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64)화 (64/138)

후작을 멍하게 보던 리브가 책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뗐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후작의 곁에 나란히 앉은 그녀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본인이 낸 기부금이 아니었으면 제가 입학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던 선배가 있었어요.”

‘고액의 기숙 학교’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리브에게나 해당하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나마 입학할 수 있었던 건, 학교의 주 수입원이 소수의 거액 기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클레망스는 기숙 학교였고, 그 선배를 아예 마주치지 않을 수는 없었죠. 덕분에 조금 부딪히긴 했지만 제 주변에는 좋은 귀족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들의 선의로 큰 말썽은 일어나지 않았고요. 구설수가 조금 있었지만 졸업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어요.”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 없는 학창 시절의 이야기였다. 졸업 후에는 전부 의미 없는 촌극으로 끝났다고 생각해서 곱씹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설픈 선의는 받지 않느니만 못한데.”

“그래도 선의니까요.”

학교 내에서 그 선의는 얼마나 큰 힘을 가졌던가.

또한 학교 바깥에서 그 선의는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력했던가.

“하지만 후작님 말씀이 맞네요. 네, 어설픈 선의는 잠깐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을 뿐, 뒤를 책임지진 않았죠. 저의 졸업 시기쯤 그 선배의 부모가 저희 부모님의 수공예품을 고의로 트집 잡았어요. 그 일로 주문량에 타격을 크게 입었고요.”

그 사실을 리브는 졸업 후,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단지 세월이 흘러서 시장의 분위기가 달라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겨우 학창 시절에 잠깐 스쳤던 악연이 그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그래도… 부모님의 죽음은 불운한 사고일 뿐이에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직후, 그녀는 자신이 사귄 ‘괜찮은 가문의 친구들’이나, 저를 마음에 들어 하던 ‘상류층 사내애들’의 도움을 기대했다. 그러나 학교 바깥에서 그들과 그녀의 세상은 달랐다.

귀족들의 의뢰서를 산처럼 쌓아 놓고 일을 해 봤자, 결국 일감을 빌어먹고 사는 기술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제 부모님처럼.

“입주 가정 교사 일을 하던 때에도, 그냥 흔히 있을 수 있는 실랑이였어요.”

첫 번째 입주 가정 교사 일을 하러 들어갔던 카린 자작가에서의 소란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저 그 집 큰아들이 리브에게 자꾸 치근거렸을 뿐이다. 자작 부부는 모든 잘못을 젊은 가정 교사에게 뒤집어씌웠고 말이다.

그리고 루세트 백작가의 경우… 제 자식의 부진한 학업 성적이 전부 리브의 미숙한 실력 때문이라고 뒤집어씌웠고.

그런 것들은 의외로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세상의 부모들이 모두 같지는 않으니까. 리브는 제 경험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리브가 덤덤하게 말을 맺자, 후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선생이 생각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는 건 알겠군.”

“다른 사람도 아닌 후작님이 그런 소리를 하시니까 정말 빈말처럼 들리네요.”

인기라니. 대단하신 디무스 디트리언 후작에게 그런 걸 인정받을 줄은 몰랐다. 저 얼굴로 인기가 많다고 추켜세워 주니 도리어 놀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강렬할 정도로 화려하면 감히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법이네.”

김빠진 웃음을 흘리던 리브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벤치 등받이에 걸쳐 있던 후작의 긴 팔이 너무도 쉽게 리브에게 닿았다.

“하지만 선생은… 딱 손대기 좋을 정도로만 매력적이거든.”

흰 장갑을 낀 손가락이 리브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보통 그런 경우는 꽤 고달픈 상황에 처하는 법이지.”

적당히 귀여워하는 짐승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그렇게 장난스러우면서도 간지러운 접촉이었다.

그 손길에 가만히 뺨을 내주고 있던 리브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사람을 이미 아시나 봐요? 손대기 좋을 정도로만 매력적인 사람.”

“응.”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후작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죽었지. 불운한 사고로.”

유난히 나지막한 음성이라서일까? 혹은 조용한 사위 때문일까? 후작은 마치 고해 성사를 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감히 손대지 못할 정도로 화려해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그가 말하는 사람은 누굴까?

궁금함이 치솟았으나 리브는 감히 묻지 못했다. 물어봐야 대답을 들을 수 없으리라는 걸 예감하기도 했다.

침묵하는 리브를 향해 후작이 옅은 냉소를 머금었다. 오만한 그의 얼굴에는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 확신을 본 리브가 불쑥 말문을 열었다.

“감히 손대지 못할 분이신지는 잘 모르겠어요.”

리브가 고개를 옆으로 조금 움직였다. 장난치듯 볼을 툭툭 건드리던 손가락 끝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리브의 시선이 그 손으로 향했다.

잠자리에서는 장갑을 벗어 던지는 후작 덕분에, 이제 리브는 그의 손 생김새가 어떤지 알았다. 장갑을 꼈을 때 알 수 없는 진짜 모습을 말이다.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지만, 가시에 찔리는 걸 감수하고도 장미를 향해 손을 뻗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죠.”

