 장신구였다. 전에 받은 것보다 훨씬 화려하고 아름다운 목걸이와 귀걸이.

부담스럽다는 눈으로 그것들을 보던 리브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이걸 걸치고 하는 건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될까요? 코리다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맨몸으로 장신구만 착용한 선생을 보는 건 확실히 즐거운 일이지만, 그럴 용도로 준비한 건 아니네. 가져가라고 주는 거지.”

디무스의 말에 리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우두커니 서서 상자 안을 들여다보던 리브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런 귀한 장신구를 걸치기에 제 형편이 좋지 않습니다. 어울리는 의복도 없고, 걸치고 갈 만한 자리도 없고요. 그러니 그냥 이곳에 두고, 그냥 원하실 때 꺼내서….”

“어울리는 의복과 마땅한 자리가 생기면 될 일이군.”

“네?”

장난치듯 돌리던 와인 잔을 내려놓은 디무스가 몸을 일으켜 리브에게 다가갔다. 그는 리브가 발견하지 못한, 상자 아래에 깔려 가려져 있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빳빳한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오페라 관람권이었다.

“자리는 생겼으니 의복만 맞추면 되겠어.”

멍한 눈으로 관람권을 보던 리브가 고개를 확 치켜들어 디무스를 보았다.

“저를 파트너로 대동하시겠다고요?”

“놀랄 일인가?”

“전….”

녹색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가득 들어찼다.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벙긋거리는 그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디무스가 상자 속에 있던 것을 꺼내 들었다.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얇은 금줄로 작은 다이아몬드 알을 그물처럼 엮어서 만든 이 목걸이는, 빗장뼈를 넓게 감싸는 디자인이었다. 그가 직접 고른 건 아니지만, 처음 본 순간 리브의 하얀 피부와 잘 어울리겠다고 내심 생각했다.

그리고 과연 그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바짝 여민 가운을 거침없이 헤집은 디무스가 손수 목걸이를 둘러 주었다.

“선생과 친밀한 그 엘레오노르 가문의 애송이가 뒤를 캐고 있으니, 결국 언제고 밝혀질 걸세.”

“막을 수 있으신 거 아닌가요?”

“그렇기야 하지만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겠군.”

조금 전 씻고 나온 따끈따끈한 피부 위로 서늘한 목걸이가 내려앉았다. 가까이에서 내려다본 곧은 목덜미에 솜털이 오소소 돋는 게 보였다. 그것을 엄지로 가볍게 문지른 디무스가 리브의 귓가에 속삭였다.

“굳이 숨겨야 하나?”

리브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녀는 디무스와 저의 관계가 언제까지고 은밀하게 이어지리라 믿었던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비스듬히 보이는 얼굴이 창백했다.

“선생은 이 관계가 썩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지?”

“그럴 리가요. 오히려….”

더듬거리던 리브가 슬쩍 고개를 내렸다. 목에 걸린 목걸이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리브가 한숨 같은 말을 뱉었다.

“너무 과분해서 문제죠.”

“솔직해지는 게 어떤가, 선생.”

디무스는 목걸이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려, 이번에는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알이 크고 투명한 다이아몬드 귀걸이였다.

“정말 누구도 모르는 관계를 이어 가고 싶었나?”

디무스가 리브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귀를 뚫어 본 적도 없는 듯, 도톰한 귓불이 깨끗했다.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던 디무스가 귀걸이의 뒷부분을 확인했다.

일자로 곧게 뻗은 금색 핀 끝이 뾰족했다. 이 정도라면 굳이 바늘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내 곁에 서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어?”

그럴 리가. 모름지기 인간의 욕망이란 한없이 비대해지는 법이었다. 가당찮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제 주제를 한참 뛰어넘는 것까지 올려다보게 되고.

디무스는 리브가 자신에게 상당히 흔들린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틀림없이 더 많은 것을 욕심내리라.

주저하던 리브가 고개를 약간 들었다. 황공함에 몸 둘 바를 몰라 할 줄 알았더니, 예상외로 꽤 침착한 모습이었다.

“제가 후작님 곁에 선다면….”

리브의 눈동자가 디무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건 언제까지죠?”

글쎄, 그건 디무스도 궁금했다. 리브를 언제까지 제 곁에 세울까?

그는 열렬한 수집가였다. 그러나 수집가는 하나의 물건에 언제까지고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껏 한 가지에 이토록 몰두해 본 적이 없는 디무스는 제 변덕이 얼마나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적어도 지금은 리브가 아주 마음에 든다는 사실이었다. 이 관계를 드러내고 예뻐해 줄 의향이 있을 정도로.

“선생이 나를 질리지 않게 하면 돼. 그리고 이제까지 선생은 처신을 아주 잘 해 왔고. 스스로를 좀 더 믿어 보는 게 어떻겠나?”

“윽!”

리브가 미간을 찡그리며 짤막한 비명을 뱉었다.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디무스가 귀걸이로 살을 단숨에 꿰뚫은 까닭이었다. 급작스러운 통증으로 인해 리브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붉게 부어오른 살 위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자리 잡았다.

“잘 어울리는군.”

열감이 느껴지는 귓불과 그 주변을 검지와 엄지로 문질러 보던 디무스가 눈매를 가늘게 접었다.

“다음에는 좀 이르게 만나지. 몇 군데 들러야 할 상점이 있으니.”

남은 하나는 거울을 보고 직접 뚫어 보라며 자못 친절하게 중얼거린 그가 리브의 손에 귀걸이를 쥐여 주었다. 그런 뒤 돌아서려는데, 등 뒤로 리브의 또렷한 물음이 들려왔다.

“저를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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