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59)화 (59/138)

맹세코 리브는 그에게 이런 소리를 듣기를 바란 게 아니었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아요. 도대체 뭘 믿고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제가 어디든 가서 이런 이야기를 떠들면 어쩌시려고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리브가 결국 다그치듯 그에게 대꾸했다.

“신분도 그렇고 하시는 일도 그렇고, 드러내길 원치 않으시잖아요? 감정에 휩쓸려 뱉기에는 경솔한 발언들이에요.”

“제 신분이야 조금만 조사하면 나오고, 후작에 관한 일이야… 굳이 제가 아니어도 누구든 그의 뒷조사를 하고 있을 겁니다. 굳이 떠들고 다닐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숨길 일도 아니죠.”

뻔뻔하기까지 한 카밀의 말에 리브가 입을 떡 벌렸다. 남의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게 저리도 당당하게 밝힐 일이었던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걸 제게….”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선생님께 관심이 있다고. 제 일과는 별개로요.”

다 털어놓았다는 사실에 후련함을 느낀 건지, 카밀은 여유로운 본래의 미소를 되찾은 상태였다.

“말을 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것 같아서요. 더는 선생님께 의심스러운 사람 취급 받고 싶지도 않고.”

“이런 말을 들어서 제가 더 거리를 둘 거라는 생각은 안 드세요?”

“그 말을 들으니 조금 후회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어쩔 수 없죠.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리브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차라리 그가 리브와 한번 자 보고 싶다고 말했다면 좀 더 설득력 있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말은 단순히 그런 종류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낭만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당황스러운 쪽에 가까웠다. 기껏해야 오가며 대화 몇 번 하고, 얼굴 몇 번 본 게 전부인 사이가 아닌가. 게다가 카밀의 이런 수상쩍은 접근은 최근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저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요. 마르셀 선생님은 저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제게 친근감을 보이셨죠. 설마 그게 아무 사심 없는 접근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리브의 지적에 이번에는 카밀이 말문을 잃었다. 이마를 긁으며 난처한 표정을 짓던 그가 체념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자진 신고하겠습니다. 그때는 선생님이 후작과 어떤 관계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후작님과요?”

“정확히는… 디트리언 후작이 펜던스 남작가를 방문한 이유가 정말 남작 부부와의 관계 때문인지 아닌지 확신이 안 섰거든요. 그래서 후작이 이 저택에 방문했을 때 있었던 모든 사람을 주의 깊게 보려 했습니다.”

리브는 후작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하인의 실수로 우연히 마주쳤던 바로 그때.

그러고 보면 그 당시 작업했던 누드화의 구매자는 후작이었다. 리브가 알지 못하는 사이 이미 후작과의 접점이 존재했던 것이다. 물론 후작은 누드화의 모델이 리브라는 걸 몰랐겠지만….

‘몰랐겠지?’

그가 리브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옆모습이 그려진 누드화를 수령하고 난 뒤일 것이다. 그림에 그려진 옆모습을 알아봤으니 예배당에서도 아는 척을 했던 것일 테고. 그 누드화가 아니고서야 그 대단한 남자가 그녀를 인지할 일이 있겠는가.

“터무니없는… 억측이네요.”

“뭐, 워낙 실마리가 없었으니까요. 특히 로이데스 선생님의 동선은 묘하게 후작과 겹치는 부분들이 보여서 좀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리브는 전에 다니던 작은 예배당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상상도 못 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알았다. 후작이 예배당에 나타났던 건 그녀를 보기 위해서였음을.

“그래서 그 의혹은 해결되셨나요?”

“후작이 남작가를 방문했던 건 정말로 미술품 거래 때문이었습니다. 워낙 까탈스러운 사람이라, 점찍은 건 꼭 가져야 속이 시원한 모양이에요. 대체로 미술품은 로이븐 미술관장을 통해 구매하는데, 남작이 구매했던 건 다른 유통로였다더군요.”

카밀이 유독 펜던스 남작과 친밀하게 지냈던 건 전부 후작과의 관계를 캐내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그야말로 제대로 헛다리를 짚은 셈이었다.

“저와의 연관성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놀리시는 거라면 정말 부끄럽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결벽적으로 여성을 멀리한다는 건 이미 알아냈어요.”

“결벽적으로….”

카밀의 대답을 입 안으로 곱씹으며 리브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카밀과 저는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괴리감이 커질수록, 이상하게도 리브는 그만큼 자신이 후작과 가까운 사이라는 걸 체감했다.

