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65)화 (65/138)

맨손으로 검을 쥐는 패기를, 포식자들은 꽤 흥미롭게 본 듯했다. 애초에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검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서, 손가락이 잘려 나가지 않을 거라는 계산하에 그런 짓을 벌였다는 걸 그들은 몰랐다.

결과적으로 디무스는 그들의 관심을 사게 되었고, 시일이 지날수록 사관 학교 내에서 입지를 얻었다. 일취월장하는 실력 또한 그 행보에 힘을 실어 주었다.

새삼 그때의 노고를 곱씹으며 자기 연민에 빠질 생각은 없었다. 그런 감정이 얼마나 무가치한지 알기 때문이다.

다만….

“이기셨나요?”

그가 말한 ‘이겼다’는 대답은, 말 그대로였다. 누가 봐도 명백히 불리했던 그 대련에서 이겼으니까. 그건 객관적인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이 흉터는 승리의 훈장이네요.”

디무스는 한 번도 그때의 자신을 ‘승리’했다고 칭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일은 굴욕적이고 하찮았던 과거의 자신을 대변하는 일화이기 때문이다. 잔꾀를 부리기야 했으나, 승리라는 거창한 단어가 붙기에는 퍽 우스운 모양새였다.

이런 흉한 흔적을 달고서도 아슬아슬하게 버텨 낸 것이, 그렇게 꼴사나운 모습이 승리일 리가. 승리는 그보다 더 찬란하고 드높아야 마땅한 법인데.

손가락 사이의 흉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디무스가 긴 숨을 뱉었다.

“이겼냐니.”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었다.

지금처럼 흉터를 결벽적으로 감추기 이전, 그의 흉터들을 본 사람들이 가장 처음 내뱉는 말은 보통 ‘많이 아팠겠다’는 연민 내지는 ‘어쩌다 그랬느냐’는 물음이었다. 이는 디무스에게 몹시 불쾌감을 주는 관심이었다.

아팠겠다는 연민이야 말할 것도 없고, 과거를 캐묻는 질문 또한 달가울 리 없었다.

“하….”

이겼다는 대답에 티 없이 웃던 리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진심인 것 같았다.

이 흉터가 정말 그녀의 눈에는 승리의 증거로 보였을까?

제가 가리고 다니는 전신의 흉터를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승리의 증거라고? 그 흉한 것들이?

그따위 소리를 하다니, 맹랑하지 않나.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지만, 가시에 찔리는 걸 감수하고도 장미를 향해 손을 뻗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죠.”

그래, 참 맹랑하기도 하지. 감히 저를 두고 그리 말했으니. 두 사람의 관계를 굳이 따지자면 그는 진검을 쥔 포식자고, 그녀는 맨몸으로 선 피식자의 처지인데.

엄지로 상처 부근을 문지르던 디무스가 몸을 일으켰다. 시가도, 술도 내키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으로 인해 갈증이 일었다. 언제라도 그가 명령을 내리면 눈앞에 나타날 테지만….

“가지가 꺾여서 아픈 건 장미도 마찬가지인걸요.”

어쩐지 그는 지금 느껴지는 이 척박함을 해갈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어두운 창문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바깥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어둠 속에 홀로 우뚝 서 있는 것처럼 비쳤다. 아마도, 그것이 맞을 터였다.

“부러진 장미 가지는 결국 시들어요, 후작님.”

***

부에르노의 분위기는 나날이 활기차게 변했다.

추기경의 방문이 성큼 다가오는 만큼, 도시 곳곳에서 축제를 준비하듯 다양한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들뜬 분위기 속에서 수업 같은 게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게다가 디트리언 후작이 추기경과 순례단을 접대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펜던스 남작가에서는 손님맞이에 돌입했다.

펜던스 남작 부인은 어수선한 저택 분위기를 감수하고서라도 수업을 진행하길 바랐으나, 순례단을 만날 생각에 마음이 잔뜩 부푼 밀리언을 보고선 이내 포기했다.

결국 남작 부인은 리브에게 양해를 구했다. 예전이라면 생활비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테지만, 사정이 많이 나아진 리브는 흔쾌히 상황의 특수성을 받아들였다.

본래 진행하려던 수업이 또 미뤄져, 리브는 곧장 돌아가기로 했다. 괜히 시간을 지체해서 펜던스 남작 저택의 부산스러움을 거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얼른 저택을 나서려 한 것뿐인데….

“제가 왜 마르셀 선생님과 마차를 타고 나가야 하죠?”

“그야, 펜던스 남작 부인께서 친히 챙겨 주셨으니까요?”

방을 준비하지 말라고 했다가 갑자기 말이 바뀐 탓에 펜던스 남작가가 여러모로 바쁘다는 건 이해했다. 그 과정에서 카밀이 돕게 되었다는 것도 물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카밀은 순례단에 지인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는 남작 부인의 부탁을 받고, 그녀에게 하인과 마차까지 받아 외출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목적지가 하필 리브가 사는 페몽 거리였다.

