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멜과의 계약은 아돌프의 도움 덕분에 서면으로 완료했다. 그러니 그 동네를 굳이 다시 찾아갈 필요는 없었으나,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뚝 끊어 버리기에는 리타가 마음에 걸렸다.
“오, 저런. 그렇군요. 성실한 신도분을 잃게 되어서 너무 아쉽네요. 코리다는 괜찮죠?”
“네. 많이 좋아지고 있어요.”
“지금은 아마 다른 예배당에 다니시겠지만, 멀어도 가끔은 우리 예배당에 들러 주세요. 리브 양이 오지 않으니 예배당이 휑하다고요.”
차마 요즘 예배당에 발길을 끊었다고 할 수 없어서, 리브는 그저 모호한 미소만 지었다.
예배당은커녕, 요즘은 기도도 제대로 안 했다. 우스운 건 열심히 기도할 때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좋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직도 예배당에서 신을 찾나?”
무언가를 이룰 힘을 가진 건 인간이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무엇이든 이루어 준 건 후작이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는 신도가 아주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리브는 차분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녀의 말에 베트릴이 허허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잠깐 그런 시기가 있기는 했죠. 하지만 금방 다시 뜸해졌어요. 알고 보니, 우리 예배당에 디트리언 후작님이 다닌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더라고요! 놀랍지 않나요?”
“…놀랍네요.”
어쩜 이렇게 모든 일상에서 그의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리브는 새삼 그가 자신의 생활 전반에 깊숙하게 자리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와 이야기하든 결국 마지막에는 후작이 등장하거나, 후작을 떠올리게 되는 이 순간들이 놀라웠다.
“디트리언 후작님이라니! 그런 분이 왜 우리 예배당에 오시겠어요. 그분은 부에르노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담당하신 사제님과 독대할 능력이 있으신 분인데.”
베트릴은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양 고개를 내저었다. 베트릴이 홀로 신의 축복을 독차지했다고 칭해지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한번 구경해 봤으면 좋겠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던 리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트릴은 그분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요?”
“네. 뵈었다면 제가 잊었을 리 없죠!”
하지만 리브는 예배당에서 후작을 몇 번이나 마주쳤었다. 후작처럼 눈에 띄는 남자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몰래 예배당을 방문했다는 건가?
그가 예배당에 온 목적을 짐작하기는 했으나, 예배당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베트릴이 아예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오갔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베트릴에게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던 리브가 문득 베트릴의 뒤쪽으로 보이는 마차를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까만 마차. 흔한 마차임에도 이제는 유독 다르게 보이는 것. 그녀는 한눈에 마차를 알아보았다.
“저는 일정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리브가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베트릴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네. 예배당에도 한번 오세요!”
빙긋 웃은 리브가 종종걸음으로 마차에 다가갔다. 마부에게 눈인사를 건넨 그녀는 놀라지도 않고 마차에 올랐다.
펜던스 남작가의 수업이 있는 날에 불려 가는 건 처음이지만, 딱히 난처하진 않았다. 오히려 모처럼의 부름에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다.
유리온실에서 후작을 만난 뒤로 처음 가지는 추가 근무였다. 그날의 후작은 함께 온 코리다를 생각해 달라는 리브의 요청에 따라, 키스 이상의 것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겠지.
마차의 푹신한 의자에 기대앉은 리브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 추가 근무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
이제는 이 저택이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자리에 앉은 리브가 슬그머니 눈을 굴렸다. 당연히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을 각오부터 하고 있던 리브는 식당으로 안내받은 참이었다.
“식사 전이지?”
상석에 앉은 후작은 마치 사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맞이했다. 아마도 리브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요리를 준비해 놓았던 것인지, 자리에 앉자마자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줄줄이 식탁 위를 채웠다.
“질 좋은 송아지 고기가 들어왔습니다.”
필립이 넌지시 설명하며 손수 그릇을 옮겼다. 커다란 식탁 가운데에 노릇노릇하게 익은 송아지 고기가 큼지막한 모양으로 놓였다. 살을 발라 후작과 리브의 접시에 놓아 준 하인이 조용히 물러나자, 필립도 다른 사용인들과 함께 자리를 비켰다.
“들게.”
리브가 후작을 따라 얼떨결에 식기를 들었다. 그러나 제 앞의 고기를 썰면서도 얼떨떨한 마음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그녀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후작이 태연한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식사할 여유도 없나?”
“그렇다기보다는….”
“오늘 수업은 끝난 것 같은데, 혹시 다른 약속이 있었다던가?”
우아한 자세로 고기를 썬 후작이 힐끗 눈을 들어 리브를 보았다.
“길에서 친밀하게 대화를 나눴다던 그 남자와?”
