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67)화 (67/138)

랑제스 저택의 정문을 지나칠 즈음,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한 저택은 흉흉한 소문의 근원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웅장했다. 물론 이 장면에 무뎌질 대로 무뎌진 디무스나 필립의 얼굴에는 감흥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바깥의 놀라운 풍경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놀랐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저 리브 로이데스였다.

“어떠십니까?”

먼지 쌓인 랑제스 저택을 지금의 모습으로 바꾸는 데 전적으로 일조한 필립이 뿌듯한 얼굴로 리브에게 말을 걸었다. 리브는 가까워지는 저택 건물에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혼잣말처럼 대꾸했다.

“…저택이라기보다는 성 아닌가요?”

“하하, 저택입니다. 일단은요.”

“이렇게 멋진 성이 부에르노 주변에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거예요.”

“성이 아니라 저택이지만… 확실히 멋지지요? 통 자랑할 사람이 없어서 그간 어찌나 섭섭했는지 모릅니다. 나름대로 멋지게 보수했는데 이상한 소문이나 돌고 말입니다.”

“관리하느라 고생 많으시겠어요, 필몬드 씨.”

“드디어 제 노고를 알아주시는 분이 나타나셨군요!”

넉살 좋게 대화를 이어 가는 필립을 힐끗 본 디무스가 작게 혀를 찼다. 리브는 바깥 풍경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서 디무스의 시선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걸 보는 건 대체로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지금 저렇게 넋을 놓은 모습은 괜찮았다.

오히려 조금쯤 즐겁기도 했다. 발갛게 열 오른 뺨이나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가 제법 귀여웠기 때문이다.

늘 점잖은 척, 어른스러운 척 굴기만 하더니.

저런 모습을 보면 애 같은 면이 있기도 했다.

리브의 그런 모습들은 그녀가 마음의 빗장을 열수록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곁에 친밀한 사람을 거의 두지 않는 리브의 인간관계를 미루어 볼 때, 아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정말 극소수의 앞에서일 것이다.

디무스는 자신이 그 ‘극소수’에 속했음을 확인할 때마다 만족스러웠다.

“아, 손님이….”

마냥 들뜬 얼굴로 바깥을 보던 리브가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반응을 확인한 디무스도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택 현관 쪽에 누군가 말을 세워 두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디무스를 이곳까지 오게 만든 당사자였다.

상대방도 저택으로 귀환한 마차를 확인한 듯했다. 서성거리던 걸음이 절도 있게 자세를 잡았다.

마차가 멈춰 서자 상대가 즉각 다가왔다. 익숙하게 마차 문을 연 그는 창가 가까이 앉아 있던 리브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무방비하게 그를 마주하게 된 리브 역시 당황한 눈으로 열린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스르륵 눈을 굴려 디무스의 안색을 살폈다.

“발판이 필요하실 겁니다. 제가 먼저 내리도록 하지요.”

어색하게 굳은 두 사람 사이를 끼어든 건 필립이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필립이 아래쪽에 달려 있던 접이식 발판을 펼쳤다.

“자, 내리시면 됩니다. 로이데스 양.”

필립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얼떨결에 마차에서 내린 리브가 주춤거리며 낯선 상대와 거리를 두고 섰다. 상대 역시 리브를 경계심 섞인 눈초리로 살폈다.

영 어색한 두 사람의 분위기에 필립이 중재를 하려는 듯 나서서 디무스에게 물었다.

“로이데스 양은 제가 따로 모실까요?”

리브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어렵지 않게 그것을 알아챈 디무스가 다소 심술궂게 입술을 비틀었다.

“됐어. 방이나 정리해 둬.”

“알겠습니다.”

당장 필립을 따라가고 싶다는 눈빛으로 서 있던 리브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 안쪽으로 들어가는 필립을 애처롭게 보는 모습이, 괜스레 괴롭히고 싶은 마음을 부추겼다.

디무스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때까지도 리브를 미심쩍은 눈으로 보던 이가 얼른 디무스를 향해 거수경례했다.

“급한 소식이라 부득이하게 연락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소….”

“로만 경.”

디무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내가 언제까지 교정해 줘야 하나?”

“시정하겠습니다.”

로만이 재빨리 손을 내렸다. 그러나 잔뜩 기합이 들어간 어깨나 각진 자세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출신을 알 수 있게 했다. 눈살을 찌푸린 디무스가 냉담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보고는 안에서 듣지.”

“네, 알겠습니다.”

