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적나라하게 튀어나온 ‘우리의 만남’이라는 표현이 어쩐지 귓구멍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혀로 입술을 축인 리브가 괜히 헛기침하며 말을 덧붙였다.
“곧 칼리오페 추기경님과 그분의 순례단이 방문하는데, 괜히 이상한 소문이 불거지면 곤란하실 거예요.”
묘하게 핵심을 비껴가는 듯한 리브의 말이 불쾌했던 걸까? 후작이 눈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쉽게 말하게.”
“후작님께서 곧 부에르노에 방문할 손님들을 맞이하실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리브의 말에 후작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변했다. 그는 이제 완벽하게 심사가 뒤틀린 모양새였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 내 뒷조사를 한다는 자가?”
“그게 아니라, 펜던스 남작가에서 수업을 하다가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 펜던스.”
신경질적인 어조로 ‘펜던스’의 이름을 뱉은 후작이 짧게 혀를 찼다. 그의 찡그린 미간에 짜증이 가득했다. 순식간에 냉각된 분위기에 리브는 그저 시선을 내리깔고 후작의 눈치만 보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후작이 추기경이나 순례단을 접대할 일은 없을 성싶었다.
하지만 밀리언의 말에 의하면 아는 사이라고 했다는데. 후작의 다른 과장된 소문들처럼 이 또한 잘못 전해진 말이었을까? 하지만 거짓이라면 펜던스 남작가에 숙소를 준비하지 말라는 말까지 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애써 흘려들으려고 노력했던 밀리언의 말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세기의 파혼을 한 말테 공작 영애와 출중한 외모의 미혼 후작.
궁금증은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렸다.
“순례단에 후작님과 알고 지내는 분이 계신다고 하던데요.”
리브가 툭 던진 말에 후작이 곧장 반응을 보였다.
“그게 누구라던가?”
그의 대답을 들은 리브는 본능적으로, 밀리언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사실이 아니었다면 후작은 누구냐고 묻는 대신, 알고 지내는 사람이 없다고 단숨에 말을 잘랐을 사람이니까.
아, 정말로 아는 사람이 있구나.
“정확히 누구라고는….”
순례단에 소속된 귀족이 한두 명도 아니고, 밀리언의 상상은 여전히 억측에 가까웠다. 그러나 리브는 티끌만 한 가능성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런 제 반응이 영 이상하게만 느껴져서, 리브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태연한 척하고 싶은데 자꾸 안면 근육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후작이 정말 말테 공작 영애와 아는 사이라면, 도대체 어떤 사이인지 궁금한 게 사실이니까.
먹지도 않은 음식이 얹힌 것처럼 속이 더부룩해서 와인이라도 마시려는 찰나, 후작이 냉담한 음성으로 질문했다.
“선생은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말테 공작 영애나….”
반쯤 딴생각에 빠져 아무렇게나 대답하는데,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눈을 든 리브의 눈에 식기를 내려놓은 후작이 보였다.
“체력이 영 안 좋아서 먹이고 하려 했더니.”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입가를 닦아 낸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냅킨을 식탁 옆에 툭, 던져둔 후작이 우아하게 몸을 일으켜 리브에게 다가왔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리브가 무어라 말하고자 입술을 벌렸다. 그러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흡…!”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파고들었다. 진한 와인 향기가 타액에 뒤섞였다. 처음부터 깊숙하게 찔러 들어오는 혀가 다소 거칠게 입 안을 휘저었다.
뒤로 물러나는 건 불가능했다. 일단 등받이에 가로막혀 몸을 물릴 수 없었고, 뒷덜미를 단단하게 잡혀서 고개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으니까.
질척이는 키스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기어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즈음에서야 후작은 리브를 놓아주었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다급하게 숨을 몰아쉰 리브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밀어 올렸다. 지척에 있는 사내의 벽안이 은은한 흥분으로 휘감겨 있는 게 보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대화를 하다 말고 느닷없이 식탁 앞에서 키스라니. 그야말로 맥락 없는 수순이었다.
리브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후작을 보자, 그가 엄지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꾹 내리누르며 말했다.
“선생이 먼저 귀여운 소리를 했으니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대답을 들어도 도통 이해가 안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멍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리브가 우스웠던지, 후작이 눈매를 접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말게. 선생과 뒹구는 곳에 다른 손님을 들일 생각은 없으니.”
그 말에 리브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가, 이내 새빨갛게 물들었다.
“저, 저는 그런 의미로 여쭤본 게 아니라…!”
“어쩌다 그런 소문이 났는지는 알겠는데, 그들이 내 저택에 머무를 일은 없어.”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브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돌렸다. 아예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후작이 목덜미를 단단하게 고정하고 있어서, 기껏해야 시선만 겨우 피할 수 있었다.
“대답이 만족스럽나?”
“…저택에 손님을 받고 말고는 제가 상관할 문제가 아닙니다. 후작님께서 뜻대로 하실 일이죠.”
“나는 그저 내 대답이 선생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만족감을 충족했는지 묻는 것인데.”