베트릴과 대화하던 모습을 본 마부가 말이라도 전한 걸까? 그렇다면 정말이지 신속한 보고였다.
생각지도 못한 후작의 물음에 리브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베트릴은 전에 다녔던 예배당에서 수련 중인 예비 성직자입니다. 사적으로 신도와 시간을 보내지 않아요.”
그리고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은 오직 신만 섬기는 순결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리브의 단호한 말에도 후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웃음 쳤다.
“유흥과 성직 생활은 별개라네.”
성직자나, 하다못해 신심 높은 신자가 들었다면 당장 교단 본부에 고발하겠다며 노발대발했을 발언이었다. 그만한 신심이 없는 리브가 듣기에도 불경스럽기 짝이 없었고 말이다. 황당하다는 눈으로 후작을 보던 리브가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후작님의 신심은 잘 알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알려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꿎은 송아지 고기만 잘게 조각내면서, 리브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이사 후에는 예배당에 나가지 않고 있어서요. 그와는 우연히 만나게 되어서 안부를 물은 것뿐입니다. 약속은 없고, 지금은 단지 오늘 부르실 줄 몰랐어서 조금 놀란 것뿐이에요.”
사실 베트릴과 잠깐 대화를 나눈 걸 이렇게까지 애써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후작이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괜히 아무 사내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여자처럼 내비친 것 같아서 껄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단지 그뿐이다. 억울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합리화한 리브가 슬그머니 눈을 들어 후작을 보았다. 그는 리브의 말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와인을 음미하고 있었다.
베트릴은 후작을 두고, 원한다면 언제든 높은 직위에 앉은 사제와 독대할 능력이 있는 남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사제와 독대할 정도로 신앙심이 넘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리브와 예배당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었다.
“후작님께서도 그 예배당에 방문하셨었는데, 기억하시나요?”
“그랬지.”
후작은 선뜻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가만히 후작을 보던 리브가 포크 끝으로 괜스레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다.
“베트릴은 예배당에서 후작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조용히 서 있기만 해도 모두의 눈에 띄는 남자인데. 저런 남자가 굳이 제 정체를 숨기고 예배당을 몇 번이나 찾아왔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못 할 건 뭐지?”
도리어 후작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인간의 눈을 속이는 건 어렵지 않네. 나는 내 흔적을 남기는 걸 좋아하지 않아. 작은 부스러기를 두고도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사람이 천지에 널렸거든.”
그래, 굳이 듣지 않아도 그럴 것 같았다. 곁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싫어하고, 누군가 친한 척 접근하는 것도 싫어할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정체를 숨기고 예배당을 행차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도 후작에게는 성가신 일이었으리라.
그 말인즉, 성가심을 감수할 정도로 그녀가 특별하다는 의미일까.
리브가 저도 모르게 포크와 나이프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제 안색이 태연하기를 기도하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후작님의 뒷조사를 하는 사람이 많나요?”
“흥미로운 화젯거리니까.”
그는 순순히 긍정했다.
“먹음직스러워 보이겠지.”
리브는 카밀을 떠올렸다. 카밀은 후작이 여성을 결벽적으로 멀리한다고 했으나, 후작의 곁에는 리브가 있었다. 카밀이 앞으로도 계속 후작을 주시한다면 결국 리브와의 연관성을 찾아낼지도 몰랐다. 게다가 카밀은 리브에게도 관심이 있지 않나.
만약 리브로 인해서 귀찮은 꼬리표가 따라붙는다면, 후작은 그래도 그녀를 특별하게 여길까? 그가 리브를 남다르게 대하는 건 맞지만, 예배당을 은밀하게 방문했다는 건 그녀와의 만남을 누군가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의미일 텐데.
사실 리브는 후작이 카밀의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꽁무니에 사람이 따라붙는 걸 싫어한다는 건, 사전에 그런 귀찮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할 정도로 경계심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리브는 다소 부주의하게 이어지는 이 관계가 걱정되었다.
정확히는… 저 자신이 후작에게 성가신 존재로 전락할까 봐.
“부에르노에 후작님의 뒷조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매끄럽게 움직이던 식기가 멈췄다. 소리 없이 식기를 내려놓은 후작이 몸을 조금 뒤로 물리며 와인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여상한 음성으로 물었다.
“누군데?”
간결한 그 물음이 너무도 부드러워서, 리브는 하마터면 저항 없이 카밀의 이름을 뱉을 뻔했다. 다행스럽게도 리브에게는 아직 이성이 남아 있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리브는 카밀의 이름을 되삼키고, 대신 우회적으로 후작에게 경고했다.
“우연히, 저와 후작님의 동선이 겹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좀 더 조심하는 게 좋지는 않을지….”
“무엇을?”
비웃음 섞인 후작의 목소리가 리브의 조심스러운 말을 가로막았다.
“우리의 만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