그대로 걸으려던 디무스가 문득 옆으로 팔을 뻗었다. 아주 조금씩 물러나며 그와 거리를 벌리고 있는 리브를 향해서였다.

아마도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뒤쪽으로 물러나려 했을 리브의 팔을 잡아 단숨에 제 옆으로 끌어오자 그녀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후작님?”

“왜?”

디무스가 팔을 놓고 리브의 허리 쪽으로 손을 내렸다. 잘록하고 얇은 허리를 휘감으며 손끝으로 문지르자, 리브의 몸이 바짝 경직되었다. 리브가 로만을 힐끔거렸다.

“그, 저….”

“문제가 있나, 선생?”

“아니, 아닙니다.”

목덜미며 귓바퀴가 새빨갛게 물든 상태였다. 단순한 부끄러움이라기에는, 얼핏 보이는 옆얼굴에 근심과 수치심이 뒤섞여 묻어나고 있었다.

디무스는 자신이 발견한 감정을 모른 척 외면하며, 그녀의 허리를 단단하게 당겨 안았다. 리브는 거의 그에게 안기다시피 걷게 되었다.

충동적인 선택이었지만 막상 품에 들어온 여자의 몸이 흡족했다. 로만이 그런 디무스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힐끔거렸다.

그러나 한번 으름장을 놓은 덕분인지, 눈치 없는 소리를 뱉지는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랑제스의 거대한 현관문이 열리고, 주인을 마중 나온 고용인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들은 디무스의 옆에 선 리브를 발견하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저택에 들어간 필립이 귀띔을 안 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걸 보니, 지금 디무스의 모습이 어지간히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평소 시중도 최소한으로만 받을 정도로 사람을 가까이 두지 않는 디무스이니, 보란 듯 옆에 끼운 리브의 존재가 놀랍기는 하겠다.

리브도 그들의 시선을 느낀 듯했다. 바깥에서부터 달아오른 얼굴색이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짙어지기만 했다.

그녀는 몸을 비틀어 디무스와의 거리를 벌리려 시도했다. 그러나 디무스가 도리어 강하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고용인들 앞에서 보란 듯이 안기고 말았다.

고민스러운 눈으로 디무스를 힐끔 확인한 리브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했다.

“후작님, 저는 다른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자꾸 저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행동이 처음에는 귀여웠는데,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다. 디무스가 힐끗, 눈을 굴려 리브의 수그린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브는 ‘벗으라면 벗고’까지 알아들었으리라.

“아니었나?”

리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녀의 몸에서 힘이 스르륵 풀리는 게 느껴졌다. 점점 가라앉던 디무스의 감정이 그나마 좀 나아졌다.

손에 감기는 몸이 말랑말랑했다.

***

도대체 후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결국 후작의 집무실까지 끌려와서 한구석에 덩그러니 앉아 있게 된 리브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후작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로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에게 보고를 듣고 있었다. 로만은 처음에 리브를 의식하는 눈치였으나, 후작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보고를 줄줄 늘어놓았다.

덕분에 리브는 원치 않게도 그들의 대화를 들어야 했다. 그나마 로만이 주어를 교묘하게 생략하는 까닭에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몇 가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분의 사람들을 따돌렸던 걸 고려하면, 의외로 실력이 좋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냥 엘레오노르의 후광일 수도 있고.”

후작이 카밀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한 것도 모자라 그를 주시하고 있고, 최근에는 카밀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는데 실패했다는 것.

리브가 시선을 내리깔며 수심 어린 표정을 감추었다.

어째서 후작은 이런 걸 그녀가 알게 하는 걸까?

“좀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겠습니다.”

“적극적?”

로만의 말에 후작이 옅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자가 포기하지 않고 펜던스 남작가를 맴돌고 있습니다.”

“글쎄, ‘펜던스 남작가’를 맴도는 걸까?”

심드렁한 얼굴로 시가 케이스를 꺼낸 후작이 리브를 돌아보았다. 최대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리브가 불시에 닿은 그의 시선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후작은 리브와 눈을 마주 보고 있는 상태로 시가를 물었다.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혀끝이 날름거리는 게 보였다.

“과연?”

비스듬히 기울인 고개를 따라 그의 백금발이 흘러내렸다.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나?”

갑자기 대화에 리브를 끌어들이는 후작의 모습에 로만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후작님?”

“가끔은 외부의 객관적인 의견도 들어 봐야지. 안 그런가?”

무성의하게 대꾸한 후작이 시가에 불을 붙이며 재차 리브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은 그와 꽤 친밀해 보였으니, 답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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