나긋나긋하지만 집요한 물음이었다.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문지르던 엄지가 점차 자리를 옮겨 턱 밑과 목 부근을 쓸어내렸다.
“응?”
리브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가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을 몰아쉴 때마다, 후작의 엄지가 식도를 꾹 눌렀다. 성공적인 사냥을 마친 뒤, 가장 아름다운 전리품을 움켜쥔 승자의 모습이 이러할까?
파르르 떨던 리브가 결국 솔직하게 고백했다.
“만족합니다.”
열 오른 뺨을 한 채 숨을 몰아쉬는 리브의 모습은 사냥꾼에게 갓 잡힌 사슴과도 같았다. 아마도 퍽 우스워 보이리라. 뻔히 알면서도 리브는 순식간에 흐트러진 호흡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후작은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나도 만족감을 얻을 차례군.”
후작이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과격하게 밀어붙이던 첫 번째와 달리, 이번에는 여유롭고 감미로운 움직임이었다.
“지난 시간에 잘 배웠나 확인해 볼까?”
부드러운 식탁보가 등 아래로 아무렇게나 구겨져 이리저리 밀려났다.
단단한 식탁은 격렬한 움직임에도 전혀 삐걱거리지 않았다. 다만 식탁보가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그 위에 있는 식기들이 본래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툭툭 밀려났다. 그러다가 끝내 몇 개의 식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에도 누구 하나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정확히 하자면 후작은 관심이 없었고, 리브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하악!”
이미 한번 경험해 봤음에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깊숙하게 찔러 들어오는 부피감은 난생처음 겪는 고난처럼 힘겨웠고, 치받을 때마다 감전이라도 된 양 등줄기에 찌릿찌릿한 감각이 흘렀다.
첫 섹스도 이랬던가?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장소가 달라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때는 멀쩡한 침대에서 일을 치렀으니까.
“흣, 흣!”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군.”
찌걱거리는 마찰음 사이로 사내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는 오늘도 겨우 장갑만 벗은 상태였다. 그에 비하면 리브는 어떠한가.
아무리 두 사람뿐이라고는 해도 이곳은 넓은 식당이었고, 그녀가 누운 이 자리는 식탁 위였다. 리브는 자신이 이렇게 헐벗은 꼴로 식탁에 드러누워 식당이 울리도록 교성을 내지르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해 봤다.
그러나 수치심을 느끼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자극에 머릿속은 몽롱했고, 아픔과 함께 오는 묘한 쾌감에 울기만도 바빴다.
“후우.”
“아아….”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한 사내가 허리를 힘껏 쳐 올렸다. 그 힘에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려다, 도드라진 등뼈가 딱딱한 식탁에 짓눌려 얼얼해졌다.
식사 장소에서 음란한 짓을 한다는 데에서 오는 민망함은 둘째 치고, 일단 편히 눕기가 힘들었다. 아래를 짓치는 후작의 성기에 자비라고는 티끌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화끈거리는 열감에 하반신의 감각이 점점 더 무뎌지고, 허공에 뜬 두 다리는 종잇장처럼 팔랑거렸다. 종아리쯤에 걸쳐진 속옷이 그 움직임을 따라 팔랑거리는 게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서 그녀의 수치심과 배덕감을 부추겼다.
“아!”
내벽 깊숙한 안쪽을 콱 짓누르는 단단한 감각에 리브가 허리를 휘었다. 후작이 한 번도 사정하지 않은 데 반해, 리브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쾌감에 절어 몸을 떨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쾌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그녀가 손을 더듬어 후작의 옷자락을 애처롭게 움켜쥐었다.
발버둥은 부질없었다.
“부지런히 복습해야겠어.”
마치 그녀를 놀리듯 속삭이는 후작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으나, 뱉을 수 있는 건 가쁜 숨뿐이었다.
찔꺽거리는 마찰음이 점점 더 빠른 간격으로 이어졌다. 빨라지는 허리 짓을 따라 질척하게 젖은 살결 위로 벗지 않은 하의의 천이 거칠게 문질러졌다. 흉흉하게 선 기둥이 꾸역꾸역 내부를 파고들다가, 기어이 가장 깊은 안쪽 내벽을 짓누르며 멈추었다.
“큭.”
아랫배에서 무언가 확 퍼지는 느낌이 났다. 땀으로 반질반질한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사내의 성기가 내벽에 휘감겨 몇 번이나 거듭 꿈틀거리며 정액을 토해 내는 동안, 후작은 팔로 상체를 지탱한 채 숨을 골랐다. 흐트러진 백금발로 덮인 이마에 반짝이는 땀이 설핏 보였다.
미간을 찡그린 후작의 눈가가 은은하게 붉었다. 아래에 깔린 리브가 그 얼굴을 홀린 듯 응시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후작은 섹스하는 내내 흐트러짐이 없다가도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에는 정제되지 않은 흥분감을 내비쳤다.
리브가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에 힘을 주었다. 움찔거리는 질구가 빠져나가지 않은 성기의 뿌리를 조이는 순간, 쾌감에 흐려졌던 후작의 시선이 명료하게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