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66)화 (66/138)

아쉽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시던 카밀이 리브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운을 뗐다.

“그래도 추기경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축복의 기도는 관심 있으시죠?”

추기경의 방문을 사람들이 기뻐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방문한 도시에서 평화를 기원하는 축복의 기도를 올리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두가 그 기도를 직접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보고 싶다고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추기경이 손수 주관하는 기도인데.

“예배당 수용 인원은 한정되어 있고, 입장할 사람들은 이미 확정되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제가 그중 한 명이거든요.”

펜던스 남작의 호의인지, 아니면 엘레오노르라는 이름의 힘인지는 모르겠다. 둘 중 하나겠지.

놀라울 것도 없어서, 리브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밀이 목소리를 낮추며 소곤소곤 말을 이었다.

“동행인을 데려갈 수 있는데,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도시에 딱히 인연을 만들지 않아서요. 제 옆자리가 비어 있을 예정입니다.”

“그럼 자리를 파세요.”

추기경의 기도를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웃돈을 주고서라도 예배당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지천으로 널렸을 텐데.

리브의 칼 같은 대꾸에 카밀이 웃음을 터뜨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선생님이 구매하실래요?”

“괜찮아요.”

“하지만 추기경님이 직접 주관하시는 축복의 기도를 보면, 행운이 따른다고 하잖습니까.”

추기경의 기도를 통해 얻는 행운이라.

몇 개월 전이라면 그런 불확실한 미신에 혹해, 염치 불고하고 데려가 달라 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금 리브는 전혀 혹하지 않았다.

“그런 행운은 제게 오히려 과분할 것 같네요. 저는….”

오직 그녀에게만 행운을 내려 주는 이를 이미, 만났으니까.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서요.”

***

집까지 에스코트를 해 주겠다는 카밀을 떨치는 건 어려웠지만, 그 노고를 감수한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케이크가 맛있었다.

코리다는 치료를 시작한 뒤로 식단을 관리 중이라 많이 먹지는 못했는데, 어찌나 아쉬워했던지 몰랐다. 몸이 다 나으면 꼭 사 먹으러 갈 거라고 거듭 다짐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치료 의지에 동기 부여가 된 것 같으니 더 좋은 일이었다.

리브의 입에도 케이크는 정말 훌륭했다. 얼마나 훌륭했느냐면, 하나 더 주문해서 베리워스 저택에 챙겨 갈까 고민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리브는 관두기로 했다.

‘상주하는 저택 요리사가 있으니,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맛있긴 하지만 베리워스 저택의 요리사는 외부 음식을 탐탁지 않게 여길 수도 있었다.

다만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소소하게라도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매번 자신들을 챙겨 주는 필립이나 아돌프 등에게 자그마한 성의라도 보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전부 후작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호의지만, 그런 걸 감수하고서라도 그들은 시종일관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였다.

무엇보다 리브는 그들이 코리다를 챙겨 줄 때 가장 고마웠다. 베리워스 저택을 드나들고 난 후로 코리다가 눈에 띄게 밝아진 걸 체감하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뭔가 선물할 만한 게 없을까.’

이제는 꽤 익숙해진 베리워스 저택 입구로 들어서며, 리브가 필립의 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필립이 그녀를 돌아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 그런 건 아니고요.”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괜찮으니 됐다는 사양이 돌아올 것 같았다. 선물에 관해서는 좀 더 고민해 보고, 리브는 일단 감사 인사부터 하기로 했다.

“코리다에게 책을 빌려주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요즘의 코리다는 매사에 의욕적이었다. 서재에서 아돌프와 보낸 시간이 그녀에게 어떠한 동기 부여를 한 게 틀림없었다. 필립은 그런 코리다의 씩씩함을 무척 귀엽게 보는 듯했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손녀라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친절이었다.

“코리다 양이 책을 험하게 다루지 않아서 저도 믿고 빌려드릴 수 있었습니다. 참, 시릴로 양이 코리다 양과 좀 더 어울리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아직 코리다 양의 외출은 어렵습니까? 저는 코리다 양의 건강에 관해서는 잘 몰라서요.”

“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하지만 고마운 일이네요.”

시릴로 아빌리오는 아돌프가 소개해 준 독서 친구였다. 코리다와 동갑이라는 소녀였는데, 듣자 하니 베렌으로 단기 유학을 온 마주르칸 출신 학생이라는 모양이었다.

본래 대도시 학교에서 수학한 시릴로는 유학 기간을 마치고 마주르칸으로 돌아가기 전 베렌을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던 중 시릴로의 친척과 아는 사이인 아돌프가 코리다를 소개해 주겠다며 말을 꺼냈고, 시릴로는 기꺼이 새로운 친구를 만나러 와 준 것이다.

