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63)화 (63/138)

리브는 후작을 따라 처음 가 본 사냥터를 떠올렸다.

그전에 귀족의 사냥을 따라가 본 적은 없지만, 관련된 내용을 들어 본 적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사냥터에서 말을 타고 뛰어다니는 게 일상이었을, 클레망스의 귀족 동급생들 덕분이었다.

그중엔 개인 사냥터를 소유했을 뿐 아니라 주기적으로 사냥 대회를 여는 가문 출신들도 있었다. 리브가 알기로 사냥 대회는 귀족들의 주된 사교장 중 하나였다.

“사냥당한 동물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도축하기도 하고, 박제를 만들기도 하고, 무의미한 살생으로 끝나기도 해.”

두 사람은 금방 유리 온실에 도착했다. 그새 재정비를 한 것인지, 내부를 꾸미는 꽃의 종류가 살짝 달라진 게 보였다.

꽃보다는 녹색의 풀잎이 훨씬 많이 보였다. 사이사이로는 잎사귀 큰 나무가 새롭게 심어져서, 안쪽에 누가 있든 입구에선 전혀 보이지 않을 성싶었다.

두리번거리는 리브의 시야에 황금 물총새가 들어왔다. 박제품은 예전에 보았던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역시 다시 보아도 그리 취급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사냥한 동물을 전부 박제로 만들진 않을 것이다. 후작은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남자이니까.

그렇다고 희귀한 동물을 사냥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카밀의 말에 의하면, 후작은 누드 작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고 했다.

“특별하게 수집하는 건 예술품뿐이신가 봐요. …조각상이나 그림 같은.”

리브의 시선이 닿은 곳을 확인한 후작이 냉담한 미소를 흘렸다.

“인간을 박제할 수는 없잖나.”

다소 섬뜩한 대답이었다. 인간을 박제품으로 만들 수 없어서 조각상이나 그림을 모은다니.

까닭을 알 수는 없으나 후작이 생명력 넘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리브는 그가 수집했을 고가의 조각상과 그림들이 가득 쌓여 있는 전시관을 상상해 보았다.

한두 개면 몰라도, 그런 것들을 잔뜩 모아 둔 광경이 멋있어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다만 후작에게는….

“죽음이 익숙하신 것 같습니다.”

무심하게 물총새를 지나치던 후작이 멈칫했다. 그는 의외의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리브를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대답을 회피하지 않는 후작의 태도에서 용기를 얻은 리브가 슬그머니 질문을 이어 갔다.

“전쟁터를 다니셨나요?”

“그렇게 보이나?”

“무기와 살생에 익숙하신 것 같아서요.”

유리 온실의 가장 안쪽에는 푹신한 방석이 깔린 야외 벤치와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읽다 만 것처럼 흐트러진 몇 권의 책도 있는 게, 평소 후작이 종종 찾는 장소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야외 벤치에 걸터앉은 그가 익숙하게 몸을 기대며 리브를 응시했다.

“그게 무섭지 않은 모양이지?”

“그것들을 저에게 휘두르시지 않는 이상, 제가 무서워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긴 야외 벤치 말고는 마땅히 앉을 의자가 보이지 않았다. 후작의 옆에 나란히 앉는 대신, 리브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책 윗면에 책갈피가 삐죽 튀어나온 게 보였다. 겉표지에 적힌 제목을 보니 인문 서적인 듯했다.

제목은 섬세한 필기체로 쓰여 있었다. 이 책을 들고 있는 후작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사소한 책 한 권마저 후작을 돋보이게 해 준다는 감상이 들었다.

리브가 저도 모르게 제목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올록볼록하게 튀어나온 질감이 손끝을 간지럽혔다.

“그럼 선생은 무엇이 무섭나?”

필기체를 손끝으로 따라가던 리브가 멈칫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리브가 시선을 들었다.

무서운 것이라, 그런 건 너무도 많았다. 심지어 눈앞의 저 아름다운 남자마저도 리브에겐 일종의 두려움이었다.

코리다의 건강, 시시때때로 목을 졸라 오던 몇 푼의 돈, 이따금 처했던 난처한 상황….

이 모든 걸 하나로 뭉뚱그린 대답이 리브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살아남는 것이요.”

“선생이야말로 전쟁터를 구른 병사처럼 말하는군.”

“꼭 화약과 총탄으로 뒤덮여야만 전쟁터인 건 아닙니다.”

리브가 쓰게 웃었다. 후작은 벤치의 등받이에 한쪽 팔을 길게 걸치고, 다리를 꼬고 앉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클레망스를 졸업했다면 우는 소리를 할 정도로 사정이 어렵진 않았을 텐데.”

