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달리스크 (58)화 (58/138)

당장 그렇다는 대답이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밀리언은 멈칫했다. 미간을 찡그린 채 입술을 우물거리던 밀리언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래? 추기경님은 펜던스 남작가에서 모시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니?”

“방을 준비하지 말라는 연락이 왔거든요. …글쎄, 디트리언 후작님과 아는 사이시래요. 식사 정도는 이곳에서 대접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숙소는 디트리언 후작님의 저택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리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트리언 후작님의 저택?”

“네. 역시 높으신 분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자기들끼리 다 알고 지내나 봐요.”

뜻밖의 말에 침묵하는 리브의 반응에, 밀리언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래서 제가 추측을 해 봤는데요, 선생님. 말테 공작 영애의 파혼이 혹시 디트리언 후작님 때문은 아닐까요?”

“응?”

“일단 ‘그’ 디트리언 후작님이 손님을 받아들인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게 마침 얼마 전에 파혼한 말테 공작 영애라고요! 게다가 두 사람은 미혼이고요! 어쩌면 디트리언 후작님이 오랜 시간 미혼으로 쓸쓸하게 지내신 건, 약혼자가 있는 말테 공작 영애를 짝사랑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번에 운명적으로 재회하는 거죠!”

멍하게 밀리언을 보던 리브가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에는 또 무슨 소설을 읽은 거니?”

“아이, 소설이 아니라요! 정말 그럴듯하지 않아요?”

“네 꿈을 깨뜨려서 미안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언제나 밀리언의 말에 동조해 주었던 리브가 이번만큼은 드물게도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밀리언이 실망스럽다는 눈으로 리브를 보았으나 그녀는 단호한 얼굴로 교재를 펼칠 뿐이었다. 결국 밀리언도 입술을 삐죽이며 사담을 멈추었다.

금방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밀리언을 힐끗 본 리브가 미묘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쩐지 혀끝에서 쓴맛이 나는 듯했다.

수업을 조금 일찍 끝냈다.

밀리언이 수업을 일찍 끝내고 후원에서 차를 마시고 가라며 졸랐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엄격하게 시간을 지키려 했겠지만… 리브는 선뜻 그녀의 의견을 수용하기로 했다.

일전에 후원을 안내해 주려다 못했던 게 못내 아쉬웠던지, 이번에야말로 밀리언은 리브를 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화단을 소개했다.

“어? 카밀 선생님!”

하녀들이 다과를 준비해 둔 야외 테이블에 도착한 밀리언과 리브는, 때마침 후원을 거닐던 펜던스 남작과 카밀을 마주쳤다.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은 밀리언의 목소리를 듣고는 동시에 이쪽을 보았다. 리브도 얼른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대로 떠날 줄 알았던 두 남자가 멈춰 서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후, 카밀이 웃는 낯을 한 채 야외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밀리언에게 시선을 주며 말을 걸었다.

“그러지 않아도 수업이 끝나는 대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이곳에서 마주치다니, 낭만적이네.”

“저를요?”

“정확히는 남작님께서 네게 볼일이 있으셔서.”

펜던스 남작은 멀찍이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제 딸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자마자 떼게 생긴 밀리언이 울상을 지으며 리브를 돌아보았다. 카밀 역시 리브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혹시 수업이 안 끝났습니까?”

밀리언이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일단 아버지에게 불려 가기 싫다는 의지를 가득 담은 눈빛이었다. 그 노력이 안타깝기는 했으나, 리브로서는 고용주의 눈 밖에 나는 위험을 감수하기 어려웠다.

“아니요, 수업은 끝났어요.”

“다행이군요. 밀리언, 남작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 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과 다 준비됐는데….”

어깨를 늘어뜨린 밀리언이 입술을 삐죽이며 테이블 위를 힐끔거렸다. 특별히 준비한 먹음직스러운 딸기 케이크가 반지르르한 색을 자랑하며 놓여 있었다. 그러나 밀리언은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차마 못 본 적 할 수 없었는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밀리언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한 걸음 비켜서 준 카밀이 생글생글 웃으며 질문했다.

“괜찮다면 선생님이 네 자리에 앉아도 괜찮을까?”

“그러세요.”

불퉁하게 대답한 밀리언이 펜던스 남작에게 다가갔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부녀의 대화 소리를 들리지 않았다. 잠시 실랑이를 벌이는가 싶던 부녀는 함께 후원 밖으로 몸을 돌렸다.

야외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브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은 카밀이 얼른 그녀를 만류했다.

“괜찮습니다. 다과는 마음껏 즐기셔도 돼요. 남작님께도 허락받았습니다.”

“네?”

“말씀드렸거든요. 제가 선생님께 관심이 있는데 쉬이 기회를 잡기 어려워서,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고.”