리브가 곁에서 보기에 코리다와 시릴로는 마음이 잘 맞았다. 심지어 두 사람은 만난 지 하루 만에 친해져서 거의 매일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리 많이 하는 건지, 늘 편지는 서너 장을 넘겼다.

“하하, 시릴로 양도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으니 서로 즐거운 일이지요.”

“매번 세심하게 챙겨 주시니,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괜찮습니다. 다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뭐든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리브의 진심 어린 말에 필립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렇게 저택에 방문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기쁨입니다. 로이데스 양이 오시지 않으면 이 저택에는 사람이 사는 줄도 모를 테니까요.”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 저택에 근무하는 고용인들이 아주 많은 것 같은데.

하기야, 사람이 아무리 많아 봐야 이런 외딴 저택을 온종일 지켜야 한다면 생활이 역동적이진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손님을 대접하는 게 오히려 재미있는 일과가 될 수도 있겠지.

필립을 따라 미소 짓던 리브가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필몬드 씨는 베리워스 저택에 머무르시는 건가요?”

“정확히는 후작님을 모시고 오가는 중입니다.”

“오간다고요?”

리브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무언가 대답을 하려던 찰나, 무심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본가도 관리하는 집사니까.”

필립과 리브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 난 곳으로 옮겨졌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상승하는 계단 가장 위쪽, 난간에 가볍게 손을 걸친 후작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터라, 리브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후작을 올려다보았다.

후작은 근래 자주 보았던 평상복 차림이 아닌, 목 끝까지 단추를 꽉 여민 외출복 차림이었다.

“랑제스 저택과 베리워스 저택을 오가고 있지.”

느리게 계단을 내려오며,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랑제스라면 박제품이 있다는….”

무심코 중얼거린 리브가 흠칫하며 입술을 다물었다. 가까이에서 그녀의 말을 들은 필립이 작게 웃었다. 리브가 중얼거린 내용을 필립 역시 들어 본 모양이었다.

“랑제스 저택은 부에르노에서 한때 유령 저택으로 이름이 높았던 곳입니다. 덕분에 아주 까마득한 옛날부터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답니다. 물론 주인님께서 매입하신 뒤 통째로 뜯어고친 지금은 그저 고풍스러운 고저택이지만요.”

랑제스 저택은 디트리언 후작 가문의 저택이었다.

본가라고는 하나 진짜 본가인 건지, 아니면 대충 그렇게 둘러대고 다니는 장소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안타깝게 되었군. 랑제스에 돌아가 봐야 해.”

“아….”

“필립, 채비해.”

계단을 내려온 후작이 필립에게 냉담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즉각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리브에게 다시 마차를 준비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몸을 돌렸다.

몇 걸음 오르지도 못한 계단을 다시 내려와 로비에 도착한 리브가 엉거주춤 서서 후작을 곁눈질했다. 후작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찌푸린 미간에 짜증이 가득했다.

“…안 좋은 일이신가요?”

리브의 나지막한 물음에 후작이 힐끗, 눈만 굴려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깊이 생각할 것 없이,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할 일이지.”

“아, 그렇군요.”

그건 굳이 물어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리브는 조금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로 후작의 시선이 길게 머물렀다.

그러다가 불현듯 화제를 돌렸다.

“궁금하지 않나?”

“네?”

“소문이 사실인지.”

리브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후작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는데, 미세하게 서려 있던 짜증은 사라진 상태였다.

“박제 말이네.”

“아, 그건…!”

“지하에 정말 박제를 모아 두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리브는 자신이 후작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한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귀에는 지금 후작이 함께 랑제스 저택에 가자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니까.

“박제는 아니지만, 다른 게 있네.”

“다른 거요?”

후작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로이데스 양,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때마침 필립이 돌아왔다. 필립은 리브에게 조심히 들어가라는 작별 인사를 건넨 뒤, 후작의 외투와 모자를 챙겨 주었다.

후작은 조금 전까지 나눈 대화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리브를 외면하며 필립의 시중을 받았다. 외투를 입고, 모자를 눌러쓴 그가 지팡이를 짚으며 로비를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걸음을 멈춘 후작이 시선을 내렸다. 그의 시선이 제 소맷부리를 움켜쥔 리브의 손에 닿았다.

필립이 의아한 눈으로 리브를 보았다. 뒤늦게 제 행동이 너무 어린애 같았다는 걸 자각한 리브가 주춤거리며 옷을 놓았다.

잡혔다가 놓인 옷소매를 물끄러미 보던 후작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흰 장갑을 낀 그의 손이 리브에게 내밀어졌다. 마른침을 삼킨 리브가 그 위에 조심스럽게 제 손을 얹었다. 사내의 단단한 손끝이 그녀를 잡고 이끌었다.

필립이 준비한 검은 마차는 소용없게 되었다. 대신 리브는, 후작의 곁에 앉아 랑제스 저택으로 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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