“클레망스는… 좋은 학교죠. 입학금이 많이 드는 만큼 장학금 제도가 다양해서 평민들도 한 번쯤 꿈꿔 볼 수 있고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긴 하지만 다행히도 제가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있었어요.”

클레망스 기숙 학교는 리브의 인생 중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성과였다. 입학할 때 리브는 클레망스만 졸업하면 제 인생이 한층 더 좋아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도 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버텼다. 기숙 생활을 지원해 주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학교에서 만난 다양하고 화려한 동급생들의 수준과 조금이라도 비슷해지고자.

“조건?”

“귀족이 아니고, 자존심이 없고, 적당히 외모가 반반하면서 성적도 잘 나오는 학생이요.”

덤덤하게 조건을 나열한 리브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학교 측에는 매년 대외적으로 선보일, 불쌍하지만 성실한 평민 학생이 필요하거든요.”

“그 조건에 외모나 자존심이 들어가는 줄은 몰랐군.”

“학교 행사 자리에서 불쌍히 여겨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다녀야 하니 외모가 반반해야 하고, 암암리에 있을지 모르는 학우들의 무시를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자존심이 없어야 하죠.”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입학 직후였다. 어린아이들의 악의는 순수하면서도 정제되지 않는 법이니까.

학교라는 좁은 사회 내에서 신분과 집안이 알려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건 입학생들의 출발선을 결정짓는 첫 번째 요인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출발선 앞에서 평민 입학생들은 다시 한번 걸러진다. 영광스러운 장학금 수혜자가 되어 크고 작은 행사에서 학교의 이름을 칭송할 목소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틀에 박힌 감사 인사 몇 년이면 고액의 학비가 상당량 감면된다니, 리브는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덕분에 입학하자마자 평민인 동급생들과 귀족인 동급생들 모두에게 시샘과 비웃음을 받긴 했지만…. 몇 년 견디고 나니 학교생활도 익숙해졌고, 신분을 떠나 좋은 친구들도 생겼다.

“평민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장학금은, 귀족 학생들이 입학할 때 내는 기부금 일부니까요. 기부자들은 자신의 자비를 눈으로 확인받고 싶어 하는 법이죠.”

“기부금을 내지 못해서 차별을 받은 건가.”

“차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당시 저는 동네의 다른 또래들보다 월등히 좋은 학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건 전부 클레망스의 장학 제도 덕분이에요. 그 덕에 지금 돈도 벌 수 있고요. 제가 어떻게 차별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저 제 위치에서 해야 할 역할을 했을 뿐인걸요.”

기숙 생활은 길었고, 리브는 그 속에서 작은 신분 사회를 보았다. 권력을 가진 자와 그러지 못한 자가 어디에 서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배웠다.

주제 파악은 약자가 가장 먼저 익혀야 할 생존 법칙이었다.

“선생은 신기할 정도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군.”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해서 살아남지 못한 이를 아나?”

내내 가볍던 리브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뻔히 그 변화를 보았을 텐데도, 후작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선생의 부모?”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그가 제 뒷조사를 했을 거라고 이미 진즉 짐작했다. 어쩌면 제 생각보다 더 상세하게 조사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결과지 속에 ‘신분 상승을 꿈꾸던 부모님’의 정보 같은 건 들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힌 리브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조사해 보셔서 아실 것 같지만, 제 부모님은 불행한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유명한 수공예 장인이었다던데. 아무리 갑자기 사고사했다고 한들, 남겨진 자매가 이렇게 생활고에 시달릴 수 있는 건가 의아할 정도로.”

“생활고는… 여러 가지 상황이 겹쳤을 뿐이에요.”

기어이 클레망스를 졸업한 리브의 뒷바라지와, 아픈 코리다의 약값을 감당하는 동안 집안의 사정이 조금 어려웠을 뿐이다. 그리고… 그즈음에 줄어든 공예품 주문량 정도가, 여윳돈을 까먹게 된 요인일 테지. 미처 가세를 회복하기 전에 닥친 부모님의 죽음이 그 방점을 찍었고.

아무튼 전부 과거의 일이고, 지금 되짚어 봐야 의미가 없는 사연일 뿐이다. 리브는 이 불편한 화제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후작은 그녀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학창 시절 구설수가 많았다던데. 입주 가정 교사를 할 당시에도 평판이 좋지 않고.”

리브가 뜨끔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후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 보좌관은, 선생이 귀족의 정부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더군.”

“그런 자리를 노렸다면…!”

“진즉 들어앉았을 거라고, 그렇게 대답해 주었지.”

리브가 하려던 말이 후작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여전히 방만하게 앉아 리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술을 다물자 유리 온실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그 흔한 벌레 소리도 지금은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게 사라지고 오직 후작과 저만 남은 것 같다.

아름답고 거대한 유리 온실이, 오직 두 사람만의 비현실적인 공간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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