비록 후작은 침대 위에서 처음이었던 자신에게 조금도 배려를 보여 주지 않았고, 냉소적인 말버릇으로 종종 사람의 속을 긁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브는 그와 제법 가까운 사이였다. 야릇한 키스를 하고, 그의 침상에 오르고, 그의 도움을 받는 사이. 당사자와 후작의 측근밖에 모르는 관계라고 해도.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그와 이렇게 은밀하게 가까워진 관계 정도는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이 정도라면.’

누구에게도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없는데도 내심 기분이 좋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음습한 우월감도 느껴졌다. 열심히 뒤를 캐고 다니는 카밀도 리브가 아는 후작을 전혀 모르지 않나.

리브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카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후작은 병적일 정도로 누드 작품을 좋아한다니 이상 성욕이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누드 작품이라는 말에 리브가 무심코 표정을 굳혔다. 그 반응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카밀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이건 괜히 퍼뜨리는 헛소문이 아니라 로이븐 미술관장을 통해 알아낸 정확한 정보입니다.”

“아, 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리브가 괜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차 위로 리브의 얼굴이 비쳤다.

단순한 미술품 수집가가 아니라 누드 작품을 유난스럽게 모으는 취미가 있었던 건가. 그래서 브레드의 누드화를….

거기까지 생각하던 리브는 문득, 단 한 번도 떠올린 적 없던 의문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브레드는 다른 누드화들도 전부 팔렸다고 했는데. 그럼 그 누드화들을 구매한 사람이….’

생각해 보면 브레드는 데뷔도 못 한 화가이니 작품을 파는 경로가 요원했을 텐데. 브레드가 누드화만 그리는 것도 아닌데, 그가 다른 그림을 팔았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부에르노에서 후작을 제외하고서 브레드의 누드화를 사 갈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내가 모델로 선 다른 누드화들이 전부 후작에게 있는 거라면….’

그가 이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던 거라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기묘한 상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설사 그에게 다른 작품들이 있다고 해도, 전부 뒷모습이니까 알아봤을 리가 없는데.’

게다가 제 머리색이 특이한 색도 아니니 모델을 특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대화할수록 도리어 점수만 깎아 먹는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고백했으니 참작해 주세요.”

엄살을 피우듯 말하는 카밀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 준 리브가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사이를 원활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카밀을 앞에 두고, 리브의 머릿속은 온통 후작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

생각지도 못한 카밀과의 대화로 인해 정신이 쏙 빠진 리브는 무언가에 홀린 기분으로 펜던스 남작가를 나섰다.

카밀이 신분을 숨기고 있던 엘레오노르 가문의 막내였다니.

겨우 몇 개월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평범하던 그녀의 삶에 얽힐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대단한 사람들이 끼어든 게.

대단하신 귀족 나리들이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은밀하게 움직이는지 리브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자신처럼 아무런 힘도 없는 평민은 그런 일에는 연관되지 않는 게 가장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와 후작의 은밀한 만남에 관해서는 카밀에게 들키지 말아야 했다.

아니, 카밀이 아닌 누구에게라도.

후작의 침상에 오르고, 그의 관심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큰 파문을 일으킬지야 뻔했다. 단지 후작과 이름을 나란히 올리는 것만으로도 생활은 엉망진창이 될 터였다. 그녀 자신도 문제지만, 코리다를 생각하면 더욱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지켜야 했다.

“리브 양?”

생각에 잠겨 걷던 리브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서 짙은 갈색 망토를 두른 남자가 리브를 향해 반갑게 아는 척해 왔다. 리브는 어렵지 않게 그를 알아보았다.

“아, 베트릴.”

그는 리브가 예전에 다니던 작은 예배당에서 봉사 활동을 하던 베트릴이었다. 예배당으로 가던 걸음을 끊고부터는 마주칠 일이 없었던 터라, 무척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이었다.

“와, 여기서 뵐 줄이야! 그러고 보니 펜던스 남작가에서 근무하신다고 하셨던가요?”

시원스럽게 악수를 청해 온 베트릴이 리브가 방금 나온 방향을 확인했다.

“네, 맞아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베트릴.”

“그러게 말이에요! 그동안 예배당은 왜 오지 않으신 거예요? 설마 다른 곳으로 옮기신 건 아니죠?”

“아….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어서, 예배당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졌어요.”

아무리 급하게 이사했다고 해도, 예배당에는 한 번 정도 들러서 말을 전해 두는 게 좋았을까?

당시에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고, 이후에도 정신없이 사느라 미처 예전 동네에서 사귄 사람들에 관해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리브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웃이었던 리타도 갑작스럽게 이사한 리브와 코리다를 서운하게 여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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