“페몽 거리 근처 가게에 로이데스 선생에게 줄 케이크를 주문해 두었는데, 잠깐 들러서 가져가는 게 어때요? 본래 오늘 저녁에 심부름꾼을 통해 전하려 했는데, 기왕이면 갓 만든 케이크를 바로 먹는 게 좋잖아요. 하인이 선생을 안내할 거예요.”

수업 일정을 멋대로 변경하게 되었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낀 듯했다. 그러지 않아도 저택이 바쁜데 괜히 자신에게 케이크를 전하느라 따로 심부름꾼을 보내려면 아무래도 번거로울 것이다. 리브는 그냥 자신이 케이크점에 들러서 주문한 케이크를 찾아가겠노라 말했다.

어차피 먼 길도 아니라서 천천히 걸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작 부인이 미리 준비해 두지 못해 미안하다며, 대뜸 그녀를 마차로 밀어 넣은 것이다.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인데.”

혼잣말 같은 리브의 중얼거림에 카밀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겸사겸사 저를 응원해 주고 싶으신 것 같기도 하고요.”

“응원… 아니, 설명하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카밀이 펜던스 남작에게 이상한 소리를 했다고 그랬지. 남작 부인도 남작만큼이나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따로 이런 자리가 불편하다는 걸 말해 두어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괜한 오지랖에 몇 번이고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성싶었다.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려서, 리브가 제 이마를 짚었다. 골치 아프다는 기색이 역력한 리브의 얼굴에 카밀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제 솔직한 고백으로도 신뢰를 얻지 못한 겁니까?”

신분과 목적을 솔직하게 밝히면 정말 모든 관계가 좋아질 거라고 믿은 건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혹은 카밀의 일생이 늘 그런 식으로 순탄했던 것인지도 모르고.

슬쩍 입술을 깨문 리브가 맞은편에 앉은 카밀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는 마르셀 선생님께 이성적인 관심이 전혀 없어요.”

“…오.”

“그래서 이런 식의 부자연스러운 만남이 거북하고요.”

여지없이 흘러나온 거절의 말에 카밀이 눈을 깜빡였다. 미간을 찡그린 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엘레오노르라고 밝히고 나니 더 매몰차지셨네요.”

“위압을 의도하셨나요?”

“그럴 리가요.”

카밀이 가당치 않은 소리를 들은 것처럼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리브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으니, 저도 솔직하게 답해 드리는 거예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 모른 척하실 것 같아서요.”

“일단은… 알겠습니다.”

알겠으면 안 거지, ‘일단’은 무엇인가.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그의 대답에 리브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카밀은 아래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 궁금해서 여쭙는 겁니다만.”

“네.”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그는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철옹성처럼 굳건한 그의 모습에 말문이 막힌 리브가 입술을 벌렸다.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가 가까스로 대꾸했다.

“…매력은 객관적인 수치로 평가할 수 없어요.”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제가 그래도 어디 가서 막 차이는 남자는 아니거든요.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어 본 적도 없고.”

“그렇다면 처음으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구신 게 문제인가 보죠.”

“아.”

카밀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대충 둘러댄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카밀은 리브의 말을 꽤 진지하게 귀담아들은 모양이었다.

사실 리브가 보기에도 카밀이 아무 여성에게나 막 차이고 다닐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리브도 상황이 특수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제법 혹했을 테고.

다만… 속 편하게 연애를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제외하고서라도, 리브는 카밀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이미 그녀는 후작과 진득하게 얽히고 있으니까.

“아, 저쪽에 야외극장을 짓고 있군요. 이번에 순례단을 환영하는 기념으로 야외연극을 진행한다더니….”

창밖에 시선을 둔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카밀이 문득 창가로 고개를 바짝 가져다 댔다. 조금 전에 차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회복이 무척 빨랐다.

“시간 되시면 꼭 한번 보세요. 올라가는 작품이 꽤 재미있는 작품이거든요.”

“야외연극 같은 걸 보세요?”

“물론이죠.”

그는 리브가 어떤 의미에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아들은 눈치였다. 어깨를 으쓱하며 내뱉는 설명은 이미 몇 번이나 해 본 것처럼 술술 흘러나왔다.

“엘레오노르라고 밝히지 않으면, 누구도 저를 그 집안과 연관 짓지 못할 겁니다. 제가 좀 거리 문화를 좋아해서요.”

하기야, 차림새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사람만 보아서는 유력한 세도가 출신이라는 게 선뜻 상상되지 않았다.

“저걸 보니 생각났는데, 미술관 근처에서는 야외 전시도 있을 예정이라더군요. 급하게 결정된 사안이라 작품을 몇 점 확보하지 못한 것 같지만… 추기경님이 가시기 전에는 전시할 수 있겠죠?”

카밀의 말에 리브도 새삼스러운 눈으로 거리를 둘러보았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평소와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곳곳에 못 보던 것들이 보이는 듯하기도 했다. 추기경의 방문이라고 해 봐야 저와 얼마나 연관이 있을까 싶었는데 말이다.

“거리 곳곳이 북적거릴 것 같아요. 로이데스 선생님도 하루쯤은 놀러 다니시는 게 좋….”

신난 목소리로 말을 잇던 카밀은 리브와 눈이 마주치자 곧장 두 손을 들어 항복했다.

“알겠습니다. 수작은 그만 부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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