엉거주춤 행동을 멈춘 리브가 눈을 깜빡였다. 놀란 얼굴로 굳어 있던 리브가 차츰차츰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었다.

“…농담이시죠?”

“진담인데요?”

워낙 가벼운 태도를 보이던 사람이라 지금 이 말도 농담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리브를 향해 시원한 미소를 짓는 카밀의 얼굴 그 어디에도 장난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입술을 벙긋거리던 리브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어조로 되물었다.

“정말로 남작님께 그런 소리를 하셨다고요?”

“네. 남작님의 도움이라도 받지 못하면 통 이런 자리를 만들지 못할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지금 펜던스 남작이 밀리언을 데리고 가 버린 건, 카밀과 자신의 다과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라는 건가. 언제부터 펜던스 남작이 가정 교사의 중매쟁이 노릇을 했다고?

리브가 눈가를 꾹 눌렀다. 어이가 없으니 화조차 나질 않았다.

“저로서는 달갑지 않은 방법이네요.”

“아, 펜던스 남작님께서는 그저 저를 불쌍하게 여기신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남작님께 항의할 생각은 없어요. 그럴 처지도 아니고요.”

단호하게 카밀의 말을 끊은 리브가 힐끗,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마르셀 선생님과 달리 저는 그분들께 고용된 처지예요.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 없답니다.”

원하는 말을 언제든 전할 수 있는 카밀과 달리 리브는 좀 더 신중하게 말을 골라야 했다. 리브의 대꾸에 담긴 책망을 눈치챈 카밀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저도 똑같이 고용된 처지입니다.”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이마를 짚은 채 잠시 침묵하던 리브가 크게 심호흡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대화를 이어 가는 건 피로감만 가중하고 있었다. 이미 후작의 존재만으로 온 정신을 빼앗기고 사는데, 굳이 누군가와 더 엮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슨 목적으로 펜던스 남작가에 오신 건지, 왜 저에게 자꾸 접근하시는지 짐작 가는 바가 없어요. 알고 싶지도 않고요. 다만 서로의 생활 영역이 겹쳐질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앞으로도 각자의 삶을 살았으면 해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리브의 말을 듣던 카밀이 나지막하게 침음을 삼켰다.

“음, 제가… 많이 수상해 보이시나 봐요.”

“안 수상한 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저는 바보가 아니에요.”

무엇을 숨기든 자신과 상관없으니 모른 척하려고 해도, 상대방이 이렇게까지 다가오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리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밀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가 고민스럽다는 듯 끙끙거리다가, 이내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마르셀’이라는 성은 제 어머니의 성입니다.”

아니, 정체를 밝히라는 말이 아니었다.

리브가 그의 말을 막기도 전, 카밀이 먼저 대뜸 고백을 이어 갔다.

“아버지께서는 ‘엘레오노르’라는 성을 사용하세요.”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하려던 리브가 헛숨을 들이켜며 입술을 다물었다.

엘레오노르는 베렌의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이었다. 몇 대째 왕의 측근으로 지내 왔으며, 지금도 중앙에서 권력이 강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정치뿐만 아니라, 상업과 예술 쪽으로도 두드러진다고 들었다.

“설마 엘레오노르 백작….”

“그건 제 큰형이고요. 참고로 사업체를 관리하는 건 제 작은 형입니다. 성직의 길을 걷고 있는 건 막내 형이고. 넷째인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미술 공부를 좀 했을 뿐이지요. 다만 가끔, 집안일을 조금 돕는 정도만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손사래를 치며 얼른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카밀이 입술을 깨물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설명하자면 말이 길어지기도 하고, 이래저래….”

“지금 이 이야기도 제게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리브는 아까보다 더 강경한 어조로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 불편함만 가득했다.

“아, 선생님은 정말 어려우신 분이네요.”

리브와의 거리감이 몇 배로 늘어났다는 걸 깨달은 카밀이 탄식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사실 제 가문을 밝히면 대부분 과장된 태도를 보이거든요. 그게 싫어서 대외 활동을 할 때는 어머니 성을 사용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엘레오노르가 아무 힘도 못 된다는 게… 이렇게 안타까울 줄이야.”

가문의 권위에 굴해 비위라도 맞추라는 소리인가.

떨떠름한 생각이 치밀었으나, 리브는 내색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랬더니만 카밀은 더욱 가관인 소리를 이어 나갔다.

“부에르노에 온 건, 사실 디트리언 후작 때문입니다. 그가 꽤 훌륭한 뒷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집안에서는 그가 행여 타국의 첩자가 아닐지 걱정하고 있거든요. 물론 일반적인 첩자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만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왔다면, 당연히 수상쩍어 보이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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