리브의 대답에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면 용기가 가상해서라도 칭찬해 줄 텐데.”

느른하게 풀어진 음성이 리브를 부추겼다.

“선생이 해 보겠나?”

“괜찮으시겠어요?”

“안 괜찮을 까닭은 무엇인가? 어차피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는 건 내가 아니라 선생일 텐데.”

거만하기 짝이 없는 그의 장담에 리브가 무심코 웃었다.

“가지가 꺾여서 아픈 건 장미도 마찬가지인걸요.”

가시로 온몸을 무장한다는 건 결국, 남들보다 훨씬 더 겁이 많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렇다면 후작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부러진 장미 가지는 결국 시들어요, 후작님.”

한가로운 뱃놀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롭던 후작의 얼굴에서 차츰차츰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와 가장 잘 어울리는 서늘한 무표정이 드러났다.

“그래서 눈으로 구경만 할 텐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몸을 들썩였다. 그 순간, 리브가 손을 뻗어 멀어지려는 후작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뺨을 아무렇지 않게 건드리던 후작의 무신경한 행동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소심한 접촉이었다. 후작이 리브를 비웃으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찰나, 리브가 후작의 흰 장갑 끝을 잡고 당겼다.

스르륵.

장갑이 매끄럽게 벗겨졌다.

쾌락에 젖은 눈으로 담았던 맨손을 멀쩡한 정신으로 보니 또 새로운 기분이었다. 후작이 리브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아주 가까이에서 사내의 손을 내려다보고 어루만질 기회를 얻게 되었다.

손가락마다 굵은 마디가 두드러지고, 손등에는 팔뚝으로 이어지는 새파란 핏줄이 돋아 있었다. 손바닥은 거칠고 굳은살이 박인 모양새가 결코 곱지 않았다.

리브의 사타구니를 문지르고, 더 깊은 내벽을 헤집어 이성을 마비시키는 손이었다. 그녀는 이 손이 얼마나 강하게 제 살집을 움켜쥐는지 알았다.

볼록한 손등의 핏줄을 신기하다는 듯 건드리던 리브가 그의 손가락 사이를 엄지로 꾹 눌렀다. 가까이 보지 않으면 모를 흉터가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게 궁금했나 보지?”

리브에게 조용히 손을 맡기고 있던 후작이 미묘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맨손으로 칼날을 잡았다가 손가락이 잘릴 뻔했던 기억이 나는군.”

손가락 사이의 흉터를 건드리던 리브가 고개를 들어 후작과 눈을 마주쳤다.

“이기셨나요?”

후작은 마치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대답을 들은 리브가 티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 흉터는 승리의 훈장이네요.”

절대 지워지지 않는 승리의 훈장을 달고 있는 사내의 손이, 단숨에 리브의 목덜미를 잡아채 품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무게 중심을 잃어버린 리브가 앞으로 넘어지듯 후작의 품에 안겼다.

조금 전의 여유는 찾아볼 수 없는 다급한 숨결이 여린 리브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여느 때보다 더 강압적이고 난폭한 키스가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적막하던 유리 온실에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

디무스의 몸에 처음 남은 흉터는 사관 학교에서 얻은 것이었다.

아카데미들은 대체로 폐쇄적이지만 특히 사관 학교는 그 나름의 법칙 속에서 운영되는 공간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그냥 넘어갈 법한 일에도 일절 융통성이 통하지 않는, 그들만의 세계.

사내애들이 모여 있는 집단에서는 보통 힘의 논리가 빠지지 않으나, 사관 학교에서는 힘에 더해 지위가 공존했다.

두 가지를 모두 가진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포식자로 자리 잡았고, 둘 중 하나만 가진 이가 그들의 후광을 업었으며, 둘 다 없는 이가 피식자로서 가장 낮은 곳을 지탱했다.

디무스가 처음 입학했을 때, 그는 피식자였다.

재능이 있기야 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관리를 받다가 입학한 귀족 가문의 자제들과 비교하자면 진흙 속에 처박혀 있는 원석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덕지덕지 묻은 진흙을 씻어 내고 제대로 된 빛을 발할 수 있는 보석이 되기까지, 그는 제법 고초를 겪었다.

교칙을 따지자면 사관 학교에서는 진검으로 대련하는 게 금지되어 있는데, 당연하게도 포식자들은 그런 사소한 것에 얽매이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혈기 왕성한 사내애들은 자극적인 이벤트를 원했고, 그것을 위해 종종 진검을 꺼내 들었다. 그 검 끝에는 피식자가 섰다. 디무스 같은.

진검을 쥔 상대 앞에서 디무스는 맨몸이었다.

그날 그는 검날을 움켜쥔 까닭에 하마터면 손가락이 잘릴 뻔했다. 양호 선생은 디무스의 손에 난 검상을 알아보고선 그를 선도 위원회에 넘겼다. 교칙을 위반한 정황이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연하게도 그에게 검을 휘두른 상대는 유유히 상황을 빠져나갔고 말이다.

다행히도 퇴학은 면했다. 교칙 위반으로 징계를 받기는 했지만.

‘그랬던 적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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